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오스트리아 빈(Wien) 

장려한 링슈트라세 따라 울려 퍼진 폴카 

세련되고 귀족적인 품위를 지닌 빈 시가지가 지닌 물리적인 특징 중 하나는 널찍한 ‘링슈트라세(Ringstrasse)’가 빈의 핵심지역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이 품위 있는 순환도로의 폭은 57m, 총길이는 약 5㎞인데 ‘왈츠의 왕’으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 도로와 음악적으로 관계가 있다. 왜냐면 [데몰리어 폴카]를 작곡했기 때문이다.

▎아테나 여신상 뒤에서 본 링슈트라세. 멀리 슈테판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이라면 먼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우아하고 달콤하고 경쾌한 멜로디가 연상된다. 빈은 이탈리아어 이름인 비엔나(Vienna)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어느 표기이든 우아하고 달콤한 그 무엇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니까 도시명과 도시의 분위기가 서로 잘 어울린다고나 할까. 사실 빈은 세련되고 귀족적인 품위가 강하게 느껴지는 도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시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하던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으니 말이다.

빈의 핵심지역을 둘러싼 품위 있는 순환도로


▎링슈트라세 남쪽 시립공원 안에 세워진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기념상. / 사진:정태남
이러한 빈 시가지의 핵심 중의 핵심은 슈테판 대성당이다. 이 거대한 고딕양식 대성당의 높은 첨탑은 1368년 착공해 65년 만인 1433년에 완공된 것으로 높이가 약 136.4m나 되니 빈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축 구조물이다. 빈 시가지가 지닌 물리적인 특징 중 하나는 품위 있는 널찍한 대로가 빈의 핵심지역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폭 57m, 총길이는 약 5㎞인 이 도로는 ‘링슈트라세(Ringstrasse)’, 즉 ‘순환도로’로 간단히 링(Ring)이라고도 한다.


▎전차가 미끄러지듯 달리는 링슈트라세. 국회의사당 건물과 그 너머 시청사의 첨탑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링슈트라세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과 그 사이에 잘 조성된 공원과 숲이 눈길을 끈다. 또 이 도로 주변에 세워진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기념상을 보면 빈이 ‘클래식 음악의 성지’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런데 링슈트라세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시대에는 없었다. 반면에 브람스는 1862년 9월부터 빈에 본격적으로 거주했으니 링슈트라세 건설공사와 도로변에 건물들이 세워지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봤던 셈이다. 브람스보다 8년 선배이자 같은 시대에 빈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링슈트라세와 음악적으로 관계가 있다. 왜냐면 [데몰리어 폴카(Demolier Polka)]라는 곡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데몰리어’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철거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니 곡명치고는 다소 생소하다. 그가 작곡한 수많은 왈츠, 폴카, 행진곡 중에는 이런 생소한 제목이 붙은 곡이 적지 않은데 모두 특정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조간신문]이란 곡은 작가들과 언론인들로 구성된 한 클럽 주최 무도회를 위해 작곡한 것이고, [거래 왈츠]는 빈의 주식중개인들을 위해 작곡했으며, [빠른 박동의 왈츠]는 빈의 의과대학 학생들을 위해 작곡했다. [데몰리어 폴카(Demolier Polka)]는 철거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곡했다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철거했을까?

'데몰리어 폴카'와 링슈트라세 건설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을 연상하게 하는 국회의사당. 그 앞에 아테나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 사진:정태남
오늘날 유럽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중세 성곽도시들처럼 빈도 중세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도시 성벽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더욱더 굳건하게 보강되었는데, 가장 위협적이었던 외적은 오스만 튀르크(터키)였다. 오스만 튀르크는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고는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헝가리를 비롯한 동부 유럽을 손아귀에 넣었고, 그다음에는 오스트리아 본토로 침공하여 1529년과 1683년에는 빈을 오랜 기간 동안 포위했다. 당시 빈은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굳건한 도시 성벽 덕택에 그래도 안전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 전투의 양상이 바뀌는 바람에 도시 성벽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즉, 나폴레옹의 군대가 오스트리아 제국 본토를 침공하여 1805년에는 아우스테를리츠에서, 1809년에는 발그람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도시를 포위하여 시간을 끄는 지구전이 아니라 아예 들판에서 한판 붙어 승부를 빨리 가리는 전투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옛날처럼 군대로 빈의 도시 성벽을 포위하여 공방전을 벌이지 않고 빈에 그대로 무혈입성하다시피 했다.


