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People

Home>포브스>CEO&People

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22) 치유의 작가, 이혜민 

상처받은 모든 영혼을 위한 위로 

사진 신인섭 기자
리플렉션(reflection). 거울이나 물에 비친 모습, 혹은 빛이나 소리의 반사, 아니면 상태나 속성의 반영-.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끼친 유일한 긍정의 요소가 있다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를 강제로 그 자리에 멈춰 세우고 자신을 돌아보라고 명령했다는 것일 터다. “인제는 돌아와/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처럼, 가식과 허위는 떨궈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찾으라는 일갈이다. 상처를 감싸주는 붕대와 고단함을 달래주는 베개 혹은 쿠션으로 20년 넘게 작업을 이어온 설치 미술가 이혜민(53)이 올 한 해를 보내며 선택한 전시의 제목 ‘리플렉션즈(Reflections·11월 25일~12월 12일 갤러리 빙)’는 이 느닷없는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든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이자 위로다.

▎딱딱한 브론즈로 만든 쿠션 작업에 머리를 기댄 이혜민 작가.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공존하는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의 고단한 영혼을 위로한다.
서울대 음대 교수, 국립중앙의료원 의사였던 부모님은 세 딸이 음악의 기쁨을 평생 느끼며 살길 바랐다. 그래서 큰딸은 피아노, 둘째는 첼로, 막내는 바이올린을 배우도록 했고, 트리오도 만들었다. 좋은 공연이 있는 날이면 객석 앞줄은 세 자매의 차지였다.

다섯 살 때부터 첼로를 배운 둘째는 어느 날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어릴 적부터 최고의 공연을 실제로 또 음반으로 수없이 보고 들어 듣는 귀는 발달했는데, 문득 제 연주 실력이 거기에 많이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게다가 다른 사람이 작곡해놓은 그대로만 연주해야 한다는 것도 답답해졌고요. 제가 직접 작곡한 곡을 연주하고 싶은데, 그럴 능력은 또 없고. 어느 날 언니를 따라 화실에 놀러 가게 됐는데, 좋은 음악을 틀어놓고 그림 그리는 광경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엄마에게 용돈을 달라 해서 받은 돈을 들고 조용히 화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주 2회 가는 곳을 매일 다녔다. “너 서울예고 가도 되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용기를 얻었다. “음악이 아니라 미술로 시험 봤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아빠는 기절초풍하셨다”는 게 작가 이혜민의 회상이다.

시부모 모시며 지하 창고에서 시작한 베개 작업


▎Reflections(2020), 붕대, 먹, 동양화물감, 163×135㎝
1992년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지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시부모님을 모시며 한집에서 살아야 했던 어린 며느리는 노곤해진 하루의 회포를 풀 곳을 지하실 창고에서 찾았다. 시어머니가 해온 오래된 이불과 요, 안 입는 옷들이 쌓여 있는 공간이었다.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나서, 그것들을 자르고 바느질해서 크고 작은 베개와 쿠션을 만들었어요. 버려진 물건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느낌? 힘들 때 눈물을 닦아주고 편하게 기댈 수 있는, 그렇게 삶에 위안이 되는 작품을 만든다는 보람? 그런 것들이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가게 했죠.”

아들이 네 살이 되자, 용감하고 씩씩하게, 둘만의 뉴욕 유학길에 올랐다. 그게 1999년이었다. 시어머니의 허락, 같이 못 가게 된 남편의 지원, 친정 부모님의 따뜻한 격려에도, 유학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오후 4시면 유치원에서 직접 아이를 픽업해야 했고, 아이를 재운 뒤에야 비로소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간 베개를 비롯해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로 활용해 밤에 일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탈진해 화장실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죠. 아들이 냉장고에서 꺼내준 스프라이트 덕분에 정신이 들었어요. 911을 불러 병원에 갔다가 입원하라는 걸 거절하고 링거를 꽂은 채 운전해서 돌아온 생각이 나네요.”

엄마는 강했고, 작가도 강했다. 그렇게 뉴욕대(NYU) 대학원을 졸업했고, 그의 작품 세계도 더 확장됐다. 자투리 천 조각으로 만든 쿠션에 이어, 쿠션 모양의 청동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움과 강인함, 따뜻함과 차가움, 헝겊과 금속의 대비이자 조화였다. 모순이자 반전이었다. 알록달록한 색동 쿠션을 수백 개 연결한 작품은 승천하는 용처럼 꿈틀대며 아트바젤 홍콩과 아트바젤 마이애미의 전시장을 역동적으로 채웠고, 전 세계 컬렉터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Reflections(2020), 붕대, 동양화물감, 아크릴물감, 120×120㎝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쓰고 버리는 석고붕대도 2004년부터 그의 작품 세계의 한 축을 받들며 맥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무리한 작업으로 팔에 잠시 마비가 왔을 때 감았던 석고붕대는 작가의 예술혼을 새롭게 자극했다. 낡은 석고붕대를 모아 물을 바르고 레이스처럼 다듬어냈다. 부드러운 천이 딱딱하게 변했다. 버리는 재료가 작품 소재가 됐다. 역시 모순과 반전의 미학이다.

