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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역설의 리더십’(17) 

적 자신보다 적을 더 잘 아는 리더 

흔히 자기는 물론 적도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적은커녕 자신을 아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을 아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역사가 말해주는 사례를 보자.

▎사진:이정권 기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며,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움마다 반드시 위태롭다(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손자병법』 3장 ‘모공(謀攻)’ 편의 마지막 문장이다. 너무나 잘 알려지고 너무나 당연한 말이어서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만고불변의 진리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더 착각하곤 한다. 흔히 자기는 물론 적도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은 적은커녕 자신을 아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을 아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먼저 역사가 말해주는 사례를 보자.

‘토사구팽(兎死狗烹)’ 고사의 지식재산권자인 범려 이야기다.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구천에게 패권을 쥐여 준 뒤 물러나면서 동료 재상이었던 문종에게 한 조언이었다.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적국이 사라지면 책략을 내던 신하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월나라 왕은 함께 고난을 견딜 수는 있어도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는 인물입니다. 그대도 지금 떠나지 않으면 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범려의 말을 듣지 않고 구천 곁에 남아 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문종과 달리,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다. 거기서 큰돈을 벌고 다시 재상 자리에 오르지만, 이내 재산을 모두 주변에 나눠주고 다시 떠난다. 이후 도(陶)라는 곳으로 가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이름으로 무역중개업을 해 다시 막대한 재산을 모은다. 그러던 어느 날 범려의 둘째 아들이 살인을 해 초나라에 감금되는 일이 생겼다. 범려는 막내아들을 불러 말했다.

“살인한 자를 죽이는 것은 하늘이 낸 법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듣자 하니 천금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사람의 자식들은 저잣거리의 많은 사람 앞에서 목을 베지는 않는다고 하더라. 금 2000냥을 줄 테니 초나라로 가서 바치고 형을 데려오거라.”

자식의 죽음을 예견한 범려

이 얘기를 들은 장남이 범려에게 따졌다.

“아버님께서는 어찌 그런 중요한 일을 제게 맡기지 않으시고 막내에게 시키십니까? 정녕 저보다 아우를 더 믿으신다는 겁니까?”

그래도 범려가 막내아들을 고집하자, 장남은 칼을 빼들고 말했다.

“아버님이 저를 하찮게 여기시는 게 증명됐으니 제가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하직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칼로 목을 찌르려 하자 도주공의 부인이 놀라 장남을 팔을 붙잡으며 범려에게 장남에게 일을 맡기라고 설득했다. 범려는 하는 수 없이 맏아들을 초나라로 보내면서 친구인 장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주었다.

“초나라에 도착하거든 장생을 찾아가서 금을 주고, 너는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거라. 모든 것은 장생이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절대로 그와 다퉈서는 아니되느니라. 내 말을 명심하거라.”

범려의 거듭되는 당부를 듣고 초나라로 간 장남은 장생을 찾아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러자 장생이 말했다.

“여기 있지 말고 어서 떠나게. 앞으로 아우가 석방돼 나오더라도 그 까닭을 묻지 말고 모른 척해야 하네.”

장남은 겉으로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돌아가지 않고 장생 모르게 아는 사람 집에 숨어 있었다. 장생은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초나라 임금과 대신들은 모두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존경했다. 부귀영화를 욕심내지도 않았다. 범려의 아들이 주는 것이니 일단 받았다가 일이 성사되면 금을 도로 범려에게 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생은 기회를 엿보다 입궁해서 왕을 만났다. 그러고는 “어젯밤 하늘을 보니 상서롭지 못한 별이 떴는데 은혜를 베풀어 화를 물리치지 않으면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진언했다. 그러자 초나라 왕은 삼전지부(三錢之府)를 봉하라는 명을 내렸다. 삼전지부는 춘추시대에 쓰였던 동전들을 보관하는 창고를 말한다. 범려의 장남이 머물고 있던 집의 주인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장남에게 말했다.

“삼전지부를 봉했다 합니다. 따라서 곧 대사령이 내릴 것이오. 우리 초나라에서는 대사령을 내리기 전 언제나 삼전지부를 봉하곤 했지요.”

