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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16) 숯의 작가 이배 

현대 예술가의 덕목?, ‘애티튜드’와 ‘프로세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 hyung@joongang.co.kr·사진 김경빈 기자·조현화랑·갤러리2
누군가에겐 간장을 담글 때 쓰는 재료로, 누군가에겐 쇠고기를 맛있게 굽는 용도로, 그리고 누군가에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어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작가 이배(64)는 ‘숯의 작가’다. 숯이 갖는 물성을 갈고닦고 매만져,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더한 뒤 눈앞에 펼쳐놓는다. 프랑스로 훌쩍 떠나 어언 30년간 숯으로 다져온 예술혼이다. 서울·부산·제주의 갤러리 4곳에서 4월 16일 동시에 시작된 전시회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잘라낸 숯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고 표면을 갈아낸 ‘이수 뒤 푸’ 시리즈 앞에 서 있는 이배 작가. 이 작품에서는 흰색 오일 파스텔로 선을 그려 운동감을 강조했다. / 사진:조현화랑·갤러리2
부산의 조현화랑은 달맞이점과 해운대점에서 6월 21일까지, 갤러리2는 서울 평창동과 제주 중선농원에서 각각 5월 23일과 7월 11일까지 전시를 진행한다. 작가의 대표작을 종류별로 망라해 총 30점이 나왔다.

서울 평창동에 있는 갤러리2를 찾았다. 마당 잔디가 비를 맞아 폭신해진 5월 어느 날이었다. 이배 작가와 함께 천천히 전시장을 돌았다.

이 숯은 다 어디서 구합니까.

고향인 경북 청도에 숯가마가 있어요. 인근에서 소나무를 구해 키가 120㎝ 정도 되도록 잘라 끈으로 꽁꽁 묶은 뒤 이글루처럼 생긴 가마에 세로로 빽빽하게 집어넣지요.

왜 끈으로 묶나요.

그래야 형태가 유지되거든요.

얼마나 굽나요.

2주간 굽고 2주간 식힙니다. 소나무 가지로 불쏘시개를 만들어 토막 위에 놓고 불을 붙이면 아래로 타들어 가죠. 천천히 오래 구울수록 광택이 좋아져요. 한 달 정도 지나야 숯이 가진 본성이 나오죠.

이 작품은 숯 표면의 무늬가 제각각이네요. 쇠고기 마블링 같습니다.

1991년부터 작업해온 ‘이수 뒤 푸(Issu du Feu·불에서)’ 시리즈입니다. 숯을 잘라 캔버스에 붙이고 표면을 갈아 완성하죠. 보시다시피 이 검정이 다 같은 검정이 아닙니다. 가지·뿌리·기둥처럼 부위에 따라, 또 결에 따라 색이 달라져요.

작품이 두툼하네요. 무게도 상당하겠어요.

전체 두께가 6㎝ 정도, 숯은 3.5㎝ 정도 됩니다. 무게도 50kg 정도 나가죠.

이 작품은 코팅을 한 것 같네요.

‘아크릴릭 미디엄(Acrylic medium)’ 시리즈인데, 목탄에서 추출한 검은 안료로 형상을 그리고 밀랍을 바른 뒤 다시 붓질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 부호 같은 형상은 무엇을 표현한 것입니까.

나도 모르게 내 속에 기억된, 머리가 아니라 몸에 기억된 것을 끄집어내려는 시도입니다. 화실에 가면 30~40장을 계속 그린 뒤, 뭘 그렸는지 살펴봅니다. 내가 그려놓은 것에서 내가 누군지 찾아내려는 것이죠.

이 작품은 테트리스 게임의 조각처럼 보이는데요.

숯가루를 짓이겨 화면에 두껍게 붙이는 ‘풍경(Landscape)’ 시리즈는 농부가 밭을 갈아 골을 내듯, 캔버스라는 대지(大地) 위에 자연에서 온 숯으로 고랑을 낸 것입니다. 농촌 출신의 내면을 표현했다고 할까요.

필획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 작품이 이번에 새로 선보이는 ‘드로잉(Drawing)’ 시리즈군요.

네. 이전까지의 작업이 숯이라는 재료의 물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작품은 서예에 가까운 노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붓의 획으로 구성한 현대미술이지요.

서예라는 방식을 차용한 이유는.

서양 사람들은 아시아 미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아요. ‘기운생동’이나 ‘여백’ 같은 말이 서양미술사전에는 없거든요. 하지만 아시아의 오래된 예술에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서예도 그중 하나입니다. 지난해 LA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린 한국 서예전 [선을 넘어서]를 가보니 현지인들 관심이 대단했어요. 추사나 퇴계의 글씨가 한국에서는 서예지만 미국에서는 일종의 현대미술이거든요. 숯가루를 물에 개어 붓질하는 제 작업도 결국 필획의 구성을 강조하는 서예로부터 온 셈이니까요.

