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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파워리더 | ART & CULTURE] 피아니스트 임주희 

약관의 천재 피아니스트 거장들의 찬사가 이어지다 

러시아 클래식의 거장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발탁한 10세 한국 소녀가 어느새 20세가 됐다. 2020년 아트 & 컬처 부문의 ‘2030 파워리더’로 선정된 임주희는 오는 7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릴 첫 독주회를 앞두고 있다. 천재 소녀 피아니스트에서 내면이 단단한 예술가로 성장하고 있는 임주희를 만났다.

▎임주희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피아노 건반을 건드리듯 다양한 포즈를 선보였다.
지난 1월 11일 오후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열린 선우예권 신년음악회에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오른 임주희는 온몸의 에너지를 손끝에 모아 최적의 타이밍에 터트리길 반복했다. 파워풀하면서도 섬세한 그녀의 테크닉은 시종일관 좌중을 압도했다. 임주희는 선우예권과 함께한 라벨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라 발스’에서 풍부한 감성과 에너지 넘치는 연주로 대중의 머릿속에 이름 석 자를 각인했다. 앙코르 곡으로 연주한 쇼팽의 에튀드 ‘겨울바람’에서는 가볍고 청량한 타법으로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녀는 “공연 일주일 전까지 앙코르 곡을 정하지 못했는데, 5일 전부터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겨울바람이 떠올랐다”면서 “에튀드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다. 특유의 시원한 느낌이 참 좋다. 새해에 부는 시원한 바람처럼 나쁜 일들은 훌훌 날려버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곡을 선택했다”고 웃어 보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 쇼트커트에 청바지 차림으로 커버 촬영장에 나타난 임주희는 카메라 앞에서 소녀와 여인의 얼굴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카메라가 꺼지면 금세 앳된 여대생의 얼굴로 근황 토크, 다이어트, 취미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성 연주자 못지않은 파워풀한 연주를 자랑하는 무대 위 모습과 대조되는 나긋한 말투로 조곤조곤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이번 공연은 그녀에게 굉장히 설렌 무대였다. 동료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데다 평소 좋아하는 선우예권, 최형록 피아니스트와 협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일 리허설은 거의 못 했다.(웃음) 협연자들과 스케줄을 맞추기가 어려워 공연 당일 연주 30분 전에 한 번 맞춰본 게 전부다”라면서도 “사전에 다른 연주자들의 영상을 최대한 많이 보고 상대방의 연주 스타일을 파악하려 노력한다. 그 사람에 대해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갖고 만나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소리를 만들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다”며 베테랑 연주자 못지않은 노하우를 공개했다.

임주희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줄곧 홈스쿨링을 하며 피아니스트로서 커리어를 쌓아왔다. 하루 평균 7시간 정도 연주한다는 그녀는 “연주자들 사이에서는 7시간이면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연습을 너무 많이 하면 오히려 퀄리티가 떨어진다”면서 “양보단 질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피아노, 잠, 운동, 공부 간 밸런스를 잘 맞추려고 노력한다. 계획은 세우되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날그날 컨디션에 맞춰 시간을 배분한다”고 일과를 설명했다.

많은 연주자가 예중, 예고를 거쳐 유학의 길을 걷는 반면, 임주희는 본인만의 속도로 포트폴리오를 완성해가고 있다. 시스템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불안하기보다는 오히려 고정관념 없이 넓은 음악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래 피아니스트들은 연주도 많이 다니고 학교에서 평가받다 보니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나는 좋은 연주라면 무엇이든 많이 듣고 접하려 한다. 훌륭한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을 수 있어야 나 스스로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정명훈 등 세계적인 거장들과 무대를 누빈 그녀는 현재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더 빨리 나가서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지 않았느냐고 묻자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굳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유선생님(유튜브)’을 통해 많은 연주를 듣고 연주자들의 생각까지 접할 수 있다”면서 “지금까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하고 산 것 같다”고 웃으며 답했다.

그녀와 인터뷰하면서 남달리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로 유명한 그녀는 악보도 눈으로 사진을 찍듯 저장하는 방식으로 암기한다.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았다면 일러스트레이터나 패션 디자이너가 됐을 것 같다고. 그녀는 “뭐든 한 번 보면 까먹지 않는 편인데 스케치할 때 사람의 얼굴과 옷이 같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녀가 스마트폰 화면 위에 손가락으로 그린 인물 스케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교해지고 최근에 그린 인물들은 사진에 가까운 완성도를 자랑했다.