그러자 장남은 생각했다. 대사령이 내리면 아우는 석방될 것이다. 그렇다면 공연히 장생에게 아까운 금을 2000냥이나 준 게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장남은 장생을 찾아갔다. 그러자 장생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었나?”

“예, 곧 대사령이 내린다 하니, 아우가 풀려 나올 것 같아서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장생은 이내 장남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황금 2000냥을 들고 나와 장남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다시 초나라 왕을 찾아가 말했다.

“대왕께서 특사를 내려 나라의 재화를 피하려고 하시는데 지금 거리에서는 이상한 말이 돌고 있습니다. 도 땅의 부호인 주공의 아들이 살인을 저질러 초나라에 갇혀 있는데, 그 집에서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수만금을 우리 조정 대신들에게 주었답니다. 그래서 대왕의 특사령이 초나라 백성을 위한 게 아니라 뇌물을 받은 대신들의 말을 들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초 왕은 대로했다. 곧바로 도주공의 아들을 처형한 뒤 이튿날 대사령을 내렸다. 범려의 장남이 동생의 시신을 메고 돌아오자 모두 비통해 눈물을 흘렸지만 범려는 담담하게 장남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아우를 해치고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이다. 막내가 너보다 둘째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너와 막내는 성격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너는 어렸을 때 나와 같이 창업을 했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돈을 중히 여겨 함부로 쓰는 것을 삼간다. 하지만 막내는 부유한 환경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돈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쉽게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막내는 그 많은 돈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지만 너는 그러지 못한다. 그러기에 네 아우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토번의 흉계를 알아차린 이성

범려는 장생이 너그러운 마음씨의 소유자가 아님은 물론 자기 자식의 성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장남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신신당부하던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할 때는 무엇보다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이 우선이다. 특히 리더라면 더 그렇다. 자신을 냉철하게 판단해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그 부분을 다른 사람들의 능력으로 보완하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이끄는 조직도 마찬가지다. 냉정하게 살펴 가장 약한 고리를 보완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적(경쟁자)을 살피는 것이다.

적을 아는 것 또한 착각하기 쉽다. 겉으로 드러나는 요인들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적을 안다는 것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적에 대해 어설프게 알고서 덤비다가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를 때보다 더 큰 화를 초래할 수 있다. 적보다 적을 더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당나라 덕종 때 토번(오늘날 티베트)의 상결찬이 화의를 청하는 사신을 보내왔다. 토번은 당나라 장수 중에 혼감이 가장 신의가 있다며 혼감이 양국 간 회맹을 관장할 것을 요청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토번의 요청을 받아들여 혼감을 보내기로 했다. 그때 이성이란 장수가 혼감에게 말하기를, 회맹 장소에 가서 잠시도 경각심을 늦추지 말고 엄밀히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대신 장연상은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성은 회맹이 원만하게 맺어지기를 원하지 않아서 경비를 삼엄하게 하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토번을 의심한다는 게 드러난다면 토번도 우리를 의심하게 될 터인데 그래서야 어찌 회맹을 성공적으로 맺을 수가 있겠습니까?”

장연상의 말을 듣고 덕종은 혼감에게 토번을 의심하지 말고 성의껏 대하라고 하교했다. 혼감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번과 당나라가 신미 날에 결맹하기로 합의했다는 상주가 올라왔다. 황제가 백관을 소집한 자리에서 장연상은 혼감이 올린 상주서를 당당하게 내보였다. 그러자 이성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서부 변방에서 자라서 토번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토번이 얼마나 교활한지 아마도 모르실 겁니다. 그런 교활한 자들에게 기만을 당할 위험이 있기에 저는 토번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회맹은 예정대로 진행됐고 과연 이성의 우려가 맞았다. 토번은 이미 수만 정병을 회맹 장소 인근에 매복시켜 놓고 있었다. 혼감 일행은 그것도 모르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북소리가 울리고 토번의 군사들이 달려왔다. 혼감은 급히 말을 타고 달아났다. 당나라 병사들도 혼비백산해 동쪽으로 달아났지만 토번 군사들이 추격해 닥치는 대로 죽였다. 나머지 병사들도 모두 생포돼 한 사람도 당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황제는 희색이 만면해 대신들에게 말했다.

