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진(59)의 사진은 묘하다. 풍경인데, 풍경이 아니다. 눈을 통해 마음 한구석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어떤 감정을 건드린다. 존재하고 있는데 보지 못했던 것을 일깨운다. 그의 사진이 보는 사진이 아니라 느끼는 사진인 이유다. 그가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 전관에서 사진전 ‘VOICE’(1월 15일~3월 5일)를 시작했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정진: 에코-바람으로부터’ 이후 2년 만이다.
▎작업실에 있는 이정진 작가. 그가 한지에 프린트한 흑백사진은 우리의 마음속 한구석을 건드린다. / 사진:노바울 Paul R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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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기반으로 세계를 누비는 이정진은 ‘한지 사진작가’로 유명하다. 한지 위에 굵은 평붓으로 감광유제를 발라 흑백사진을 인화하고 이것을 다시 고화질로 스캔한 뒤 확대하는, 아주 고단한 작업이다. 본인 스스로도 “미친 짓”이라고 말한다.“잉크가 다 튀고, 디지털 프린터의 노즐이 막히고, 아주 난리죠. 그래도 이렇게 가야 해요. 한지를 고집하기 위해 이런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죠. 붓 터치의 흔적이나 한지의 실오라기 느낌까지 내기 위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작업을 병행합니다. 표면에 이미지가 얹혀 있는 것보다 바닥에서 배어 표면으로 드러나는, 한지의 깊이가 보여지는 것이 일반 사진과 다른 지점이죠.”옆에 있던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가 “작품을 보고 목탄으로 했느냐, 만져보고 싶다 하는 분이 많은 것도 그만큼 깊은 질감을 잘 살려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이번 전시에는 최신 시리즈인 ‘Voice’(2018~2019)와 ‘Opening’(2015~2016) 연작 중 25점이 나왔다. ‘Voice’는 한지 프린트가 아니지만, 은은한 번짐효과 때문에 한지에 그린 수묵화의 느낌이 물씬 난다. 어릴 적 붓글씨를 배우고 동양화를 공부한 작가는 “그런 느낌은 제게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Voice 08 (1/7+3AP), 2019, Archival Pigment Print(Inkjet print), 108.5×153㎝(paper size) / 사진:PKM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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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미국 중남부의 뉴멕시코, 네바다, 애리조나의 사막을 다니며 그곳의 풍광을 찍었다. 그런데 “촬영하러 사막에 가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사막을 느끼기 위해서죠. 사진은 거기 따라오는 결과물이고요. 인간 밑바닥에 있는 보편적 감정을 찍는다고 할까. 관람객이 제 작품 앞에서 느끼는 것은 제가 느낀 사막이 아니라 관람객 자신의 감성으로 느끼는 사막입니다. 대상을 설명하는 사진이 아니죠. 멋진 곳을 찍어내는 사진도 아니고요. 제 자신을 투영해 온 몸으로 느끼는, 나를 설명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입니다.”박 대표는 “자연에 대한 작가의 응시는 명상적이고 회화적이며 시간의 개념을 초월한 영원성을 담고 있다”며 “이정진의 풍경을 바라보다 나 자신의 영혼을 목도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의 ‘시’를 작품 설명으로 삼게 된 이유도 흥미롭다. “전시에 대한 글을 써줄 필자를 누구로 할까 고민이 많았어요. 비평가로 할까, 작가로 할까… 몇 분에게 글도 받아보았지만 맘에 드는 게 없었죠. 그런데 류시화 시인의 잠언집을 읽다가 부분 인용한 ‘시’의 전문을 찾아 보고 정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어요. 내 작품을 보고 쓴 듯, 내 마음을 읽고 쓴 듯, 더 보태고 뺄 게 없었죠. 정말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는 ‘그것이 나를 건드렸’고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시구 부분 인용).”
울릉도 심마니 할아버지 사진집으로 대번에 주목
▎Voice 01 (Ed. 1/3+2AP), 2019, 상동, 152.5×213.3㎝(paper size) / 사진:PKM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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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했는데, 어떻게 사진을 하게 된 겁니까.1학년 때 사진 동아리에 들었는데, 2학년 때 ‘난 사진으로 간다’라는 느낌이 왔어요. 그래서 집에 암실도 차려놓고 혼자 공부하며 작업을 했죠. 중앙대 사진학과로 편입할까 하다가 그냥 부전공이다 생각하고 흙을 만져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세라믹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적인 작업이라 제겐 안 맞더라고요.
▎Opening 21 (2/10+3AP), 2016, Archival pigment print on Korean Mulberry paper, 145.5×76.5㎝(paper size) / 사진:PKM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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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뿌리깊은 나무’에 사진기자로 들어갔던데.제 인생에서 유일한 직장이었죠. 한창기 대표님을 비롯해 이상철 디자이너, 강운구 사진부장 같은 쟁쟁한 분들을 모시고 다큐 사진과 잡지 사진은 물론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참 많이 배웠어요. 1년 동안은 월급 받고 일했고 1년 반은 프리랜서로서 일했죠.