▎플랑드르 고딕양식 복고풍의 화려한 시청사. / 사진:정태남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 다음 1815년 이후부터 오스트리아는 다시 옛날처럼 보수왕정체제로 돌아갔다. 하지만 1848년에 변화를 요구하는 바람이 유럽 곳곳에 불어닥친 가운데 3월 13일에는 빈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시내 곳곳에서 바리케이드를 세웠고 당국은 이 사태를 혹독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결국 무능한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물러나고 18세의 조카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가 즉위했다. 이 신임 황제는 장장 68년 동안 제국을 통치하면서 빈의 시가지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먼저 그는 빈을 새롭게 개조하기 위해 1857년 11월 20일에 기존의 도시 성벽과 해자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로를 만드는 대대적인 도시계획안에 서명했다. 그가 이 계획을 승인한 이유는 대로가 뚫려 있으면 시민 폭동을 진압하기가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1848년 시민혁명을 진압할 때 도시 성벽이 장애물이 되었던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링슈트라세가 있으면 도시가 더 장려하게 보일 뿐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광도 더욱더 빛을 보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중세의 도시 성벽과 해자를 철거하고 만든 널찍한 순환도로 링슈트라세. / 사진:정태남
링슈트라세 건설 계획에 많은 사람이 회의적이었고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백 년 동안 빈을 지켜온 도시 성벽은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이 철거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을 ‘데몰리어(Demolier)’라고 불렀다. 이들은 보헤미아, 슬로베니아, 헝가리 등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원이었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성벽 철거 상황을 음악으로 기록하려는 듯 1862년에 [데몰리어 폴카]를 작곡하여 그해 11월에 초연했다. 도시 성벽이 완전히 철거되고 1865년에 마침내 널찍한 링슈트라세가 모습을 드러내자 빈 시민들은 열광했다. 개통식 때는 이 대로를 따라 카니발과 같은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졌으며, 제국 군악대가 연주하는 [데몰리어 폴카]의 경쾌한 선율에 맞추어 시민들은 흥겹게 춤을 추었다.

역사주의 건축물의 전시장


▎베네치아 르네상스양식 복고풍의 국립오페라극장. / 사진:정태남
그 후 도로변에 국립오페라극장, 미술아카데미,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의사당, 궁정극장, 시청, 국립빈대학교 등 많은 공공건축물이 세워졌을 뿐 아니라 빈의 귀족층과 산업혁명 이후 탄생한 돈 많은 중산층 계급을 위한 개인 건물들도 주변에 세워졌다. 이러한 건축물들을 세우고 숲과 공원을 조성하는 데는 무려 40년이 걸렸다. 그런데 이 건축물 대부분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취향에 맞게 모두 고전양식부터 시작하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 등 역사에 등장했던 옛날 양식을 교과서처럼 따르고 있다.


▎바로크양식 복고풍의 궁정극장. / 사진:정태남
의사당은 그리스와 로마를 연상하게 하는 고전양식 복고풍이며, 시청사는 플랑드르 고딕양식 복고풍이고, 빈 국립오페라극장은 르네상스양식 복고풍이며, 궁정극장은 바로크양식 복고풍이다. 그러니까 링슈트라세는 한마디로 지구상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역사주의 건축물의 전시장이 된 셈이다. 사실 이런 건물들과 이에 관계된 장식들은 당국의 요구에 따라 하나같이 역사주의에 빠져서 지나간 시대 건축양식의 테마나 장식을 복원해놓은 듯 틀에 박힌 것이었다. 이에 일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중 건축가 오토 바그너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링슈트라세 건축물의 건축과 장식에 관여했지만 그들의 혈관 속에는 이런 역사주의와 단절하고 전통에서 벗어나 뭔가 새롭고 자유로운 표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이리하여 세기말 빈에서는 새로운 예술이 태동하게 된다. 하지만 일반 빈 시민들은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링슈트라세의 인상적인 공공건물들을 바라보면서, 또 화려하게 꾸며놓은 공원을 거닐면서 빈에 ‘새로운 아테네’가 조성됐다고 찬탄했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001호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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