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중심가를 남북으로 잇는 동맥 같은 거리인 비아 델 코르소는 로마 카니발 기간 중 야생마 경주가 열리던 곳이었다. 로마 카니발은 180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상당히 유명했다.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관현악곡 [로마의 카니발]이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것만 봐도 당시 로마 카니발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포폴로 광장의 카니발 행사. 쌍둥이 성당 사잇길이 비아 델 코르소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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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인들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엄청난 도로망을 건설했다. 지금도 로마 지도를 보면, 로마 주변으로 방사선처럼 도로들이 뻗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도로 중 상당수는 고대 로마인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 세워진 것이다. 비아 델 코르소(Via del Corso)는 로마 중심가를 남북으로 잇는 동맥과 같은 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쪽의 베네치아 광장과 북쪽의 포폴로 광장을 연결하는 약 1.6㎞ 길인데, 로마로 통하는 모든 길 중 하나였던 비아 플라미니아(Via Flaminia)의 첫 구간에 해당한다. ‘비아(Via)’는 ‘길’이란 뜻이고, ‘플라미니아(Flaminia)’는 ‘플라미니우스의’라는 뜻이다.
▎비아 델 코르소의 카니발 기마 행렬.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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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통하는 길’ 비아 플라미니아
▎카니발 복장을 한 남자. 비아 델 코르소라는 거리 표지판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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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플라미니아는 기원전 220년에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가 건설했다. 이 도로는 고대 로마의 중심이었던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해 캄피돌리오 언덕 동쪽을 돌아 북쪽으로 폰테 밀비오(밀비오 다리)까지 직선으로 뻗었다가 테베레강 상류의 골짜기를 따라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동부 해안 도시 리미니까지 이르는 장장 329㎞ 거리를 연결했다. 이 도로는 아스팔트를 깔아 지금도 상당 부분이 국도로 사용되고 있다.비아 플라미니아라면 한니발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217년 플라미니우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을 때 한니발 군대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고는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플라미니우스는 그를 직접 상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페루지아 근교 트라지메노 호숫가 숲에서 매복하고 있던 한니발의 기습공격을 받아 수많은 부하와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한니발은 비아 플라미니아를 따라 남진하면 불과 닷새면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로마는 완전히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어질 수도 있는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니발은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곧장 남하해 로마를 공략하지 않고 진로를 동쪽으로 돌려 남부 이탈리아에 거점을 잡았다. 그는 최후의 목표 로마는 당분간 남겨두고 계속 로마군에게 패배를 안겨주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다시 진용을 갖춘 로마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전통의상을 입은 로마 카니발 행사 해설자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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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육로로 로마에 오는 사람 대부분은 로마 중앙역인 테르미니 역에서 내려 퀴리날레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이 마주치는 골을 따라 서쪽으로 뻗어 있는 비아 나찌오날레(Via Nazionale) 거리를 지나 베네치아 광장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지만 로마에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쪽에서 로마에 들어올 때는 비아 플라미니아를 따라 포폴로 광장에 먼저 들어왔다가 멀리 캄피돌리오 언덕을 보면서 순례자와 같은 심정으로 비아델 코르소를 밟았으리라.
