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금호미술관이 제주도가 됐다. 제주에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동양화가 김보희(68)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그려낸 초록의 야자수와 용설란, 비취빛 바다와 형광색 앵무새는 도심의 화이트 큐브를 이국적 생명 에너지 가득한 낙원으로 바꿔놓았다. 겨울에도 늘 푸른 제주에서 좋은 기운을 받는다는 그가 그린 작품 55점은 중국발 역병 따위 썩 물러가라고 힘 모아 외치고 있었다.
▎제주의 숲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The Days’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보희 작가. / 사진:금호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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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전 ‘Towards’(5월 15일~7월 12일·월요일 휴관)가 열리고 있는 금호미술관에서 관람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3층의 높다란 바람벽을 ‘ㄱ’자로 메운 ‘The Days’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간 그린 100호(130×162㎝)짜리 캔버스 27점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제주의 초록 숲과 여미지식물원을 촘촘하게 옮겨놓았다. 기운이 생동하는 이 작품에서 얼핏 프랑스 화가 앙리루소의 정글 회화가 연상되지만, 김보희 작가의 숲에는 사자나 뱀 같은 무서운 육식동물은 없다. 대신 개구리와 거북이, 원숭이와 앵무새가 평화롭게 공존한다. 미술평론가 심상용 서울대 교수는 “야생의 구성원들이 밤새 파티를 벌이는 루소의 정글과 달리, 김보희의 숲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내가 있고 싶은 공간, 내가 행복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누구는 ‘현대판 십장생도’라고 하더라고요. 사람도 그려 넣으려다, 그러면 숲속에 시기와 다툼이 생길 것 같아 빼버렸죠. 하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을 만들기 직전인 다섯째 날 상황이라고 할까요.”연한 회녹색 블라우스 차림으로 나타난 김 교수가 살짝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맨 왼쪽에 새벽하늘이 보이고 맨 오른쪽엔 달이 떠 있죠. 하루의 시작과 끝, 삶의 처음과 마지막의 순환을 담았어요.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1주년 때도 선보였는데, 그때는 멀리 떨어져 붙여놓았지만 이번에는 작품을 훨씬 가까이에서 보실 수가 있어 아주 잘된 것같아요. 설치를 ‘ㄱ’자로 해놓으니 깊이감도 있고.”개별 사이즈로만 보자면 그 옆에 붙어 있는 ‘In Between’이 더 대단하다. 200×400㎝짜리 캔버스 두 개를 아래위로 붙여놓았는데, 각각 제주의 하늘과 바다를 섬세한 터치로 구현했다. “가로세로 4m나 되는 것을 그려놓고도 ‘이걸 어디다 거나’ 싶었는데, 이렇게 자리가 있네요. 이런 게 인연이겠죠.”
▎‘Self Portrait’(2019), Color on canvas, 162×130㎝ / 사진:금호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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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의 캔버스를 장식한 재료는 유화 물감이 아니다. 동양화 그릴 때 쓰이는 분채, 석채, 튜브 물감 등이다. 작품 설명에도 ‘캔버스에 채색(Color on canvas)’이라고 돼 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진하지 않고 담백한 이유다.“제가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장지에 먹’ 대신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원래 색을 좋아하기도 했고, 채색화가 자꾸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또 큰 작업을 하기에 종이는 불편했어요. 찢어지고, 울고, 접힌 부분도 있고. 그래서 캔버스를 이용하게 됐는데, 천은 뒤집어서 썼어요.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 뒷면에 아교와 호분을 칠하고 동양화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는 식이죠. 물감은 수용성이라 피니시 처리를 따로 하죠. 그럼 은근스레 윤이 나요.”캔버스에 그린 동양화라….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에는 낙관(落款)도 있다. 한글 낙관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렸다. 캔버스 천 위에는 도장이 찍히지 않는단다. 아예 글자를 직접 적어 넣기도 했다. 올해 그린 신작 ‘Towards’ 시리즈 일부에 ‘SeetheSea’라는 문구를 반복해 적은 것이 대표적이다. “동양화에 있는 화제(畵題)”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음, 영어 화제라….하여 그의 작품은 동양화이되 동양화가 아니다. 아니, 동양화가 아닌데 동양화다. 아니다. 동양화인지 동양화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은 부질없는 얘기다. 그저 김보희의 작품일 뿐이다.
“내 생각이 그림으로 되는구나, 잘 살아야겠다”
▎‘Over the Trees - An Autumn High Noon’(2019), Color on canvas, 162×130㎝ / 사진:금호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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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대회에 나가는 족족 상을 받아오는 국민학생 딸을 ‘숙명’ 출신의 엄마는 눈여겨보았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선생님을 붙였다. 그런데 마침 동양화를 공부한 분이었다. 게다가 학교 미술 선생님도 동양화를 전공한 분이었다.“어릴 적에는 서양화를 하고 싶었는데, 철들고 나니 제가 동양화를 공부하게 된 것이 너무 다행인 거예요. 우리 것을 배웠기 때문에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서양화를 하는 사람도 동양화 이론이나 역사, 재료 및 기법은 배워야 한다고 봐요. 김환기 선생님이나 김종학 선생님의 작품도 재료만 그렇지 사실 동양화거든요.”