“오늘 토번과 싸움을 그치고 결맹을 맺으니 이 어찌 경사가 아니겠소?”

장수인 마수도 맞장구를 쳤다.

“참으로 큰 경사이옵니다.”

그러나 이성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토번은 이리 같은 무리들이라, 결맹한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일도 잘되고 있는지 소신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버럭 화를 냈다.

“변경 일을 모르면서 어찌 그렇게 불상스러운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이성은 얼른 부복하고 죄를 빌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토번이 약속을 깨고 당나라 군대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크게 놀란 덕종은 이튿날 조회에서 이성에게 사과를 했다.

사실 토번의 상결찬은 전부터 이성과 마수, 혼감 세 장수를 높이 평가하고 이들을 없애야 당나라를 멸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이성과 마수를 이간하고 마수를 통해 당나라와 화의하는 척하며 혼감을 잡고, 기회를 이용해 장안으로 쳐들어가려는 일련의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그런 토번의 속셈을 이성은 알아차렸으나, 마수와 혼감, 장연상 등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실만으로 토번을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니 낭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적을 알되, 적 자신보다 더 속속들이 꿰고 있어야 한다. 리더의 임무가 그것이다. 적 자신보다 적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리더의 자격을 백 퍼센트 충족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요숭이다.

죽은 요숭이 산 장열을 농락하다

요숭은 당 현종 때 ‘개원의 치(開元之治)’라 불리는 태평성세를 주도한 명재상이었다. 그의 말년에 장열이라는 인물 역시 재상으로 함께 있었다. 그런데 장열은 요숭을 시기해 사사건건 그를 비판하고 끌어내릴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요숭은 병이 들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는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너희도 알다시피 장열과 나는 사이가 아주 나쁘다. 그러니 내가 죽고 나면 너희에게 어떤 화마가 닥칠지 모르겠구나. 명심하거라. 그는 사치를 즐기고 의복을 화려하게 입는 것을 좋아하며 골동품을 무척 욕심낸다. 내가 죽으면 그가 문상을 올 것이다. 그가 오면 너희는 우리 집에 있는 보물들을 모두 내다 보이거라. 만약 그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너희는 살아날 길이 없다. 하지만 그가 보물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면 그 보물들을 아까워하지 말고 모두 주어라. 그러고는 그에게 비문 하나를 써달라고 하고, 비문을 써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즉시 베껴 사본을 황상께 올리도록 해라. 또 미리 비석을 깎아놓았다가 황제께서 사본을 보시는 즉시 그 비문을 비석에 새겨서 다시 황제께서 보시도록 바쳐라. 며칠 뒤가 되면 장열이 후회하며 자신이 써준 비문을 회수하려 할 것이다. 그때 그 비문은 이미 황제께서 보시고 윤허하신 거라 말해주고 비문이 새겨진 비석을 그에게 보이거라.”

얼마 후 요숭이 죽자 장열이 문상을 왔다. 그는 요숭의 집에 진열된 보물들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요숭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시킨 대로 보물을 몽땅 장열에게 주고, 대신 아버지를 위한 비문을 써달라고 간청했다. 장열은 보물 욕심에 허락하고 요숭의 삶과 공적을 상세하게 칭송한 비문을 써서 보냈다.

며칠이 지나자 과연 장열은 사람을 보내 그 비문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비문에 몇 구절을 더 보태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요숭의 아들들은 이미 비문이 새겨진 비석을 꺼내놓고는 황제께서 이미 어람하고 윤허하셨다고 말했다. 사람이 돌아가 사정을 말하니 장열은 가슴을 치며 개탄했다.

“죽은 요숭이 산 장열을 농락하는구나. 내 지혜는 요숭을 따르지 못한다.”

요숭은 정적인 장열 자신보다도 더 장열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런 지혜가 자식들의 목숨을 보호하고 가문을 지킬 수 있었다. 이처럼 적에 대해서 적보다 더 잘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론 적이라고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흘려버리는 것들이다. 특히 결점이나 약점일수록 그렇다. 사람이란 늘 자신에게 관대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적들의 그런 점들을 잘 파악해두면, 결정적인 순간에 이용할 수 있다. 리더일수록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리더가 있는 조직의 미래가 어둡다면 이상한 일이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2009호 (202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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