왜 그만두었나요.내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똑같은 카메라인데, 용도가 너무 다른 거예요.
첫 작품은 어떤 것이었나요.울릉도 심마니 할아버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친구들과 울릉도에 놀러갔다가 폭설에 길을 잃었는데, 가까스로 찾은 인가가 바로 그곳이었어요. 항구로 내려와 배를 기다리는데, 자꾸 할아버지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은 놔두고 혼자 다시 찾아갔죠.
잘 대해주셨나봐요.아이고, 눈길도 안 주셨어요. 부정 탄다고. 그래서 처음엔 할머니랑 이야기만 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할아버지를 쫓아 길을 나섰는데, 날다람쥐같이 날쌘 분이라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도 악착같이 따라갔어요. 그때는 이십 대 중반의 팔팔한 청춘이었으니까. 그렇게 1년 동안 몇 번을 찾아갔죠. 포항에서 배로 8시간 걸리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경험 덕분에 사막도 막 다닐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작품을 완성했나요.찍은 사진을 갖고 가서 보여드리니 표정이 좀 풀어지시더라고요. 아들딸도 10년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던 곳을 생면부지의 처녀가, 그것도 카메라를 들고 걸핏하면 찾아오니 대견하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 그렇게 산삼 할아버지의 삶을 찍어 낸 책이 열화당에서 출간한 『먼 섬, 외딴집』(1988)입니다.
첫 작품에 대한 느낌은 무엇이었나요.작품의 기획의도는 ‘어떻게 인간이 자연 속에서 부분으로서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다양한 모습을 찍었는데, 막상 인화된 것을 보니 내가 본 할아버지의 얼굴이 아니었어요. 이정진의 다른 얼굴이 있을 뿐. 그래서 ‘내가 보고 싶은 얼굴만 보는구나, 사진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죠. 그리고 에디팅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절감했어요.
에디팅이라면.사진은 에디팅이 중요합니다. 프레임을 어떻게 자르느냐, 즉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관건이죠. 당시 강운구 선생님이 제 모든 작업을 도와주셨는데, 그래서 그때는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선생님의 흔적이 너무 많이 보이는 거예요. 또 작품이란 한 장의 사진으로 존재하기보다 하나의 시퀀스, 하나의 책, 하나의 프로젝트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나중에 첫 책을 다시 내면, 제 나름의 시각으로 다시 에디팅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어요.
출간 이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는데.그냥 놀러갔죠. 그런데 다른 곳은 다 별로였는데, 뉴욕이 너무 좋은 거예요. 게다가 스위스 출신의 거장 로버트 프랭크가 제 책을 보고 ‘니 마음을 읽었다’고 연락을 주었고, 책 한 권 덕분에 뉴욕대 대학원 사진학과에도 입학하게 됐죠.
사진을 어떤 프레임에 담아내느냐, 에디팅 작업이 관건
▎현장에서 작업하는 이정진 작가. / 사진:노바울 Paul R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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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참 모를 일이다. 그렇게 시작된 미국 사진계 인사들과의 인연은 2010년 프랑스 사진가 프레데릭 브레너가 기획한 이스라엘 프로젝트 ‘This Place’에 토마스 스트루스, 스티븐 쇼, 제프월 같은 거장 12명 사이에 유일한 아시아 작가로 이름을 올려놓게 했다. 이 전시는 2014년 이후 세계 유수 미술관 순회전을 거쳐 현재 베를린 주이시(Jewish) 뮤지엄에서 진행되고 있다.육아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 작업에 ‘정진’한 작가는 2016년 스위스 빈터투어 사진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휘트니미술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호주 국립미술관, 파리 국립현대미술기금 등에 소장돼 있다.이정진의 작품 시리즈는 하나의 책이 나와야 비로소 완결된다. 포토 아트북이다. 영국 맥(Mack) 출판사에서 내놓은 『Unnamed Road』(2014)를 비롯해 나즈렐리(Nazraeli)의 『Everglades』(2016)와 『Opening』(2017), 래디우스(Radius)의 『Desert』(2017) 등은 모두 예술성 면에서 명성이 높다. “보통 2년마다 새 프로젝트를 합니다. 시리즈 끝내고 나서 포토 아트북을 출간하는데, 2000부 한정판으로 찍죠. 『Voice』도 래디우스에서 올봄에 출간될 예정입니다.”향후 새로운 시리즈에 대한 계획을 물었다. “앞으로 풍경은 당분간 하지 않으려고요.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거든요. 이제 좀 비워내려고 합니다. 때가 되면 그 빈자리에 또 뭔가가 들어오겠죠.”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