“부드럽다고 약한 건 아니죠. 딱딱하다고 강한 것도 아니고요. 예쁘게 보이지만 사실은 날카롭고. 우리 삶도 그렇지 않나요? 버려진 천으로는 크고 웅장한 작품을 만들고, 비싸고 단단한 브론즈로는 작고 아담한 작품을 만들죠.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작업이 제겐 흥미롭습니다. 미술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거든요.”

그는 워싱턴 전시장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주었다. 당시 전시 제목이 ‘인비저블 씽즈(Invisible Things)’였는데, 한 시각장애인이 제목을 듣고 전시장을 찾아왔다고 했다. “작품을 만져보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잠시 고민하다 허락했는데, 나중에 사진과 함께 “덕분에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는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고.

첫 페인팅 전시… 패널에 붕대 둘둘 감고 켜켜이 색칠


▎White Dream(2019), 붕대, 1 50×150㎝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직전인 올 1월, 그는 인도를 다녀왔다. 암흑 속에서 바라본 별무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는 줄도 처음 알았다. 장례를 치른 강에서 그 물을 마시며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의 모습도 충격이었다.

“죽음 속에서 찾아낸 희망이랄까요. 죽음과 삶, 행복과 슬픔이 서로 반사되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이번 전시의 제목을 ‘리플렉션즈’라고 한 까닭입니다. 코로나19로 외출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조각할 재료를 구하기 힘들었던 데다, 오랜만에 평면 작업을 선보이고 싶었거든요. 제가 조각가 이전에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제 조각에 색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요. 사실 그림은 지금도 매일매일 새벽까지 그리고 있었는데, 그동안 보여드릴 기회가 거의 없었죠.”


▎Metamorphosis(2020), 폴리코트, 35× 25×25㎝
그의 그림은 캔버스에 붓으로 쓱쓱 그린 것이 아니다. 딱딱한 패널에 붕대를 둘둘 감고, 그 위에 색을 칠하고, 손으로 문대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물방울이 남아 있을 때 패널을 흔들어 우연적인 요소도 가미한다.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켜켜이 쌓아간다.

“새 회화 작업은 패널에 조각을 ‘넣는’ 작업이에요. 조각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죠. 붕대 위에 석고를 쌓고, 긁어내고, 칠하고, 말리고… 끝이 없는 과정이죠. 지금은 불확실성의 시대잖아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런 코로나 시대에 작가로서 무슨 역할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그냥 기본에 충실해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뭐가 중요하고 뭐가 안 중요한지 알게 되는 시기니까, 내 안에 담긴 것을 세상에 진솔하게 투영해보자.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심사숙고한 모습을 보여드리자.”


▎작업실에서.
마리아 칼라스와 요나스 카우프만의 CD 케이스가 쌓여 있는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전시장으로 갈 작품들이, 마치 무장을 완료하고 싸움터에 나가기 직전의 장수처럼, 긴장감 속에 서 있었다. 마티에르 효과가 느껴지는 평면 작업에선 마크 로스코와 김환기의 작품에서 묻어나오는 것과 같은 묵직한 독백이 배어 나왔다. 브론즈에 이어 폴리코트로 만들어 더욱 섬세한 디테일을 구현한 쿠션 시리즈도 이번에 연분홍과 연녹색으로 색상을 확장하며 넓어진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또 다른 걸 했구나” 하고 늘 격려해주는 친구들과 컬렉터들에게 가장 고마움을 느낀다는 작가는 내년 4월부터 뉴욕의 레지던시에서 넉 달 간의 작업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나이가 칠십 팔십 됐을 때, 미술관에서 회고전 하는 것이 꿈이에요. 유학 시절 백남준 선생님의 구겐하임 전시를 보러 갔는데 얼마나 자랑스럽고 또 부럽던지. 팔순쯤 되었을 때 살아 있든 죽었든 회고전을 하려면 드로잉부터 페인팅, 조각, 설치 작품을 지금부터 잘 정리해서 준비해놓아야겠죠.”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012호 (2020.11.2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