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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럭셔리 산업의 리더들(14)] 김형신 엘본패션 대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진정한 명품” 

국내 명품 시장을 이끌고 있는 럭셔리 비즈니스 리더를 만났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체사레 파치오티와 캐나다 프리미엄 아우터 브랜드 맥케이지를 전개하고 있는 김형신 엘본패션 대표다. 지난 20년간 국내 명품 시장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활약해온 그와 함께 급변하고 있는 한국 럭셔리 비즈니스의 미래를 진단해봤다.

▎서울 청담동 체사레 파치오티 플래그십 매장에서 만난 김형신 엘본패션 대표.
엘본패션은 지난 2010년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문을 연 복합문화공간 ‘엘본(ELBON)’이 모태다. 패션과 외식을 한 공간에 결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국내 최초로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고귀한’ 혹은 ‘기품’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영단어 ‘노블(NOBLE)’을 거울에 비친 이미지이기도 한 엘본은 ‘럭셔리 시장은 다가가기 힘들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기업 철학에서 출발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내재된 가치를 평범한 일상 속 의식주를 통해 구현하고자 한다.

2018년 각 분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패션과 외식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한 이후 엘본패션은 그동안 수많은 해외 명품 브랜드를 국내 시장에 선보여왔다. 현재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체사레 파치오티와 캐나다 프리미엄 아우터 브랜드 맥케이지로 국내 명품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다양한 해외 브랜드 국내 알린 럭셔리 전문가


▎최근 맥케이지 의상을 착용하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매건 마클 영국 왕자비. / 사진:앨본패션
지난 1월 14일, 서울 청담동에 있는 체사레 파치오티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김형신(44) 대표를 만났다. 지난 20년간 명품업계에서 럭셔리 전문가로 활약해온 김 대표는 “최근 유구한 전통을 가진 명품 브랜드들이 빠르게 변하는 소비 트렌드에 발맞추지 못해 몰락하고, 젊은 소비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신생 브랜드가 새로이 명품 반열에 드는 등 명품 시장의 지각변동이 가속화되고 있다”면서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명품으로 살아남으려면 오랜 역사와 장인정신 못지않게 시대가 원하는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럭셔리 시장의 가장 큰 변화는 명품을 소비하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요즘 명품이나 패션 유통업계에서 유행하는 ‘영 & 리치(YOUNG & RICH)’라는 트렌드 용어가 이를 증명하죠. 제가 처음 명품업계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주요 소비층이 30대 혹은 40~50대였어요. 물론 브랜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확실히 요즘에는 명품 소비 연령 자체가 10~20대로 낮아지고 있는 추세죠. 이는 밀레니얼 세대들이 자신의 재력이나 능력을 과시하는 플렉스(FLEX)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흐름들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는 전통을 고집하는 명품보다는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인터랙티브를 추구하는 명품들이 젊은 고객들에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합니다. 실제로 스위스에 공방을 둔 명품 시계 브랜드가 스마트워치를 내놓고, 루이비통이나 구찌 같은 내로라하는 명품들이 온라인게임 회사와 손잡고 만화 캐릭터와 협업을 하고 있어요. 이처럼 많은 브랜드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젊은 소비층을 잡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또 명품 브랜드들이 적극적으로 온라인 광고와 온라인 판매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소비자들이 명품을 구입할 때 어떤 대접을 받느냐가 무척 중요했죠. 고급스러운 매장의 큰 문을 열고 들어가면 흰 장갑을 착용한 직원이 상품을 하나씩 들고 와서 세심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었으니까요. 요즘처럼 온라인 마켓에서 고가 명품을 구입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죠. 우리가 국내 시장에서 전개하고 있는 체사레 파치오티는 물론 맥케이지 본사도 IT 강국인 한국의 온라인 마켓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아요. 이에 부응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온라인 마켓 강화에 더욱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패션위크 기간 중 진행된 체사레 파치오티 화보. / 사진:앨본패션
중앙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김 대표는 지난 20년간 국내 명품 패션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기획 및 마케팅 전문가다. 2000년 군 전역 후 우연히 국내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됐다. 이후 홍콩과 중국에서 패션 무역회사를 창업한 김 대표는 영업, 생산관리, 재무회계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2009년 한국에 돌아와 엘본에 합류한 김 대표는 전략기획팀장, 사업부장을 거치며 복합문화공간 엘본 론칭을 주도했다. 2018년 엘본패션 대표이사직에 오른 김 대표는 체사레 파치오티와 맥케이지를 한국 시장에 연착륙시키며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건강하고 개방적인 시스템이 명품 성장의 지름길


