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산엔지니어링은 문화예술 후원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이다. 2015년부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하는 ‘문화예술후원 우수기관’으로 인증받고 있고, 올해만 해도 세종문화회관과 함께하는 세종 꿈나무 오케스트라 활성화 사업, 경남문화예술진흥원과 함께하는 사천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종로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어린이병원 힐링플레이 등을 진행 중이다. 감리설계·플랜트 전문기업이 메세나 활동에 발 벗고 나서는 이유는 뭘까. 김희근(73) 회장의 특별한 예술사랑 때문이다.
“왜 이런 현대미술 작품들을 사냐고요? 인상파 그림을 사면 좋겠지만 너무 비싸잖아요.”그럴싸한 현대미술론을 펼칠 법도 한데, 대답이 심플하다. 1000점 가까운 김 회장의 개인 컬렉션으로 꾸며진 벽산엔지니어링 사옥은 감리설계·플랜트 전문기업이라는 딱딱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층마다 복도에 마련된 ‘열린도서관’엔 예술 관련 서적이 빼곡하다. 임직원들은 반강제적으로 문화예술에 파묻혀 일하고 있는 셈이다. 디스플레이된 미술품들이 1년에 몇 차례 교체된다고 하니, 임직원들은 굳이 따로 미술관에 가서 문화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이번에 KIAF에서도 몇 점 샀어요. 크레그 마틴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이 나왔길래 냉큼 샀죠. 트레이시 아민이나 데미언 허스트의 스승이었던 굉장히 훌륭한 작가거든요. 그동안 너무 비싸서 못 샀는데, 이번에 판화가 나왔더군요. 근데 판화도 비싸더라고.(웃음) 컬렉션을 위해 컬렉션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저 좋아서 해요. 여기 루이즈 부르주아 작품도 있지만, 이 사람의 작품세계를 분석적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작가를 좋아합니다. 항상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일하는데, 누구의 어떤 작품을 누가 연주했다를 따지지 않아요. 그냥 들어서 좋으니까 듣는 거죠.”개인 컬렉션을 수장고에 고이 모셔두지 않고 아낌없이 공개하는 데도 이유가 있다. 10월 23일부터 세종문화회관이 야심 차게 기획한 ‘세종 컬렉터 스토리 전’의 첫 주자로 나선 것도 비슷한 이유다. 웬만한 컬렉터들이 ‘컬렉션을 위한 컬렉션’을 하면서 외부에 소장품 공개를 꺼리는 것과 정반대다. “제가 벽산건설 대표를 오래했잖아요. 지금도 무슨 사건사고가 났다 하면 대개 건설사에서 터지는데, 이런 험한 산업에 몸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삶이 강퍅해지더군요. 직원들은 저보다 더 강퍅하고 혜택도 못 받는 사람들이잖아요. 작품을 사서 쌓아 놓으면 뭐하나요. 누가 보아줄 때 생명이 있는 건데. 직원들이 다들 좋아해요. 근데 최고로 예쁜 여배우와 결혼해도 얼마 못 살고 금방 이혼하잖아요. 좋은 그림을 사다놓는다고 자기 것이 되는 건 아니더군요. 매사에 자기주장과 철학을 갖고 있어야 진짜 좋은 것을 내것으로 소유할 수 있겠다 싶어요.”보랏빛 보타이를 예쁘고 매고 미술관을 안내하는 도슨트처럼 작품 하나하나를 소개하며 각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는 김희근 회장은 우리 문화예술계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다. 제22회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 2011년 메세나대상 메세나 인상 등을 수상했고,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나무포럼 회장, 세종솔로이스츠 이사장,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 KIAF 조직위원 등을 겸하고 있다.그러다 보니 본업은 뒷전이고 공연, 전시는 물론 문화예술 관련 회의에 가느라 더 바쁘다. 