체코 사람들에게 2019년은 아주 뜻깊은 해다. 얀 팔라흐 분신자살 50주년, 체코 자유화 3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격동의 역사 현장이 바로 바츨라프 광장이다. 이 광장은 시가지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대로처럼 보인다. 이곳에는 고급 매장, 고급 호텔, 고급 레스토랑 등이 밀집해 있어서 언뜻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같은 인상을 준다.
▎길쭉하고 널찍한 바츨라프 광장. 멀리 국립박물관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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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타바강 변에 자리 잡은 프라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프라하의 중심은 구시가지 광장이다. 이 광장은 11세기에 시장으로 조성된 이래로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으로 발전하여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손꼽힌다. 어떻게 보면 이 광장은 시대와 양식이 다른 건축물들의 전시장 같다. 이 광장 한쪽에는 커다란 얀 후스(1369~1415) 기념상이 자리 잡고 있다. 당당한 모습으로 홀로 우뚝 서 있는 얀 후스는 불의에 맞서 끝까지 진리를 외치다가 화형을 선고받고 불 속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져간 인물이다. 그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리기 이미 100여 년 전에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주인공으로 체코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힌다. 이 기념상은 외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자 더 나아가 체코 독립의 상징이기도 하다.구시가지 광장에서 남쪽으로 약 450m 지점에는 바츨라프 광장이 있다. 폭 60m에 길이가 750m에 달하는 길쭉한 형태의 널찍한 이 광장과 주변에는 고급 상가, 고급 호텔, 고급 레스토랑 등이 밀집해 있어서 언뜻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같은 인상을 준다. 이 광장 일대는 프라하에서 신시가지로 불린다. 그런데 ‘신시가지’라고 해서 최근에 개발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신시가지의 기원은 자그마치 약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1348년에 카렐 4세가 허허벌판이던 이곳을 신시가지로 만들면서 광대한 시장 공간을 조성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정기적으로 말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곳은 ‘말 시장’으로 불렸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말 상인들과 짐마차꾼들이 몰려들던 장소였고, 주변에는 다양한 작업장과 여관, 선술집, 창고 등이 들어서 있었다. 프라하의 독일어권 지배층이 주로 구시가지 광장의 궁전이나 블타바강 건너편 흐라트차니 구역의 대저택에 거주했다면 이 일대는 체코어를 쓰는 대부분의 일반 서민이 생활하던 곳이었다.
‘말 시장’에서 ‘바츨라프 광장’으로오랫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온 체코 사람들은 18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에 고무된 이들에게 ‘말 시장’이라는 이름보다는 뭔가 좀 품위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848년부터 이곳을 바츨라프 광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이 광장은 189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국립미술관을 비롯해 1900년대 초반의 호텔 에브로파와 같은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부터 번화가로 변모했으며, 아울러 광장 이름에 걸맞게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도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그럼 바츨라프는 어떤 인물인가?국립박물관 앞에는 성 바츨라프(Václav)의 청동기마상이 길게 펼쳐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서기 907년에 태어났다. 당시 보헤미아에는 기독교가 아직 널리 전파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할머니를 통해서 기독교식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고 나중에 보헤미아의 통치자가 된 다음에는 독일 교회의 도움으로 이곳을 기독교화하는 데 힘썼다. 또 전설에 따르면 그는 국난이 닥쳤을 때 동굴에서 잠자고 있던 보헤미아의 기사들을 깨워 적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와 동생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이교도 신앙을 고집했으며 반대파 귀족들과 손잡고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를 죽이려고 수차례 기회만 엿보던 그의 동생은 마침내 935년 9월 28일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고 말았다. 바츨라프는 죽는 순간에 “주여, 당신의 손에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라고 외쳤다고 한다. 또 죽음의 현장에서 나무 바닥에 흘린 그의 피는 아무도 닦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순교자 반열에 올라 체코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그의 시신은 성 비투스 대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그가 순교한 9월 28일은 2000년에 체코의 국경일로 정해졌다.
체코의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
▎국립박물관을 배경으로 세워진 성 바츨라프 기마상.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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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어권에서는 그를 웬스슬라스(Wenceslas)라고 하는데 영어권의 크리스마스 캐럴 ‘선한 왕 웬스슬라스(Good King Wenceslas)’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래 가사는 눈보라가 매섭게 휘몰아치던 크리스마스 다음 날 웬스슬라스가 거리에서 땔감을 찾아 헤매던 한 가난한 농부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는 내용이다.성 바츨라프의 기마상과 보헤미아 성자 4인의 동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단에는 체코어로 ‘체코 땅의 영도자이며 우리의 주군(主君) 성 바츨라프여,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소서!’라는 문장이 새겨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문장에는 이 땅을 스쳐간 격동의 역사가 함축되어 담겨 있는 것 같다. 체코 사람들에게 2019년은 아주 뜻깊은 해인데, 그것은 얀 팔라흐 분신자살 50주년, 체코 자유화 3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 격동의 역사 현장이 바로 바츨라프 광장이다.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합스부르크 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1918년 10월 28일, 바로 이 광장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즉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던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합쳐져 단일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1993년에 두 나라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치 독일로부터 심한 고난과 고통을 받을 때 이 광장은 나치가 선동한 대중집회가 열리는 곳으로 전락했다.
격동의 역사 현장
▎프라하의 중심 구시가지 광장에 세워진 얀 후스 기념상.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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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화되고 말았다. 공산 치하에서 1968년 1월 5일 새로 선출된 두브체크 공산당 서기장의 주도 아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향한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 ‘프라하의 봄’을 짓밟기 위해 8월 21일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50만 병력은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를 전격 침공하고는 이어서 언론을 장악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항거했다. 1969년 1월 16일에는 당시 카렐대학교 학생이던 20세 얀 팔라흐가 이 광장에서 분신하여 3일 후에 카렐대학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장례식 때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이어서 2월 25일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 얀 자이츠가 얀 팔라흐가 분신했던 곳에서 분신자살했으며, 이어서 다른 도시 이흘라바에서도 한 청년이 분신자살했다. 하지만 어떠한 저항도 소용없었다. 사태를 평정한 공산정권은 두브체크를 산림지기로 쫓아냈고, ‘정상화’라는 이름으로 탄압정치를 계속했다. 그런데 19년이 지난 1987년, 신임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두브체크 식의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그 후 얀 팔라흐 죽음 20주년을 기념하는 1989년 1월과 2월에 다시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는데, 변화를 거부하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은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열 달 후 상황은 또 한 사람의 바츨라프에 의해 완전히 바뀌었다. 그가 바로 반체제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이다. 그해 11월 그가 구심점이 되어 수십만 군중이 이 광장에 모여 자유를 외쳤다. 이 무혈혁명 앞에서 마침내 공산주의 시대는 맥없이 막을 내렸고, 바츨라프 하벨은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두브체크는 국회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고는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가 분신했던 자리에 청동십자가가 놓였다. 지금도 체코 정부 지도자들은 어렵게 쟁취한 자유를 상기하면서 이 십자가 위에 헌화한다. 이 십자가는 조용히 외치고 있는 듯하다. ‘성 바츨라프여,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소서!’라고.
▎국립박물관 앞에서 내려다본 바츨라프 광장. 격동의 역사 현장이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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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를 기념하는 청동십자가.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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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기념상 앞 꽃밭에 놓인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 추모비.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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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에서 1930년 사이 이 광장에 세워진 아르누보 양식 건축물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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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