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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CEO의 서재를 위한 비즈니스 고전’(17) 

해럴드 블룸 『서구 캐넌』, 『어떻게 그리고 왜 읽을 것인가』 

독서는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지극히 정치적 행위’다. 서구를 만든 책을 읽으며 ‘미래 대한민국’ 만들 책 고민해야 할 때다.

▎ 사진:진 블룸
독서는 생사가 걸린 치열한 싸움의 현장이다. 독서는 고도의 정치적, 그리고 국제 정치적 행위다. 독서에도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다. 독서는 국력이다. 책 읽는 국민이 부강한 나라를 만든다. 독서인이 많은 회사가 강하다. (그래서 ‘독서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국력이 신장하면 작가들의 국제적 위상도 올라간다.

나라의 흥망성쇠에 인구가 중요하고 생산성·창의성이 중요하다. 독서가 으뜸으로 절실하다. 함석헌(1901~1989)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다. 생각하려면 읽어야 한다. 천재는 독서 없이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천재는 경제기사 제목만 보고도 주식시장의 흐름을 안다. 수재·범재·둔재는 아니다. 텍스트를 가까이해야 한다.

해럴드 블룸이 쓴 『How to Read and Why(어떻게 그리고 왜 읽을 것인가)』는 직·간접적으로 독서의 정치성과 밀접하다. (우리말 제목은 『해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이다. 절판 상태지만 온라인 중고서점에 몇 권 남아 있다.) 문학 읽기에 대한 책이지만, 논픽션 독서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특히 독자가 창안자(inventor)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자는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앵무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미국 독서계와 학계, 더 나아가 정계는 ‘글로벌 캐넌(Global canon)’ 파벌과 ‘서구 캐넌(Western canon)’ 파벌로 양분된다고 볼 수 있다. ‘글로벌 캐넌’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서구 캐넌’은 서구를 만든 책들이다. 캐넌은 정경(正經)이다. 캐넌은 또 ‘주요 문헌 목록’이다. (여러분 회사에서 신입사원부터 회장까지 반드시 읽어야 할 ‘주요 문헌 목록’은 무엇인가.)

‘서구 캐넌’은 이 세상을 적어도 오늘까지는 지배하고 있는 서구(the West), 즉 서부 유럽을 비롯해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를 만든 책들이다. ‘글로벌 캐넌’에는 『성서』·호메로스·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길가메시 서사시』·『맹자』·『논어』·『손자병법』·『바가다드 기타』·『금강경』·『법화경』등도 포함된다. 양대 캐넌은 겹친다. 양쪽 모두 서구에서 나온 책이 많다. 서구의 패권이 유지된다는 것은 캐넌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이 세계 패권을 차지하려면, 중국에서 나온 캐넌이 많아져야 한다. 패권 싸움은 캐넌 싸움이다.

‘서구 캐넌’을 중시하는 서구, 특히 미국 사람들은 ‘세계의 나머지(the rest of the world)’를 알기 전에 우선 자신들의 뿌리인 서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피(知彼)’ 전에 ‘지기(知己)’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글로벌 캐넌’을 말하는 사람들은 서구가 비(非)서구를 알아야 더 풍성하고 더 강해진다고 주장한다.

얄궂게도 캐넌을 둘러싼 ‘서구(The West) vs. 나머지(The Rest)의 싸움’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그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희미하다.

‘서구 캐넌’이 있다면 ‘대한민국 캐넌’은 무엇인가. ‘통일 대한민국 캐넌’에는 무엇이 포함돼야 할까. 어떤 책들이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책들이 대한민국을 더 부강하게 만들 것인가. 그런 ‘캐넌 고민’을 해야 한다. 우선 포브스코리아 독자들이 ‘캐넌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구 캐넌’ 논란의 중심에 해럴드 블룸(1930~2019)이 서 있다. 블룸은 『서구 캐넌(Western Canon)』(1994)에서 서구를 만든 작가 26명을 제시했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읽을 것인가』는 『서구 캐넌』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다. 두 책 모두 최고의 문학 비평가가 쓴 서평집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 캐넌』에 블룸이 서구를 만든 작가로 엄선해 간추린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성서』와 호메로스는 빠졌다. 근대 인물들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1564~1616), 단테 (1265~1321), 초서(1342?~1400), 세르반테스(1547~1616), 몽테뉴(1533~1592), 몰리에르(1622~1673), 밀턴(1608~1674), 새뮤얼 존슨(1709~1784), 괴테(1749~1832), 워즈워스(1770~1850), 제인 오스틴(1775~1817), 월트 휘트먼(1819~1892, 에밀리 디킨슨(1830~1886), 디킨스(1812~1870), 조지 엘리엇(1819~1880), 톨스토이(1828~1910), 입센(1828~1906), 프로이트(1856~1939), 프루스트(1871~1922), 조이스(1882~1941), 울프(1882~1941), 카프카(1883~1924), 보르헤스(1883~1924), 네루다(1904~1973), 사뮈엘 베케트(1906~1989), 페소아(1888~1935).

26명 중 13명이 영어권 작가다. 여성은 4명이다. 해럴드 블룸이 미국 남성이기에 일정한 편견이 있었을 수도 있다. 프랑스·독일 사람이 ‘서구 캐넌’에 들어갈 작가를 선정했다면 등장인물이 상당히 다를 것이다. 블룸의 목록에는 루소·볼테르·마르크스가 없다. ‘진보’ 성향의 비평가라면 여성과 비서구인을 더 많이 포함했을 것이다.


