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프라하(Praha) 

신비스런 전설이 깃든 프라하의 요람, 비셰흐라트 

프라하는 세상에서 무척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프라하가 아름다운 도시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후반 ‘체코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카를 4세가 통치할 때다. 도시계획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던 그는 블타바강 변의 비셰르라트를 애지중지했다. 왜냐면 프라하 창건 전설이 깃든 신성한 언덕이기 때문이었다.

▎비셰흐라트 언덕에서 본 블타바강 풍경. 멀리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이 보인다. 바로 앞 동판에는 블타바강의 다리들이 묘사되어 있다. / 사진:정태남
블타바강이 흐르는 보헤미아


흔히들 체코는 동유럽 국가라고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체코 사람들은 좀 언짢아한다. 왜냐면 지리적으로 보면 체코는 유럽의 심장부이며, 수도 프라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보다 더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물론 동서 냉전시대에는 정치적으로 구분하여 동유럽 국가라고 했지만. 프라하는 세상에서 무척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도시를 대표하는 음악이 있다면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Má Vlast)] 중 두 번째 곡 ‘블타바’가 아닐까? 사실 체코항공 편으로 프라하 하벨국제공항에 착륙할 때 기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곡이 바로 ‘블타바’이다. ‘블타바(Vltava)’는 강 이름이다. 이 강은 남부 보헤미아에서 흘러나와 보헤미아 땅을 가로질러 프라하 시가지를 지나 독일의 엘베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그럼 왜 이곳을 ‘보헤미아’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 기원은 아주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8세기 후반 이탈리아반도 중부에 ‘로마’라는 조그만 나라를 세운 로마인들은 영토를 점점 더 넓혀가더니 기원전 2세기 후반에는 북부 이탈리아로 진출했다. 그곳에 살던 켈트족의 일파 보이족은 팽창하는 로마에 밀려 알프스산맥 너머 북동쪽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들이 새로 정착한 지역을 고대 로마인들은 ‘보이족의 땅’이라고 하여 ‘보이오하이뭄(Boiohaemum)’이라고 불렀다. 보헤미아(Bohemia)라는 지명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몇 세기가 지난 다음 보헤미아에는 슬라브족이 이주해 와서 자리 잡게 된다.


▎비셰흐라트 묘지에서 본 베드로와 바울 성당. / 사진:정태남
현재의 체코공화국은 서쪽의 보헤미아(Bohemia)와 동쪽의 모라비아(Moravia), 모라비아 북쪽 폴란드 접경의 실레지아(Silesia) 지방 일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지명은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식 표기이고, 체코어 지명은 각각 현 ‘체히(Čechy)’, ‘모라바(Morava)’, ‘슬레스코(Slezsko)’이다. 또 독일어 지명은 각각 ‘뵈멘(Bohmen)’, ‘매렌(Mähren)’, ‘슐레지엔(Schulesien)’이다.

체코의 지명에는 독일식 지명이 별도로 있는 경우가 아주 많은데, 이는 곧 이 나라가 독일어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체코는 서쪽으로는 독일,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지정학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독일어권 사람들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사실 체코 사람들은 게르만계가 아니라 슬라브계이다. 그러니까 체코는 유럽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슬라브족의 나라다. 어쨌든 이들이 이토록 민족의식이 강한 것은 이들의 역사가 고난과 격동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체코는 약 1000년 전에 블타바강 좌안의 언덕 위 현재 프라하 성이 세워진 곳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기원후 16세기에 유럽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후에는 약 300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독일 문화권에 완전히 편입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슬로바키아와 합쳐져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비로소 독립국이 되었다. 그 후에는 나치 독일의 점령, 공산주의,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 등을 거쳤고,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조용히 갈라지는 등 수차례 격동기를 거쳤다. 이러한 격동기를 지나는 동안 수도 프라하는 다행히도 별로 파괴되지 않고 아름다운 옛 시가지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옛 프라하 시청사 내부 모자이크 벽화 〈환상 속에서 새로운 도읍지를 바라보는 리부셰. / 사진:정태남
프라하 도시 역사를 보면, 이곳이 아름다운 도시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후반 카를 4세(체코식으로는 ‘카렐 4세’)가 통치할 때이다. 카를 4세는 ‘체코의 세종대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체코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손꼽힌다. 그는 대대적으로 도시계획을 단행하면서, 성 비투스 대성당, 프라하 성, 카를 다리를 비롯해 프라하의 주요한 건축물 상당수를 착공하거나 증축했다. 한편 체코 역사의 시작은 카를 4세 시대 이전으로 수백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보헤미아에서 체코 역사의 문을 연 프르제미슬 왕조는 순수한 체코 민족의 왕조였다. 이 왕조의 탄생은 전설과 역사가 뒤섞여 안갯속에 휩싸여 있다.