채색화를 하시는데.
▎‘Leo’(2017), Color on canvas, 54.5×40.5㎝ / 사진:금호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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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생님은 “채색화는 일본풍”’이라며 “먹으로 해야 동양화”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세요. 저도 한지에 먹 작품도 물론 하고요. 하지만 색맹이 아닌 다음에야 색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걸 배제해요.
캔버스 천을 이용하시고요.아까도 말씀드린 종이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죠. 이게 종이처럼 한 번에 바르면 안 돼요. 꼼꼼한 터치로 여러 번 발라 그러데이션을 주어야 하거든요. 제가 색을 점점 쌓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비단이나 삼베에다 그리기도 해요. 안 될 게 뭐 있나요. 다만 번짐 효과는 별로 없어서 그런 부분을 어떻게 표현할지 여전히 연구 중입니다.
붓은 어떤가요.동양화 붓은 힘이 없어 칠이 안 돼요. 평붓과 서양화 붓을 섞어씁니다. 이태리 붓 중에 우리 붓처럼 도톰하고 빳빳한 것이 있어서 그걸 애용하죠.
70학번이시고 1980년에 첫 개인전을 하셨으니 올해가 여러모로 뜻깊은 해인 것 같습니다. 모교에서 동양화과 교수 생활도 오래 하셨는데, 학생들에겐 어떻게 가르침을 주셨나요.제가 느끼는 게 있어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제가 열심히 그려야 했죠. 이렇게 그리니까 이렇다 하고 말을 해줘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제자들은 선생님이 아니라 엄마 같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제일 질색하는 말이지만. 호호.
제주에는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됐나요.신혼여행을 제주로 갔고 그 뒤에도 남편과 여러 번 다녔어요. ‘은퇴하면 여기서 살자’고 의기투합했고, 놀러 갔다가 땅 보러 다니기도 했고요. 남편이 먼저 직장을 정리하고 내려와 2004년 무렵에 서귀포 근처 중산간에 집을 지었죠. 그 뒤로 수시로 와서 쉬고 작업하고 그럽니다.
1층에 걸려 있는 ‘The Terrace’(2019)는 선생님 댁을 그린 건가요.
▎금호미술관 1층 전시장 풍경. / 사진:금호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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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우리 집 테라스에서 보이는 숲과 바다를 그린 겁니다. 수국이나 로즈메리도 그대로고요. 표정 좋은 우리 레오, 래브라도 리트리버예요. 내 삶이, 내 생각이 그림으로 되는구나, 잘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런데 이제는 아파트가 들어서서 집에서 바다가 잘 보이지 않아요. 얼마나 서운한지.
숲뿐만 아니라 도로나 건물을 그린 것도 있네요.매일 산책하는 중문 단지 곳곳의 모습입니다. 야자나무를 배경으로 하니까 LA 아니냐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전 LA에 가본 적이 없어요. 제주 자체가 멋진 곳이에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은데.칠십이 다 되어 가니까 노을이 그냥 노을로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우선 멈춤’이라는 도로 표지판도 그렇고.
지하 1층에 전시된 각종 씨앗 그림이 특히 인상적입니다.실제 씨앗 그림도 있고, 제가 상상해서 그린 씨앗도 있어요. 씨앗 속에는 생명 수만 개가 담겨 있잖아요. 그 에너지가 정말 대단해요. 안 익은 야자 열매를 그린 ‘The Seeds’ 같은 작품에서 생명력과 힘이 불뚝불뚝 느껴지지 않나요. 다 익은 야자 열매는 노란 금빛이 되는데, 에너지가 불꽃놀이 폭죽 같아서 ‘Fireworks’라고 이름 붙였죠.
자연에서 보고 느낀 게 많으실 것 같아요.이 작은 씨앗이 참 대단한 힘을 갖고 있어요. 식물이 제자리에서 안 움직이는 것 같지만, 씨앗을 퍼트리는 것 보면 놀라울 정도거든요. 탁 터뜨리는 게 아주 힘이 느껴지죠. 그러다가 얼마 지나씨가 뿌려진 자리에서 줄기가 빳빳하게 솟아오르는 걸 보는 느낌은 감동 그 자체죠. 나이가 들수록 그런 모습이 더 가슴속으로 들어와요.
‘Self Portrait’(2019·사진1)라는 작품이 재미있습니다.씨앗과 만개한 꽃, 그리고 시들어 늘어진 꽃술을 한 가지에 그려 넣었어요. 모두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늙는다는 것? 자랑스러운 것이죠.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