‘경주(競走)의 거리’ 비아 델 코르소
▎비아 델 코르소의 카니발 행렬.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군의 행진을 재현했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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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델 코르소는 중세에는 ‘널찍한 길’이란 뜻으로 비아 라타(Via Lata)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1466년 교황 파울루스 2세가 8일 동안 열리는 로마 카니발 행사의 하나로 이 거리에서 야생마 경주를 개최하도록 한 이래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즉, 비아 델 코르소는 ‘경주(競走)의 거리’라는 뜻이다. 한편 야생마 경주는 당시 로마의 북쪽 관문이던 포폴로 광장에서 출발해 비아델 코르소를 달려 캄피돌리오 언덕 아래에 있는 베네치아 광장까지 달리는 것이었는데, 로마 카니발 행사 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니 길 양쪽에 세워진 귀족 소유의 건물 창과 발코니는 귀족들을 위한 객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길 중간쯤에 있는 콜론나 광장에서는 카니발 불꽃놀이 행사가 열리곤 했다. 이와 같이 로마 카니발의 중심 무대가 된 곳은 바로 비아 델 코르소였다.한편 카니발은 아무 때나 하는 축제가 아니다. 그 기원은 고대 로마인의 축제인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투르날리아는 동지(冬至)쯤 열리는 축제로,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감사하던 행사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축제 기간 중 사회의 약자는 강자를 놀릴 수 있었고, 노예도 주인처럼 행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다수의 민중에게 사투르날리아는 일 년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중세에 접어들어서도 교회는 이러한 이교도의 축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사투르날리아는 기독교 절기 행사에 접목되었고, 축제 일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경건하게 지내야 하는 사순절 직전으로 변경되었다.
▎로마의 지리적 중심인 베네치아 광장에서 본 비아 델 코르소.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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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탈리아에서 카니발이라면 가면 축제로 유명한 베네치아 카니발과 정치를 풍자하는 가장행렬 축제로 유명한 비아레지오 카니발을 가장 먼저 손꼽는다. 로마 카니발은 오랫동안 시들해졌다가 최근에 서서히 부활하고 있지만 180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베네치아 카니발 이상으로 유명했다. 음악사에서 관현악의 혁명가라고 불리는 프랑스 음악가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로마의 카니발,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이 초연되자마자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것만 봐도 당시 로마 카니발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곡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베를리오즈의 '로마의 카니발'
▎트럼펫을 부는 기병대.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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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로마대상(Prix de Rome)을 받은 28세의 베를리오즈는 1831년 12월 30일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로마로 향했다. 그런데 로마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리에 두고 온 약혼녀가 변심하여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런 일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워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로마 생활에 별로 애착이 없었고 로마의 환경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는 로마 체류 기간 중 한 곡도 쓰지 않았다.
▎로마 체류 시절에 그려진 젊은 베를리오즈의 초상화.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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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파리로 돌아간 그는 1834년에야 비로소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벤베누토 첼리니]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1500년 피렌체 태생의 유명한 보석 공예가이자 조각가였다. 이 오페라는 첼리니가 로마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532년 카니발 기간 중에 벌어진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장장 4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이 대작 오페라는 1838년 9월에 파리의 무대에 올려졌다. 하지만 완전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이에 따른 금전적 손실도 막심했다. 그렇다고 이 아까운 작품을 그대로 모두 버릴 수는 없는 법. 5년 후에 그는 생각을 달리하고 자기가 쓴 오페라 중 몇 군데를 발췌하여 새로운 ‘제품’을 구상했다. 즉, 이 오페라 1악장에 나오는 사랑의 이중창과 불꽃놀이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묘사한 곡을 되살려 약 9분 정도 길이의 완전히 새로운 관현악곡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카니발, 오케스트라를 위한 서곡](Le carnaval romain, ouverture pour orchestre Op.9)이다. 이 작품에서는 성악곡을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음색의 오케스트라 곡으로 바꿔놓은 그의 놀라운 능력이 돋보인다.베를리오즈는 이 곡을 이듬해인 1844년 2월 3일에 파리에서 초연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후 그는 연주여행을 가는 곳마다 이 곡을 연주하면서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으니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에서 입은 손실을 완전히 만회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 곡의 성공 요인을 분석해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알기 쉬운 제목이 큰 몫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당시 로마 카니발이 유럽에서 아주 유명했으니, 사실 일반 청중에게는 ‘벤베누토 첼리니’보다는 ‘로마의 카니발’이란 제목이 훨씬 더 잘 와닿을 뿐 아니라 호기심을 훨씬 더 많이 유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부담 없이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길이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곡을 듣는 동안 졸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