▎『서구 캐넌』영문판 표지.
문화상대주의의 영향으로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일은 금기시되고 있다. 해럴드 블룸은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문학사에서 우열을 가리며 금기를 깬 것일까. 누가 그에게 그런 권위를 주었을까.

블룸은 20~21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학 비평가다. 5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읽은 것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사진적 기억(eidetic memory)’이라는 ‘하늘의 선물’을 받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전체, 밀턴의 『실락원』, 『구약 성경』등을 암송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에는 한 시간에 1000페이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모르는 것을 빼고는 다 알았다. 자신이 읽을 가치가 있는 작품은 모두 읽었다고 주장했다. 블룸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코넬대(학사)·예일대(박사)에서 공부하고 1955년부터 2019년까지 예일대에서 가르쳤다. 예일대 교수 중에서 학자로서 최고위직인 ‘스털링 인문학 교수’ 석좌에 올랐다. 그는 평소 ‘시체 운반용 부대(body bag)’에 담겨 강단을 떠날 것이라고 공언했다. 89세를 일기로 2019년 10월 14일 월요일에 사망했다. 그 전주 목요일인 10일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블룸은 다문화주의에 반대한다. 어떤 평등의 가치를 위해 여성이나 비서구인의 함량 미달 작품을 필독서로 삼는 것에 반대한다. 그에게 서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는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는 ‘서구 캐넌’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인간성을 창조했다고 평가했다. 블룸에게 셰익스피어는 ‘문학의 신’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도 셰익스피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다. 『돈키호테』이후 모든 소설은 『돈키호테』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읽을까’, ‘왜 읽을까’, ‘어떻게 읽을까’에 대한 블룸의 대답은 허탈할 정도로 단순하다. 최상급 독자가 내놓은 답이 반드시 기기묘묘한 것은 아니다. 독서에 대한 최상급 독자의 생각이 평범한 독자와 같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닐까.

무엇을 읽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캐넌을 읽어야 한다. 블룸은 모든 캐넌 작품에 집에서도 낯섦(strangeness)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스티븐 킹, J K 롤링, J RR 톨킨 등 대중에게 인기 있는 작가들의 작품에는 냉담했다.

왜 읽어야 할까


▎『어떻게 그리고 왜 읽을 것인가』 영문판 표지.
블룸은 이렇게 생각한다.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다. 많이 읽다 보면 자신만의 확고한 의견도 생긴다. 독서의 목표는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알고 ‘더 확장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다.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다. 정체성 확립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장 순수한 독서의 목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니다. 블룸은 “여러분이 읽는 책이나 읽는 방식으로 이웃이나 지역사회를 향상시키려고 시도하지 말라”고 말한다. 독서는 이기적이어야 한다. 독서는 사회적인 행위가 아니다. 독서는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쾌락이다. 어떤 경지에 이르면, 독서 덕분에 사랑에 빠졌을 때와 같은 황홀경에 빠질 수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독서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현실의 우정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책 밖의 친구보다 책 속의 친구를 우리는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책 속에는 우리보다 더 독창적인 사람들이 있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타자성(otherness)를 체험한다. 책 속에서 여러 삶을 살 수 있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1547~1616)의 초상화. 해럴드 블룸은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가 최고의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블룸은 이렇게 본다. 독서가 어려운 이유는 독자가 읽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 학계의 문학이론을 버려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문학이론은 독서에 방해가 된다. 블룸은 이들 이론에 분노가 담겼다고 본다. 분노를 기반으로 한 문학이론은 독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블룸은 예컨대 『햄릿』을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읽는 것에 반대한다.

나 자신을 위해 읽어야 한다. 고전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더 나은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정의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작품의 미적 표준이 훼손된다. 어떤 이념을 위해 읽는 것은 읽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싸우기 위해 읽지 말아야 한다.

소리 내서 읽고 외워야 작품을 더 깊이 감상할 수 있다. 훌륭한 독자는 문학의 수사법 중에서도 특히 아이러니(역설에 상응하여 전하려는 생각의 반대되는 말을 써서 효과를 보는 수사법)에 민감하다.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즐겁게 읽으며 작품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라. 다시 읽을 때는 무슨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나는지 살펴라.

정치성을 거부하며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글쓰기나 읽기는 결국 정치적이다. 보수적이다. 기존 체제나 가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사람은 없다. 블룸도 미국의 종교 지형에서 보수적이지 않은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구약』성경의 일부 저자는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구약』의 신(神)은 위대한 문학적 허구였다. 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약』이 『구약』에 대한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인 오독(誤讀)이라는 이론을 내놨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1926)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독서에 대해 줄 수 있는 충고는 ‘어떤 충고도 받아들이지 말라’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책은 ‘보수적’으로 읽을 수도 있고 반대로 ‘진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신약』에서 ‘혁명가 예수’를 찾으려고 하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공산당 선언』을 보수적으로 읽어도 새로운 것이 보일 것이다.

책은 이기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블룸이 주장은 중요하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1723~1790), ‘정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아벨리(1469~1527)는 둘 다 인간의 이기심에 주목했다. 이기적인 인간이 어떻게 경제적·정치적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 그들은 이 문제에 답했다. 이기적인 독서는 무엇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 김환영은… 중앙일보플러스 대기자. 지은 책으로『문학으로 사랑을 읽다』 『곁에 두고 읽는 인생 문장』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가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202008호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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