스스로 “일과의 80%를 무료 봉사에 쓴다”고 했고, 한 직원의 표현을 빌리면 “문화예술에 미쳐 계신 분”이다. 회사 창립 40주년을 맞은 지난주에도 KIAF 조직위원으로서 행사를 치르고, 서울시향 공연에도 얼굴을 내미느라 분주했다. 인터뷰를 마치면 예술경영지원센터 회의를 하러 가야 한단다. “지인 중에 미대, 음대 나온 분이 많았어요. 나이 드니까 전시회, 음악회 한다고 도와달래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렇게 됐죠. 무슨 큰 뜻을 품은 건 아니에요.”벽산그룹 창업주 2세로 태어나 혜택받고 살았지만, ‘금수저’ 인생에도 곡절이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주식을 다 뺏기고 그룹에서 쫓겨나 적잖이 방황도 했다. “내가 최대주주였는데 주식을 다 뺏기고 1000억을 잃었어요. 한번 써보지도 못한 재산인데, 내가 망쳤으니까. 쫓겨나 일이 없으니까 처음엔 와인을 많이 마셨어요. 그림은 쳐다봐도 아무것도 안 나오니 화가 나는데, 와인은 예쁜 여자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이라도 있더군요.(웃음) 마침 1997년이 와인이 좋은 해였거든. 그러다 해외사업 등을 다시 일으킬 즈음 바젤 아트페어에서 글로벌 카운설 모임의 회원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나를 뽑아줬어요. 한동안 멀리했던 문화예술에 다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일과의 80%가 무료 봉사”
▎벽산엔지니어링이 경남문화예술진흥원과 함께 진행한 통영 도천동 골목길 활성화사업. 윤이상 기념관 등을 활용한 골목길 활성화로 새로운 문화명소를 조성했다. / 사진:벽산엔지니어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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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근 회장은 거침없고 솔직했다.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공헌에 앞장서고 있으면서도 굳이 의미 부여를 하려 하지 않았다. ‘가진 자’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란 것이다.“100년 전 외국인들이 찍은 서울 사진을 보면 오늘은 정말 개벽된 거예요. 우린 한 번도 부를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양반이라고 자기가 부를 창출한 게 아니니까. 해방 이후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부의 역사가 짧은 거죠. 유학, 사업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해보니 역사 깊은 나라의 부자들은 대화가 달라요. 책 얘기로 시작해 성향을 드러내고, 그와 관계된 공연 얘기를 나누더군요. 그들은 어떻게 그런 습관을 들였을까요. 우리 부자들은 아파트 옮겨 다니면서 돈 벌어 좋은 핸드백 들고 다니지만, 그건 품위와 달라요. 행복과 성공에도 단계가 있죠. 인류가 사냥하고 살 땐 동물에게 공격받지 않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지만, 이제는 누가 인정해줘야 하고, 그다음엔 존경을 받아야 하죠. 아파트로 돈 벌면 자기 계모임에서나 칭찬하지 누가 좋아하겠어요.(웃음)”김희근 회장은 2009년 지극히 사랑했던 아내를 4년 투병 끝에 먼저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인생을 돌아보며 눈을 뜨게 됐다. “집사람이 아플 때 그 사람 희망으로 자서전을 썼는데, 과거를 정리하다 보니 미래가 남더군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까 생각해보니, 대답이 명확했어요. 사람은 다 똑같아요. 가진 걸 다 주고 가야 하죠. 마흔 전에 CEO가 된 사람들의 글로벌 모임이 있는데, 그런 축복받은 사람들에게 선배로서 이런 얘기를 해주고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가는 게 제 미션이라 생각해요.”
