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 다리’, 즉 세체니 다리는 19세기 중반 유럽의 앞선 구조역학과 교량건설 기술을 보여주는 매우 운치 있는 현수교로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구조물로도 손꼽혔다. 이 다리가 개통됨으로써 부다와 페스트가 통합되는 미래가 성큼 다가왔고, 마침내 1873년에는 ‘부다페스트’라는 이름의 도시가 탄생했다.
▎겔레르트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부다페스트 풍경. 세체니 다리가 구심점을 이룬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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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우강은 부다페스트를 관통하며 흐른다. 도나우 강변을 따라 미끄러지듯 달리는 전차, 강에 떠다니는 하얀 배들은 도나우강 주변 풍경을 더욱 낭만적으로 보이게 한다. 특히 도나우강 주변의 야경은 보석처럼 아름다워서 부다페스트는 예로부터 ‘도나우강의 진주’로 불린다.
한편 도나우 강은 독일 남부에서 발원하여,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를 비롯 동유럽 여러 나라를 거쳐 흑해로 흘러가는 2850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강이다. 이 강을 고대 로마인들은 다누비우스(Danubius)이라고 불렀고 독일어권에서는 도나우(Donau), 영어권에서는 다뉴브(Danube), 헝가리에서는 두너(Duna)라고 한다.그런데 부다페스트는 원래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부다페스트는 도나우강 서쪽의 부다(Buda, 현지 발음은 ‘부더’)와 부다의 북쪽 오부다(Óbuda, 현지 발음은 ‘오부더’), 그리고 강의 동쪽 ‘페스트(Pest, 현지 발음은 ‘페슈트’)가 1873년에 통합되어 이루어진 도시로 헝가리 사람들은 ‘부더페슈트’라고 한다.
도나우강의 진주, 부다페스트
▎도나우강에서 본 부다페스트. 헝가리 의사당, 세체니 다리, 부다 왕궁, 멀리 겔레르트 언덕이 구심점을 이룬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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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강의 아름다움은 강변에 세워지는 건물들과 강 위에 세워지는 다리의 모양에 따라 결정된다. 부다페스트에서 도나우 강변 풍경의 구심점을 이루는 것은 페스트 지역의 헝가리 국회의사당, 부다 지역의 왕궁,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 세체니 다리이다. 그중에서 세체니 다리는 운치 있고 우아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주탑 두 개는 고대 로마의 개선문 같은 고전적인 형태이다. 또 주탑 사이에 놓인 교상(deck)의 길이는 202m, 케이블 길이는 380m로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긴 다리이자, 가장 앞선 현대식 다리로 꼽혔으며,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구조물로도 손꼽혔다. 그런데 이 다리의 역사는 마치 헝가리의 역사처럼 수난으로 점철되어 있다.세체니 다리는 1842년에 착공하여 1849년에 완공되었으니 개통된 지 170년이 조금 넘는다. 이 다리는 19세기 중반 유럽의 앞선 구조역학과 교량건설 기술을 보여주는 현수교이다. 현수교는 교각과 교각 사이를 케이블로 연결하여 사람이나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교상을 포물선으로 늘어진 케이블에 매다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다리는 현지에서는 간단히 ‘쇠사슬 다리’라고도 부른다. 이 다리 건설을 처음 구상하고 추진했던 인물은 헝가리 정치가 이슈트반 세체니(I. Széchenyi, 1791~1860) 백작이다. 당시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가 헝가리의 왕을 겸하고 있었다.한편 이 다리가 세워지기 전에는 도나우강을 건너려면 이곳에 설치한 부교를 건너가거나 배를 타고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부교는 봄부터 가을까지만 설치되었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배편으로만 건너가야 했다. 하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물이 불어나 배를 띄울 수 없을 때는 속수무책이었다. 1820년 12월 부다에 체류하던 세체니 백작은 도나우강 건너편 페스트에 건너가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1주일 이상 발이 묶여 있었다. 이런 불편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그는 도나우강 경제권과 부다와 페스트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라도 강의 양안을 잇는 교량 건설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과감하게 추진했던 것이다.
