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는 어육 소시지 ‘천하장사’를 만든 진주햄이 하마터면 없어질 뻔했다. IMF 외환위기를 비롯한 금융위기 탓이다. 이에 금융인·컨설턴트 꿈꿨던 박정진, 박경진 형제는 숱한 위기를 겪으며 진주햄 재건에 나섰고, 이젠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금융인과 컨설턴트로 일했던 경영 2세가 가업 살리기에 나섰다. IMF 외환위기에 휘청였던 ‘천하장사’의 진주햄도 이젠 글로벌 도약을 꿈꾸고 있다. 사진은 진주햄을 다시 일으킨 박정진 사장(왼쪽)과 박경진 부사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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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줄이 비엔나, 천하장사 소시지, 경복궁 수제맥주, 샐러디….’진주햄의 작품이다. 엄밀히 말하면 경복궁은 진주햄이 인수한 수제맥주 기업 카브루(KABREW) 대표 제품이고, 국내 1위 샐러드 전문점 샐러디는 초기부터 진주햄이 성장을 도운 곳이다. 진주햄은 1963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육가공 기업으로 60년 가까이 관련 업계 대표 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근엔 신제품 개발, 해외시장 개척, 사업 다각화 전략 등 ‘3대 축’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성장축은 하나씩 성과로 이어졌다. 지난 2017년 진주햄은 기업 이미지(CI)를 바꾸고 프리미엄 소시지 브랜드 ‘육공방’을 출시했다. 이 밖에 신제품을 매해 최대 80여 개를 내놨다. 2008년부터는 해외시장 진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현재 중국·캐나다·베트남·미국·대만·홍콩 등에 진출해 있고, 중국에선 ‘대력천장(大力天將)’이라 불리는 천하장사 소시지가 건강한 먹거리로 자리매김했다. 베트남 최대 식품 기업 마산그룹과도 조인트벤처 ‘마산 진주JSC’를 차리고 베트남 육가공 시장에도 뛰어들었다.특히 인수합병(M&A)은 사업 다각화의 주요 전략이다. 진주햄은 2015년 수제맥주 기업 카브루를 인수했고, 수제 캔맥주 ‘경복궁 에일’ 등이 편의점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샐러디는 진주햄이 창업 초기부터 멘토 역할을 자처하다 지분까지 갖게 된 경우다. 진주햄이 수십 년간 쌓아온 식품 기업 노하우를 스타트업인 샐러디에 전수했고, 3개였던 매장은 70여 개로 늘어났다.이 뒤엔 박정진(45) 진주햄 사장과 박경진(40) 진주햄 부사장의 노력이 있었다. 형제는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은 경영 2세다. 한진해운·현대상선과 함께 3대 국내 해운업체로 꼽히던 조양상선그룹 창업자 고(故) 박남규 회장의 셋째 아들인 고(故) 박재복 회장이 1985년 진주햄을 인수하면서부터 경영해왔다. 이후 2006년 동생이 먼저 합류했고, 2013년엔 형이 진주햄 경영에 나섰다.부침도 많았다. 진주햄도 IMF 외환위기,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혹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같은 위기를 피해 갈 순 없었다. 다른 길을 걷던 형제가 아버지 회사에 들어온 계기도 바로 그런 ‘위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사실 한국 제조업이 겪는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최저임금 상승, 주 52시간 근무제 등으로 제조업은 원가 경쟁력 확보에 비상이 걸렸고, 올 초부터 불거진 코로나19 사태로 소비도 예년보다 많이 줄었다. 지난 2월 13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진주햄 서울사무소에서 만난 형제 경영자도 “과도한 성장보다 ‘차분한 내실’을 다지겠다”고 말했다. 그간의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올 초부터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이와 더불어 최근 제조업 상황이 썩 좋지 못하다고 들었다.박정진 진주햄 사장(이하 박 사장): 그렇다. 중국 매출이 꽤 크게 성장 중이었는데 바이러스 사태로 잠시 소비가 중단됐다. 아예 물류 자체가 돌지 않는다. 중국에 수출하는 대부분 한국 기업이 겪을 상황이라 짐작된다. 국내 시장도 쉽진 않다. 천하장사 소시지만 해도 주요 판매처인 편의점 유통망에서 59%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1위를 달리고 있지만, CJ제일제당·롯데푸드·대상 같은 대기업도 뛰어드는 치열한 시장이다. 매출 1000억원대로 올라선 것도 2014년부터다. 중견기업 입장에서 신규 사업과 해외 진출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매출 반토막, 대량 감원했던 진주햄합류한 것도 ‘위기’ 때문 아니었나.박경진 진주햄 부사장(이하 박 부사장): 내 나이 26세, 2006년에 진주햄에 들어갔다. 당시 매출은 500억원대로 반토막 나 있었고, 형한테 ‘직원들 월급 줄 돈이 없다’고 고민을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대기업이 본격적으로 육가공 시장에 뛰어든 때였다. 아버지는 내가 입사하자마자 모든 결재를 맡겼다. 지금 생각해도 참 힘든 시기였다. 전국에 있던 물류창고를 줄여 물류전문기업에 위탁했고, 양산과 논산 공장에 있던 중복 생산설비도 옮겼다. 직원 수도 300명 넘게 줄였다.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2013년엔 형도 진주햄에 합류했다. 잘나가던 씨티그룹 상무 자리도 내려놨다고 들었다.박 사장: 사실 금융업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진주햄에 합류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아버지가 말렸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조양상선그룹이 공중분해되고 진주햄만 살아남았던 기억 탓이다. 그래서인지 더 큰 시장을 경험하길 원하셨다. 동생이 ‘월급 줄 돈이 없다’고 했을 때도 사표를 내려 했지만 동생이 막았다. ‘만일을 위해서라도 형은 밖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만큼 어려웠고, 동생보다 7년 늦게 경영에 나섰다.