▎세계적인 톱모델 바바라 팔빈과 함께 진행한 맥케이지 2019 F/W 광고 캠페인. / 사진:앨본패션
지난 3년간 국내 명품 트렌드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혜안으로 브랜드의 외연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김 대표는 “한국 명품 산업의 특징은 크게 공급자 측면과 소비자 측면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급자 측면은 다시 말해 구조적인 부분이에요. 해외와 다른 한국 명품 산업의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유통 구조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해외 명품 시장은 각 리테일러와 백화점들이 상품을 매입하고 중간의 디스트리뷰터는 브랜드 가치를 매니징하면서 각 리테일러들이 잘 팔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구조예요. 반면 한국은 디스트리뷰터가 제품을 매입하고 백화점에 입점해 수수료를 내고 유통하는 형식이라 디스트리뷰터가 재고부터 모든 리스크를 안고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인 거죠. 백화점 시스템 자체가 임대업이다 보니 그들의 리스크는 최소화하면서 패션 유통업체들이 리스크를 전부 부담해야 하는 환경이 고착화된 것이죠. 이는 명품뿐만 아니라 패션 산업의 구조적인 특징이기도 해요. 명품은 물론 패션 산업 자체가 발전하려면 유통 구조의 변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적인 특징으로는 동조 현상을 들 수 있는데요. 대다수 한국 소비자가 남들보다 튀지 않으면서도 명품을 소비한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봐주기를 은근히 기대해요.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제품을 입는지, 내가 이것을 입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런 부분들을 많이 고려하는 거죠. 실제로 맥케이지 매장에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옷은 예쁜데 내 주변에 이거 입은 사람은 못 본 것 같아 구입이 망설여진다’예요. 최근 국내 아우터 시장에서는 롱패딩이 유행이면 롱패딩만 불티나게 팔리고, 쇼트패딩이 유행하면 쇼트패딩만 줄기차게 팔리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한국의 이런 소비 성향이 공급자 입장에서 제품을 바잉하고 판매하기는 편해요. 물론 롱패딩이든 쇼트패딩이든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간파하고 다음 제품을 준비하는 것이 관건이죠.”

엘본패션의 중장기 사업 과제는 현재 운영하고 있는 두 브랜드의 마켓 셰어를 늘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김 대표는 체사레 파치오티 본사와 협의해 럭셔리 슈즈 시장을 넘어 다양한 카테고리로 제품 확장을 기획하고 있으며, 온라인 마켓 확대에도 주력할 계획이다. 또 해외에서 이미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후발주자인 맥케이지를 위해 적극적인 투자도 지속할 계획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글로벌 마케팅 프로젝트를 한국에서 진행할 계획이며, 내년에는 플래그십 매장 오픈은 물론 온라인 마켓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3~4배 이상 높인다는 복안이다. 아울러 아우터웨어 브랜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S/S 시즌 혹은 사계절 운영이 가능한 신규 브랜드 론칭도 고려하고 있으며, 현재 몇몇 브랜드와 협의 중이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체사레 파치오티의 2019 F/W 광고 캠페인. / 사진:앨본패션
“새로운 명품 브랜드들이 속속 생겨나고, SNS의 확산으로 밀레니얼 세대의 플렉스 문화가 지속되면서 국내 명품 시장은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브랜드만이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또 소비 양극화 현상도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는데요. 젊은 소비자들의 소득이 한정적이다 보니 지출에는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비싼 거 하나 사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명품을 사더라도 확실히 어필할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할 것으로 보입니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소비와 확실히 어필할 수 있는 명품 소비. 이렇게 소비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엘본패션을 국내 넘버 3 패션 유통회사로 키우는 것이 목표라는 김 대표는 한국 명품 비즈니스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필수 요소로 ‘건강한 시스템’을 강조했다.

“한국에서 다양한 명품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스템적인 부분들이 건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무가 잘 자라려면 땅과 물, 바람과 햇빛 등 모든 요소가 잘 맞아야 하는 것처럼 명품 브랜드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건강하고 개방적인 시스템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아울러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의 이런 폐쇄적인 유통 구조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온라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리적인 공간과 별개로 움직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채널들을 어떻게 공략하느냐에 따라 브랜드의 성장 가능성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 오승일 기자 osi71@joongang.co.kr·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202002호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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