남들보다 뛰어난 기억력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이나 경험이 뇌리에 박히지 않도록 그때그때 떨쳐내려 노력하는 모습도 엿보였다. 그녀는 “나쁜 일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울해지면 그런 감정이 나도 모르게 내 음악에 배어들 수 있다”면서 “풍부한 감수성은 연주자의 개성이 될 수도 있지만,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감정을 입히는 제2 창작자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나쁜 감정을 내 연주에 끌고 들어가지 않도록 그때그때 떨쳐버리려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무대 위의 외로움과 책임감을 누구보다 많이 느낀 그녀는 마인드 컨트롤의 귀재가 됐다. 10살이던 2010년 6월 러시아 백야 페스티벌에 초청받았을 때도 당일 무대에 오르기로 했던 피아니스트가 팔을 다쳐 갑작스레 연주를 준비해야 했다. 악보도 없었던 그녀는 현지 도서관에서 악보를 빌려 이틀 만에 무대에 올랐고,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함께 사흘간의 협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 후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이제는 스트레스를 좀 덜 받고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나쁜 감정을 털어버리려 해도 잘 안 될 때는 그림을 그리거나 영화를 보는 등 취미 생활을 하며 사고를 전환한다. 특히 영화를 보면서 세상을 간접경험 하는 걸 좋아한다. 악기는 하루라도 연습을 거르면 손이 굳는 게 느껴지기 때문에 멀리 여행을 가거나 하면 마음이 불편하다고 한다. 영화 속 상황과 캐릭터에 푹 빠져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상상력과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다. 그녀는 “영화는 하나의 레슨이다. 책도 많이 읽지만 이미지로 상상할 수 있는 영화를 더 좋아한다. 배우가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감정을 표현하는지, 만약 내가 같은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자세하게 상상한다. 이렇게 하면 피아노를 통한 감정 표현이 더 풍부해지고 스트레스도 해소된다”고 말했다. 부모님과 자주 조조영화를 보러 간다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쇼]다. 16살에 처음 봤을 땐 상상도 못 한 일들이 현실로 일어날까 봐 무서우면서도 설렜다고.

부모님과 작곡가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곡들은 그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존재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는 베토벤, 쇼팽, 라흐마니노프다. 그녀는 세 명을 꼽은 뒤 “하지만 항상 내가 지금 연주하고 있는 곡을 작곡하신 분께 가장 애정이 간다”고 수줍게 덧붙였다. 또 영화 시나리오와 배우들이나 스스로의 기억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녀는 “기억이 아이디어가 될 때도 있다. 창작을 하거나 어떤 방향감을 설정할 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로서 그녀의 목표는 “작곡가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내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제3자인 청중과 교감하는 것”이다. 그녀는 촬영장에 소중한 추억이 깃든 소품을 가져와달라는 주문에 베토벤 콘체르토 악보를 들고 왔다. “정명훈 선생님과 13살 때 처음 협주한 이후에 지금까지 총 17번을 협주했는데, 베토벤 콘체르토를 가장 많이 연주했다. 특히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다. 여러 모로 의미가 깊은 악보다”라는 설명과 함께.

- 김민수 기자 kim.minsu2@joins.com·사진 김현동 기자

※ 전문가 평가

“랑랑과 키신에 버금가는 재주를 가졌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탁월하다.” -발레리 게르기예프 러시아 지휘자 겸 예술감독.

“임주희가 피아노 건반을 두들길 때마다 작곡가의 청각적 언어가 시각적인 은유로 뒤바뀌곤 한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만의 음악 세계가 있다.” -이상권 더 스트링스 편집장.

“임주희의 천재성이 우리에게 더욱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본인 스스로 천재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샘 목프로덕션 대표.

※ 파워리더 선정 이렇게 했습니다

아트 & 컬처 부문 2030 유망주는 2019년 12월 30일부터 올해 1월 13일까지 약 2주에 걸쳐 심사위원 9명의 도움을 받아 선정했다. 미술과 음악 분야 심사위원은 각 분야에서 명망이 있거나 다양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인물로 구성했다. 각 심사위원이 최대 5명의 유망주를 추천했고, 이 과정을 거쳐 총 33명이 후보자로 올랐다. 이 중 중복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순으로 올해의 유망주를 선정했다.

심사위원 : 금난새 지휘자,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 목프로덕션, 박은주 전시기획자 및 예술가 에이전트, 스톰프뮤직,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지윤 ‘숨’ 프로젝트 대표,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 황석권 월간미술편집장(가나다순)

202002호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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