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예술의 산실인 피렌체로 여행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길 데 없는 산 경험을 얻는 일이다. 현악 6중주 [피렌체의 추억]을 작곡한 차이콥스키는 피렌체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몇 해에 걸쳐 여러 번 이곳을 찾았는데 올 때마다 브루넬레스키의 돔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피렌체의 추억’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다.
▎아르노강 남쪽 언덕 위에 조성된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 전경.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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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노강 남쪽 언덕에 조성된 미켈란젤로 광장에 올라서면 피렌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토스카나의 푸른 언덕은 붉은색으로 통일된 도시의 색조를 긴장시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이런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면, 피렌체가 배경이 된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킥키]에 나오는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의 애틋하고도 감미로운 선율이 아닐까? 물론 가사는 다소 엉뚱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어쨌든 이 아리아의 가사에 ‘폰테 벡키오’가 언급된다.
폰테 벡키오는 문자 그대로 ‘오래된(vecchio) 다리(ponte)’라는 뜻인데, 이것을 ‘베키오 다리’라고 표현하면 아주 우스꽝스럽다. 폰테 벡키오는 실제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형태가 아주 특이하다. 즉, 아르노강 양안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상가도 있고 구름다리 같은 통로가 동쪽 상가 위로 지나가는 복합기능의 다리다. 이 다리가 이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565년 바사리(G. Vasari)의 설계에 의하지만, 그 기원은 2000여 년 전 로마인이 수도 로마로 가는 도로와 연결하기 위해 세웠던 돌다리였다. 옛날 로마군은 아르노강 변에 병영도시를 건설하고는 플로렌티아(Florentia)라고 불렀는데, 이 지명은 ‘꽃이 피는 곳’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한편 ‘Florentia’는 프랑스어로는 ‘Florence’로 표기하며 ‘플로랑스’로 발음한다. 영어권에서는 프랑스식 표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플로렌스’로 발음한다. 현대 이탈리아어로는 ‘Firenze’로 표기하며 ‘피렌체’보다는 ‘피렌쩨’에 더 가깝게 발음한다.
피렌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와 로마시대 이래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찬란한 시대로 꼽는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이었다. 이러한 피렌체 시가지에서 구심점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랜드마크는 두오모(Duomo)다. 두오모는 ‘신의 집’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보통 한 도시의 주교좌 대성당을 말한다. 피렌체 두오모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즉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그러니까 ‘꽃이 피는 곳’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피렌체의 심장인 세례당과 두오모 및 종탑. 모차르트 부자는 이 근처 호텔에 머물렀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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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의 건립은 중세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1296년에 조각가이자 건축가이던 아르놀포 디 캄피오(Arnolfo di Cambio)가 착공했다. 그가 사망한 뒤 공사는 진행되었으나 1347년에 토스카나 지방을 휩쓴 흑사병으로 경제가 위축되자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355년에 전면과 회중석벽 정도가 완성되었고 10년 후 피렌체의 경제가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자 공사는 본격적으로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름이 44m에 달하고 바닥에서 높이 100m에 달하는 거대한 쿠폴라를 당시 기술로 어떻게 시공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어 ‘cupola’는 영어로 ‘dome’이다. 이리하여 1418년에 마침내 세기의 공모전이 열렸고, 독창적이고 과감하며 기상천외한 방식을 제시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안이 선정되었다. 이리하여 지금부터 꼭 600년 전인 1420년에 쿠폴라 공사가 시작되었고, 큰 사고 없이 16년 만인 1436년에 ‘꼭지’ 부분만 제외하고 완공되었다.
르네상스 건축의 효시,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
▎브루넬레스키가 완성한 거대하고 우아한 쿠폴라.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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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쿠폴라는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로마의 유적에서 로마인들의 공간감각과 건축기술에 영감을 얻어 설계했다. 쿠폴라의 우아한 모습과 기발한 건축구조는 지금도 놀라움의 대상이며, 르네상스 건축의 효시로 꼽힌다.쿠폴라가 완공됨으로써 두오모가 착공 140년 만에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의 강력한 경쟁 도시들의 모습은 피렌체와 더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 두오모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당으로 신도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피렌체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력을 상징했다. 현재는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뒤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차이콥스키의 '피렌체의 추억'
▎쿠폴라 위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시가지.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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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라면 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다. 오페라가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1600년 10월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와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야코포 페리의 음악극 [에우리디체(Euridice)]가 공연되었는데, 음악과 극뿐 아니라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무대도 관객들에게 엄청난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이것이 악보와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첫 번째 오페라다.이처럼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예술의 산실인 피렌체로 여행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길 데 없는 산 경험을 얻는 일이다. 모차르트 부자의 경우를 보자. 이 두 사람은 177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로마로 가는 길에 일주일 동안 피렌체에 머물렀다. 이때 14세 소년 모차르트는 토스카나 대공과 귀족들 앞에서 연주하여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그들은 두오모에서 한 블록 건너편에 있던 호텔에 묵었으니 매일 브루넬레스키의 거대한 쿠폴라를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감탄했으리라. 한편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렌체에 와보면 이곳에서 살다가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썼을 정도로 피렌체를 마음에 들어 했다.
차이콥스키도 피렌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몇 해에 걸쳐 여러 번 피렌체를 찾았는데 올 때마다 브루넬레스키의 돔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피렌체’라는 지명이 돋보이는 제목의 현악 6중주곡도 썼다. 이 곡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Souvenir de Florence]. ‘피렌체의 추억’이란 뜻이다.
▎브루넬레스키 석상.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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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가 피렌체를 마지막으로 찾은 해는 1890년. 그해 1월 30일 피렌체에 도착하여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 작곡에 몰두하던 중, 4월에 일단 로마로 갔다가 5월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현악 6중주 [피렌체의 추억]의 스케치를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고 본격적인 작곡은 러시아에 돌아간 다음인 6월 중순부터 시작했다. 그가 7월 12일 후원자였던 부유한 미망인 나데지다 폰 메크(1831~1894)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곡이 완성되었음을 언급했던 것을 보면 이 곡은 그녀에게 헌정하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전에 [교향곡 제4번]을 작곡하여 그녀에게 헌정했다.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의 관계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콥스키는 1877년 37세 때 여 제자가 열렬하게 구애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결혼했지만 그녀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결혼한 지 2달 반 만에 집을 뛰쳐나갔다. 당시 그는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하던 폰 메크 부인과 서신을 교환했는데, 그녀는 그에게도 매년 재정적으로 크게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은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을 그만두고, 오로지 자유롭게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고 또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여러 나라로 여행할 수 있었다.
▎피렌체 시가지를 흐르는 아르노강과 폰테 벡키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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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서신교환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차이콥스키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피렌체에 체류할 때 차이콥스키는 아르노강 남쪽 지역에 있는 별장에 머물렀는데 이 집은 그녀가 마련해준 것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피렌체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와 마주치는 것을 철저히 피했다. 그 후 러시아에서 [피렌체의 추억]이 완성된 해인 1890년 가을, 그녀는 갑자기 지원금을 끊고 그와의 관계도 끊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녀가 파산했다는 것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한편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을 좀 더 손본 다음 2년 후에 초연했다. 그런데 이 곡에서는 [피렌체의 추억]이라는 제목과 달리 피렌체나 이탈리아를 연상하게 하는 음악적 요소는 전혀 없고 오히려 러시아의 토속적 선율이 돋보인다. 어쨌든 그에게 ‘피렌체의 추억’은 씁쓸한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피렌체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기억 속에는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가 강하게 떠올랐겠지만.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