도나우강의 랜드마크, 세체니 다리
▎안개 낀 도나우 강변 산책로에서 본 세체니 다리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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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체니 백작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당시 산업혁명으로 앞서가던 영국의 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이리하여 영국의 토목 엔지니어 윌리엄 클라크(William T. Clark)가 설계를 맡았고 공사 현장감독은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엔지니어 아담 클라크(Adam Clark)가 맡았다. 두 사람은 성은 같지만 인척관계는 아니다.드디어 1842년에 초석이 놓였고 대망의 교량 건설공사가 진행됐다. 그런데 1848년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주국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항거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1849년 봄 헝가리 의회는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헝가리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던 오스트리아 군대는 헝가리를 침공하여 진압작전을 수행하면서 부다와 페스트의 혁명군이 서로 뭉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완공을 얼마 앞둔 이 다리를 폭파하려 했다. 공사 현장감독 아담 클라크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는 폭탄이 터져도 다리가 크게 손상을 입지 않도록 미리 조치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수세에 몰린 헝가리 혁명군이 오스트리아 군대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다리를 파괴하려 했다. 이에 아담 클라크는 다리의 교상 하나를 임시로 떼어 놓음으로써 혁명군의 요구를 충족해주었다. 그러니까 아담 클라크의 기지 넘치는 행동 덕분에 이 다리가 파괴되지 않았던 것이다.
부다 지역에 있는 세체니 다리 입구의 광장은 그를 기념하여 ‘아담 클라크 광장’이란 뜻으로 ‘클라르크 아담 테르(Clark Ádám tér)’라고 부른다. 즉, 헝가리 사람들은 설계자 윌리엄 클라크보다는 공사 현장감독 아담 클라크를 더 기억하는 것이다.
▎부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세체니 다리. 다리 입구 로터리가 있는 곳이 아담 클라크 광장이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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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체니 다리가 1849년 12월 20일에 개통되자 부다와 페스트가 물리적으로 통합되었고, 마침내 1873년에는 ‘부더페슈트’, 즉 ‘부다페스트’라는 이름의 통합된 도시가 탄생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난 1923년, 부다페스트 통합 50주년을 기념하여 헝가리의 작곡가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 1882~1967)는 [테너,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헝가리 시편’]이라는 웅장한 곡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곡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축제적인 기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어쩐지 암울한 분위기에 빠져들 것만 같다. 졸탄 코다이는 헝가리의 고통스러웠던 과거와 또 제1차 세계대전 후 암울했던 당시의 헝가리 상황과 앞으로 다가올 고통스런 미래를 마치 묵시록처럼 표현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헝가리가 공산화되어 20세기 후반까지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했던 것일까?이 다리는 개통 100주년을 앞두고 최악의 수난을 당했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1월, 헝가리에 주둔하던 독일군이 퇴각하면서 소련군의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도나우강 위에 놓인 다리란 다리는 모조리 폭파했던 것이다. 따라서 부다페스트는 물리적으로 다시 부다와 페스트로 갈라지고 말았다. 이 다리는 전쟁이 끝난 지 4년이 지난 1949년, 즉 개통 100주년이 되는 해에 복구되어 재개통됐다. 하지만 그때 헝가리는 공산주의 시대라는 또 다른 암울한 역사의 길로 접어든 다음이었다.
부다페스트 통합 50주년 기념 음악 '헝가리 시편'
▎세체니 다리 야경. 그 너머로 부다 왕궁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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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 다리가 개통된 지 140년이 되던 해, 즉 1989년에 있었던 격동의 역사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아담 클라크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화단은 공산당을 상징하는 커다란 붉은 별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헝가리는 공산국가 중에서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를 누리던 나라였다. 이러한 헝가리를 공산 치하의 동독 시민들은 가장 매력적인 여행지로 여겼다. 그런데 그해 여름 헝가리에 여행 왔던 동독 시민들이 자유의 나라 오스트리아와 공산국가 헝가리 사이에 쳐진 철조망을 넘어 탈출하기 시작하자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아예 개방해버렸다. 이에 따라 동유럽의 공산정권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고 세체니 다리에서는 수많은 부다페스트 시민이 운집하여 자유를 높이 외치며 공산주의 시대를 도나우 강물에 완전히 씻겨 떠내려가도록 했다. 이때 아담 클라크 광장의 붉은 별 장식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마침내 그해 10월 23일에는 자유민주주의의 헝가리 공화국이 탄생했다. 그러니까 세체니 다리는 헝가리를 새로운 미래로 연결한 다리이기도 했던 셈이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