형제간 우애가 두텁다고 소문났다.박 부사장: 실제 그렇다.(웃음) 뻔한 얘기지만, ‘위기’를 직간접적으로 함께 겪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생존과 성장이란 공통된 목표를 공유했고, 서로 더 잘하는 일을 맡아 무조건 뛰었다. 누가 사장이고 누가 부사장이니 하는 ‘옥상옥’ 문제는 애초에 우리에겐 의미가 없었다. 명확하게 역할을 나눈 적도 없지만, 누가 뭐라 하기 전에 서로의 특기를 회사 성장에 투영하는 것 같다.
금융업(형), 컨설팅업계(동생)에서 일했다. 제조업을 해보니 어떻던가.박 사장: 씨티그룹에서 글로벌마켓증권 기업투자 부문을 맡았고, 공대를 졸업 후 미국 로체스터대학 MBA도 마쳐 나름대로 제조업은 잘 안다고 생각했다. 동생도 효성데이터시스템 신사업기획팀에 있었고, 네모파트너즈 컨설턴트로 활약했기에 경영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제조업에 뛰어드니 부가가치가 높지 않았고, 생산공정부터 고려해야 할 변수가 한둘이 아녔다. 진주햄은 특히 B2C 기업이다 보니 시장 트렌드의 밑단부터 거대한 흐름을 조금이라도 놓치면 매출이 줄었다. 금융업과 제조업, 두 업종의 난이도를 따지면 제조업이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박 부사장: 100% 공감한다.(웃음) 한국에서 제조업을 꾸려가는 모든 분께 경의를 표한다. 막연히 기업 경영환경이 어렵다는 말로는 다 표현 못 한다. 컨설턴트로 일할 땐 주어진 일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면 됐지만, 이제 도전하는 몫이 기업 생존의 성패를 가른다. 햄 소시지 분야 시장 1위란 빛 좋은 타이틀 뒤엔 육가공 생산·유통·수출까지 커버하는 수십 년의 업력이 떠받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업의 철학은 그 업력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에서 출발한다.
업력의 가치를 지키려 한 노력은 무엇인가.박 부사장: 기본에 충실했다. 진주햄 제품은 어릴 때부터 우리 형제도 많이 먹던 음식이다. 사업을 하기 전에 사람이 먹는 음식을 판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있다. 흔히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든다’고 얘기하지 않나. 식품기업이 이를 잊으면 끝이라 생각한다. 2017년엔 천하장사 패키지를 바꿨고, 공법을 개량해 치즈를 가운데 심은 신제품도 내놨다.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하려고 ‘육공방’도 출시했다. 비가열 생소시지로, 초고압공법을 적용해 신선육의 맛과 품질을 높이고, 유통기한까지 늘린 신제품이다. 이런 공법 기술 개량을 바탕으로 참치, 만두, 육포 등 300여 개가 넘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해외시장 진출도 성공적이라고 들었다.박 사장: 내가 회사에 합류하기 전인 2008년부터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현재 중국을 비롯해 미국, 캐나다, 호주, 홍콩, 동남아시아 등 1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천하장사는 ‘대력천장(大力天將)’이란 이름으로 중국에 수출하고 있는데 지난해까지 계속 성장세였다. 2009년 첫 매출 3000만원에서 시작해 10년 만인 지난해엔 130억원, 지금까지 누적 매출 520억원을 달성했다. 중국에서 유아 소시지 시장에서 영양 간식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고, 그때 어린이들이 20대가 되면서 매출이 더 늘었다. 바이러스 사태만 잦아들면 중국에서 주문이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엔 제품 수출뿐만 아니라 공장도 세웠다.박 사장: 그렇다. 동남아 지역 시장이 생각보다 육가공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끓이고 굽는 정도지 가공해서 유통하는 일이 드물다. 사실 베트남 시장만 해도 최대 식품기업 마산그룹과 조인트벤처를 차릴 생각은 없었다. 시가총액 4조원짜리 베트남 대기업이 생산·유통까지 다 맡아서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생산공정 노하우가 부족했다. 특히 2016년 마산그룹이 베트남 육가공 시장 1위인 ‘비산(Vissan)’을 인수하고, 2015년 육가공 기업 사이공 뉴트리푸드를 인수하면서 우리와 협력이 더 긴밀해졌다. 생산관리 능력이나 신제품 개발 노하우는 진주햄이 훨씬 앞섰다. 지금까지 공장 건설과 설비투자에 들어간 자금은 150억원, 이중에서 진주햄이 40억원을 직접 투자했다. 합작사에선 우리가 기술력을, 마산그룹은 막강한 유통력을 보탤 예정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AWS 행사에서 본 수제맥주 카브루 사례도 인상적이었다.박 사장: 2015년 인수한 카브루는 국내 최초 수제맥주 기업이다. GS25 편의점에서 한 번쯤 접해봤을 ‘경복궁 에일’이 바로 카브루의 작품이다. 현재 30가지 맥주를 생산하고 200여 개 레시피로 언제든 20여 가지 맥주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제2 브루어리 공장까지 완공돼 생산량도 연간 2000톤이 넘는다. 주류업계 최초로 식약처에서 ‘해썹(HACCP)’ 인증도 받았다. 식품기업을 운영하면서 그만큼 위생과 체계적인 관리가 중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에 두말 않고 추진했다.