비셰흐라트의 리부셰 공주


▎체코의 ‘세종대왕’ 카를 4세 동상. / 사진:정태남
카를 다리에서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블타바강 변에는 비셰흐라트(Vyšehrad) 언덕이 솟아 있다. 비셰(vyše)는 ‘높은’, 흐라트(hrad)는 ‘성(城)’이란 뜻이다. 이 언덕 정상부에 세워진 신고딕 양식의 베드로와 바울 성당 왼쪽에 예쁘게 조성된 국가유공자 묘지에는 정치, 예술, 문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체코를 빛낸 인물 600여 명이 묻혀 있다. 그중에는 음악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와 안토닌 드보르자크, 화가 알폰스 무하와 조각가 라디슬라프 샬로운, 문인 카렐 차페크와 얀 네루다 등의 묘소도 눈에 띈다. 그런가 하면 이 성당 옆 한쪽 뜰에는 체코의 초기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 석상들이 세워져 있다. 그중 쟁기를 들고 앉아 있는 남자의 어깨 위에 오른손을 얹고 왼손으로는 먼 곳을 가리키고 있는 리부셰(Libuše)가 단연 주인공인데 그녀의 할아버지 이름이 체흐(Czech)이니, 이 나라의 국명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참고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국명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체코(Czecho)’가 아니라 ‘체키아(Czechia)’이다.

이야기는 체흐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까마득한 옛날 유럽 중원에 레흐, 체흐, 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삼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냥하러 멀리 떠났다. 세 형제는 다른 사냥감을 쫓아가느라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루스는 동쪽으로 갔고, 체흐는 서쪽으로 가서 보헤미아에 다다랐으며, 레흐는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 후 각자 도착한 곳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레흐가 세운 레히아는 지금의 폴란드에 해당하고, 루스가 세운 루테니아는 지금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며, 체흐가 세운 체키아는 현재의 체코 영역에 해당한다. 이 전설에서 보듯, 언어적으로만 봐도 체코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우크라이나어는 매우 가깝다.


▎블타바강. 카를 다리 너머 프라하 성과 비투스 성당이 시가지의 구심점을 이룬다. / 사진:정태남
체흐의 아들 크로크는 9세기 중반에 부족국가의 기초를 다지고 비셰흐라트 언덕에 도읍을 정했다. 그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셋째 딸 리부셰에게 통치술을 가르쳐 권력을 물려주었다. 부족 원로들은 그녀에게 처녀로 있지 말고 결혼하라고 종용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녀는 환상 속에서 강 건너편 멀리 보이는 언덕에서 크게 번영하는 도읍지의 모습을 봤다. 또 환상 속에서 결혼할 남자도 봤다. 리부셰는 그 남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쪽 신발이 찢어진 채 쟁기로 밭을 갈고 있다고 했다. 이리하여 신하들은 수소문 끝에 마침내 리부셰가 묘사한 남자와 똑같은 젊은 농부를 발견하고는 그를 비셰흐라트로 모셔왔다. 리부셰는 이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프르제미슬이었다. 이리하여 프르제미슬 왕조가 시작됐다. 남편을 등에 업고 실권을 장악한 리부셰는 도읍지를 멀리 떨어진 강 건너편 언덕 위로 옮기고 그곳을 ‘프라하’라고 불렀다. 그 지점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이 세워진 곳이다.

세월이 흐른 다음 12세기 중반부터 비셰흐라트 언덕은 서서히 잊혔다. 그러다가 200여 년 후 카를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대관식 행차를 바로 이 언덕에서 시작하고 또 이곳을 요새화하고는 프라하 시가지와 연결했다. 이리하여 비셰흐라트가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은 다시 부각됐다.


▎리부셰와 프르제미슬 석상. / 사진:정태남
체코 민족의 전설과 역사가 깃든 비셰흐라트는 체코 민족에게 매우 성스러운 언덕이자 프라하의 요람인 셈이다. 따라서 체코를 빛낸 위인들의 묘소가 바로 이곳에 조성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한편, 체코 국민주의 음악의 선구자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연작교향시 [나의 조국]은 모두 여섯 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곡이 바로 ‘비셰흐라트’이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009호 (2020.08.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