“숯은 모든 물질의 마지막 모습이다”


▎1. 전시장에 설치된 ‘이수 뒤 푸’. / 2. 이번에 새로 내놓은 ‘드로잉’. / 3. 목탄 안료 위에 밀랍을 덧씌운 ‘아크릴릭 미디엄’. / 4. 설치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이배 작가. / 사진:조현화랑·갤러리2
부친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전형적인 농부였다. 오 형제 중 장남이 가업을 잇길 바랐던 아버지는 학교에 가 있는 아들을 불러 과수원 사과나무 전지작업을 시키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새로 온 미술 선생님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제 스케치북 그림을 뜯어 가시더라고요. 얼마 뒤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교장 선생님이 조회 때 상을 주시더라고요. 그 뒤로 상을 몇 번 더 받았죠.”

미술 특기생으로 장학금을 받고 고교(대구 영신고)에 진학하자 부친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미대(홍익대)에 진학하고 중학교에서 미술 선생님으로도 근무했지만, 그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마침 올림픽이 끝나고 사회 분위기도 자유로워졌다.

당초 미국을 염두에 두고 뉴욕과 LA에서 잠시 지내보았지만, 그의 선택은 프랑스였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거대한 머신’ 같았어요. 그 속에 들어가면 미국식 제품이 될 수밖에 없는. 반면 프랑스는 훨씬 개인적이고 자기주장도 강하더라고요.”

1989년 9월 프랑스에 도착한 뒤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뭘로 나를 설명할 것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왜 작업을 하는지, 자신의 정체성과 작품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상황. 재료 살 돈도 별로 없던 그의 눈에 띈 것은 바비큐용 숯이었다.

파리 근처의 비어 있는 담배공장을 작업실 삼아 숯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온 젊고 가난한 아티스트들이 서로 재주를 뽐내던 공간이었다. 어느 날 신문기자가 이곳으로 취재를 하러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엉터리 프랑스어로 예상 질문과 답변을 만들었죠. ‘숯은 모든 물질의 마지막 모습이다’ 같은. 알고 보니 그는 백남준 선생님과도 친분이 돈독했어요.”

1992년 그의 얘기가 리베라시옹에 실렸다. 기자는 고맙게도 화랑에 소개까지 해주었고, 그곳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에서 작품도 팔 수 있었다. 이제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작가와 여전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앙리 프랑수아 드바이유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제가 30년간 여기 있으면서 외국인으로서 받은 혜택이 참 많아요. 차별이나 열등감 주는 일도 별로 없었고. 지성이나 이성이란 것이 있는, 열린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도 열려 있어야 했죠.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내게 다가오지 않더라고요. 자기를 열고, 자기를 벗고, 껍질을 계속 벗어가며 살아온 것 같아요.”

그렇게 섞이려고 애쓰며 작품에 매진해온 작가를 국립현대미술관은 ‘2000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고, 프랑스 정부는 2018년 문화예술훈장 기사장을 수여했다.

‘애티튜드’가 분명해야 ‘프로세스’ 생겨


▎신작 ‘드로잉’ 앞에 서 있는 이배 작가. / 사진:조현화랑·갤러리2
숯이라는 재료를 써보니 어떤가요.

숯은 자연이라는 카오스의 세계에서 왔죠. 사람은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좋은 농부는 땅의 말을 잘 듣는다”는 말처럼, 저는 숯이 무조건 좋다는 게 아니라 숯과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까 고민합니다. 그것이 예술가의 길 아닐까요.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입니까.

참 막연한 일인 것 같아요. 뭔가 좀 더 높은 생각을 꿈꾸고, 생각을 멀리 보내는.

그럼 예술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옛날에는 에스프리(esprit·정신성)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재능도 뛰어나고. 하지만 현대에서는 그것보다 애티튜드(attitude·자세)와 프로세스(process)가 있어야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애티튜드라 하면.

가장 중요한 덕목인데, 이를테면 매일 동일한 시간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술가는 아파서도 안 돼요. 애티튜드가 분명하면 프로세스가 생깁니다. 올해 이런 거 했으니 내년엔 이거 해야지 하는. 논리가 생기고 철학도 생기죠.

애티튜드는 모든 사람에게 있지 않나요.

그렇죠. 각자 다른 애티튜드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아니에요. 다만 그 애티튜드를 어떻게 프로세스로 만드느냐의 문제죠.

프로세스는 어떤 것입니까.

현대사회가 만든 발상법은 늘 새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호기심을 끌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삼성 핸드폰과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새로우면서 작품의 질은 (공산품처럼) 균질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이 예술가겠죠.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006호 (202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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