‘1%나눔기금’에 전 직원이 후원 동참
▎종로문화재단, 서울대병원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어린이병원 힐링플레이. / 사진:벽산엔지니어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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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장기 불황 여파로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 지원이 제한되면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에서는 기업의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지만 아직 한국 기업들은 문화예술 후원에 관심이 미미하다. 한국메세나협회가 최근 발표한 ‘2018년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현황 조사’에 따르면 2017년 대비 지원 건수와 지원 기업 수가 각각 5.6%, 3.2%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희근 회장의 적극적인 후원 활동이 더욱 소중한 이유다.그는 사별한 부인이 남긴 유산 30억원으로 벽산문화재단을 세웠다. 재벌 일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흔한 기업 문화재단과는 전혀 다르다. 이사회에 가족은 한 명도 없다. 연극 이상열, 미술 김선정, 음악 김순영 등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운영을 맡기고 본인은 재원 마련에만 집중한다.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소외된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심어주고자 전문 클래식 연주 단체가 직접 학교로 찾아가는 ‘넥스트클래식 공연’에도 애착이 크다. “어릴 때 경험이 확실히 오래가거든요. 한 참여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저한테 밥을 사면서 고마워하더군요. 애들이 부모님이나 다른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프라이드를 갖는다면서 지속적으로 와달라고 해요. 자본주의 국가에서 행복을 주는 건 딱 정해져 있어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예술입니다. 남한테 인정도 받고, 자기도 배우는 기쁨이 있잖아요.”그가 전사적인 차원에서 예술후원활동에 나서는 것도 그래서다. 서울대어린이병원 환아들을 위한 어린이병원 힐링플레이, 이태원, 통영, 철원, 사천으로 이어지는 도시재생 프로젝트 등에 전 임직원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월급의 1%를 기부하면 회사가 1%를 내는 매칭펀드 형태다. 그는 이런 식의 사회공헌이 기업에 이익으로 돌아온다고 확신했다.“우리 직원이 1000명인데, 1000명이 하는 것과 혼자 하는 것은 게임이 달라요. 매출 2000억~3000억짜리 회사가 인력을 1000명 쓰는데, 이병철 회장이 말했듯이 보통 사람 데리고 와서 좋은 사람 만든다는 생각으로 고용합니다. 돈 벌어 오는 직원보다 문화소양을 기르는 직원이 예뻐요. ‘문화 마일리지’를 만들어 직원들의 문화활동도 권장하는데, 생각보다 좋아하더군요. 애들도 많이 데려오고. 그런 게 보람이지, 돈 다 갖고 갈 수 없잖아요. 집사람 가는 걸 보며 실감했어요.”메세나계의 큰손으로서 그가 그리는 빅픽처는 결국 ‘예술의 생활화’다. 예술을 사랑하는 좋은 시민을 양성해야 하고, 그것이 곧 건강한 예술 생태계를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정부 지원만 많고 순수하게 예술을 사랑하는 문화가 없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계에 우리나라 같은 데가 없어요. 오케스트라, 오페라, 미술관 전부 다 나랏돈을 쓰잖아요. 국민 세금으로 나라가 생색내는 건데, 절대로 오래갈 수 없어요. 나쁜 겁니다. 몇 년 전 런던에서 윤석화씨가 만든 뮤지컬 ‘톱햇’을 보러 갔는데, 화요일인데 꽉 찼더군요. 이렇게 유명한 거냐 물으니 영국인들은 색다른 뮤지컬이라면 지방에서 돈 모아서 버스 타고 보러 온대요. 그게 예술 사랑이죠. 우린 회사 대표들도 공짜표 없으면 안 가잖아요.”예술 후원 활성화를 위해서는 세제 혜택과 같은 정책 개선도 필요하지만 국민의 ‘펀더멘털’이 먼저라고 했다. 예술은 결국 개인 후원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정부·기업·개인 돈이 다 필요하지만 개인 후원은 경기가 나빠도 흔들리지 않거든요. 개개인의 펀딩이 생색나게 해주고, 기부문화도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는 노력을 해야 해요. 관건은 지속가능성이죠. 뉴욕 현대미술관관장은 18년째 재직하면서 자기 시간의 60%를 해외에 펀딩 받으러 다니더군요. 반면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현대미술관장을 어떻게 외국인이 하느냐면서 금세 잘라버리는 현실이에요. 이런 수준의 문화 인식으로 무슨 후원 정책을 논하겠어요.”교양 있는 ‘굿 시티즌’ 양성도 저절로 되는 건 아니다. “가진 자들이 먼저 모티베이션을 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국민의 ‘펀더멘털’이 강해지도록 모티베이트돼야 해요. 다행히 이번 KIAF에도 김정숙 여사가 와서 그림 4점을 사 가셨는데, 윗사람들이 먼저 해야 동기부여가 되는 거죠. ‘나도 아는 척 좀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돼야지, ‘너 이거 배워’라며 티켓이나 돈을 주는 건 지극히 후진적인 행동이에요. 나라가 건강해지고 사람들이 굿 시티즌이 되도록 펀더멘털에 돈을 써야 합니다. 집 근처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등산로에 쓰레기가 많아요. 내가 줍고 다니니 집에서 장갑과 집게를 사주더군요. 그런 게 문화 아닌가요.”- 유주현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yjjoo@joongang.co.kr·사진 김경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