박 부사장: 원래 카브루를 인수하려던 건 아니었다. 육가공과 좀 더 연관성이 있는 냉동 가정간편식(HMR) 업체를 인수하려고 했다. 상당히 진척됐으나 막판에 엎어졌다. 꽤 공을 들였던 터라 아주 아쉬웠다. 그래도 우연한 기회에 카브루를 알게 됐고, 신사업 방향을 빨리 바꿔 진행하는 게 성장하는 길이라 믿었다.
AWS 클라우드 시스템을 활용하겠다고 했다.박 사장: 미국 라스베이거스 AWS 리인벤트 2019 행사에 참여한 이유였다. 효모가 살아 있어 변질 우려가 있는 수제맥주는 생산·물류·유통 전 단계에 걸쳐 품질관리가 매우 중요한데, 주류산업 유통구조가 복잡하고 이해관계자가 많다 보니 종종 품질사고가 발생한다. 단계별 유통과정을 최적화하려고 아마존 매니지드 블록체인과 컨테이너 서비스를 테스트 중이다. 수제맥주 분야뿐이 아니다. 이미 육가공 공장은 스마트공장 사업을 진행했고,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사업도 검토 중이다. 미래식품 제조업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푸드테크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샐러디도 요새 잘나간다.박 부사장: 창업에 관심이 많다. 이쪽 사람들과 연락이 잦다 보니 샐러디를 알게 됐다. 생각보다 푸드테크 스타트업이 꽤 많았다. 하지만 대다수 스타트업이 생산이나 유통 과정에 문제를 겪는다. 샐러디도 똑같은 고민을 했는데, 이때 경영진에 노하우를 전해주다 주주가 돼버렸다.(웃음) 이보다 앞서 컨비니언스란 신생 커머스 기업도 차렸다. 자체 브랜드인 ‘바른생각’이란 콘돔 브랜드가 이곳에서 나왔다. 이곳도 벤처캐피털에서 자금을 조달해 성장하고 있고, 샐러디도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유치했다. 한층 더 복잡해진 세상, 시야가 좁아선 안 되겠단 생각으로 벌린 일이다. 스타트업을 만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형제의 노력 덕분에 진주햄은 생존을 넘어 새로운 성장을 그리고 있다. 매출도 2006년 500억원대에서 2014년 1000억원 대를 회복했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 가득한 건 아니다. 박정진 사장은 “최근 제조업 전반이 겪는 어려움이 쉽사리 가실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박경진 부사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철저한 품질관리와 위생 관리로 내실을 다지며 다각도로 사업 간 시너지를 키우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위기는 그렇게 형제를 진주햄으로 불러들였고, 생존과 성장을 꾀하는 동력이 됐다. 수년째 같이 일하다 보니 형과 동생의 역할도 자연스레 나뉜다. 형은 해외시장 진출과 사업 확장, 위기관리에 주력하고, 동생은 상품 생산·유통과 현장 중심의 실무, 열린 시각으로 시장을 보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위기의식을 강조한 박정진 사장은 한마디 덧붙였다.“저는 지난 7년, 동생은 10년 넘게 위기 극복에 매달려왔습니다. 경쟁은 나날이 심해졌고,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냈죠. 정말 망할까 봐 겁도 났습니다. 경영이 단순히 계산기를 두들기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죠. 최근 인수·합병하며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지만, 무리해서 기업을 인수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우리 같은 중견 기업은 틈새시장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만한 기업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이원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