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공연계는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2020년 공연계 총매출은 1732억원으로 전년(2405억원) 대비 30% 감소했다. 뮤지컬의 경우 하반기 매출(589억원)이 전년 하반기(1408억원)의 42%에 그쳤다. 지난해 12월 5일부터 두 칸 띄어 앉기가 시행되면서 매년 최고 성수기로 꼽히던 연말 공연 시즌을 사실상 셧다운 상태로 보냈기 때문이다. 공연계가 다 같이 겨울잠에 든 것 같지만, 꽁꽁 얼어붙은 수면 아래서도 부지런히 뛰는 사람이 있다. 지난해 [모차르트!] 10주년 기념공연으로 뮤지컬계 최초로 유료 온라인 공연에 성공하고, 웹뮤지컬 [킬러파티]로 코로나19 시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뮤지컬 플랫폼을 개척한 EMK뮤지컬컴퍼니 김지원 부대표다.
▎김지원 부대표는 코로나시대에 뮤지컬 최초의 유료 스트리밍 성공, 새로운 플랫폼의 웹뮤지컬 개척 등 공연 영상화 사업에 앞장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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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K뮤지컬컴퍼니는 ‘뮤지컬계 이단아’로 통하는 엄홍현 대표와 김지원 부대표가 2009년 설립한 업계 후발 주자다. 하지만 틈새시장을 개척한 유럽 뮤지컬 라이선스 공연과 유명 해외 창작진을 기용한 대형 창작 뮤지컬의 성공으로 업계를 견인하는 위치에 우뚝 섰다. 지난해만 해도 전체 공연계 총 유료예매 순위에서 1위 [모차르트!], 4위 [레베카], 5위 [웃는 남자] 등 5위 안에 EMK의 작품이 3개나 랭크됐다.김지원 부대표는 명함 3개를 건넸다. 해외 사업을 담당하는 EMK인터내셔널 대표와 소속 아티스트를 관리하는 EMK엔터테인먼트 대표까지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에게도 코로나19로 인한 충격이 작지 않았다. 최근 몇 년 새 [마타하리], [웃는 남자], [엑스칼리버] 등 대규모 오리지널 작품을 쏟아내며 해외 창작진과의 교류 및 브로드웨이 진출까지 적극적으로 타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8~19년에 출장을 50번이나 나갔어요. 브로드웨이 본격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2년 동안 뿌린 씨가 싹틔울 시기에 멈추게 된 거죠. 브로드웨이 관광객 시장이 회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아쉽지만 차분하게 사업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됐죠. 해외 배급보다 한국에서 만드는 창작에 좀 더 집중하려고요.”EMK의 뮤지컬은 연출가 로버트 요한슨을 비롯해 외국 창작진과의 협업이 많았던 만큼, 기존 레퍼토리를 공연하는 데도 변화가 필요했다. “항상 외국 창작진이 들어왔었죠. 10년 넘게 같이한 미국인 상임연출가도 있었는데, 전에도 그동안 잘 키운 협력연출에게 물려줘도 되겠다는 얘길 했었어요. 이번에 불가항력적으로 못 들어오게 되니, 그게 지금이 된 거죠. 지난해 완벽하게 한국 스태프만으로 운영했는데, 실력을 검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어요. 올해 라인업도 전부 해외 스태프 입국 없이 운영할 계획이에요. 그런 부분은 의외의 긍정적인 결과였죠.”지난해 EMK가 최초로 시도한 온라인 유료 공연도 반응이 좋았다. [모차르트!]의 10주년 기념공연 실황 영상과 [몬테크리스토]의 드레스 리허설 영상은 각각 1만5000명, 1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모차르트!]는 일본에서도 첫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도해 한국보다 접속자가 많았다고. “일본은 관객 연령층이 우리보다 10살 이상 많은데도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한국에 못 오게 되니 아예 호텔을 잡아 2박 3일 동안 한국 음식 먹고, 한국 여행 온 기분을 느끼면서 스트리밍을 봤다는 팬들도 있어요. 한국에 오려면 100만원은 드는데, 1만 엔으로 트리플 캐스팅을 다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는 반응도 있었죠. 다만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 접근 자체가 공연 팬에게 낯선 문화라, 그걸 해결하는 게 과제긴 하더군요.”EMK가 공연 영상화 사업에 앞장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오리지널 작품을 해외에 알리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다. 2015년 첫 오리지널 [마타하리]를 만들면서부터 이미 좋은 영상에 대한 고민을 해온 것이다. “우리 작품을 알려야 하는데, 해외 관계자들을 일일이 불러오는 건 한계가 있으니 영상을 잘 찍어 보여주고 있었던 거죠. 이번에 코로나19 때문에 갑자기 ‘브로드웨이 온디맨드’ 플랫폼이 생기고 라이브러리 첫 작품으로 [엑스칼리버]를 스트리밍하게 되면서 어쨌든 우리 목적을 이루었어요. 그걸 본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이 다들 한국 뮤지컬 수준에 놀랐다는데, 영상이 아니라면 그런 대규모 작품을 어떻게 끌고 가서 보여줬겠어요. 최근 한국 이미지가 급상승하는 가운데 [엑스칼리버]도 여러모로 긍정적이었어요.”
뮤지컬 첫 유료 스트리밍에 1만5000명 접속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일본 토호 원작이지만 EMK가 일부 저작권을 인정받았다. /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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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 뮤지컬계에서 영상화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금력 있는 대형 제작사들이 라이선스 작품 위주로 공연을 올리기 때문이다. “라이선스 IP로는 부가사업을 활발히 할 수 없으니까요. 오리지널 IP를 가진 건 대학로 소극장들인데 여건상 비즈니스가 쉽지 않죠.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리지널 IP도 있고 콘텐트의 힘과 팬덤도 있어서 유리한 조건이었어요. 영상화에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잘 만든 여행지 영상을 보면 가고 싶어지잖아요. 못 갈 형편이면 대리만족이 되고, 갈 여건이 되면 원동력이 되는 게 영상이죠. 공연 영상도 그 역할에 충실하도록 잘 만들려는 겁니다.”사실 EMK도 레퍼토리 상당수가 라이선스 작품이다. 하지만 모든 작품을 재창작에 가깝게 업그레이드해 거꾸로 원작자로부터 일부 저작권을 인정받는 등, 산업적으로 유례없는 행보를 보여왔다. 일본 제작사 토호 원작의 [마리 앙투와네트]가 대표적이다. 일본 영화관에서 2회 상영 예정이었던 EMK 버전 영상이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총 34회 상영했고, 그 기운에 탄력을 받은 토호가 2002년 초연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재공연을 올린 것이다.“2018년 우리 연출인 로버트 요한슨이 건너가 EMK 버전으로 재연을 올렸어요. 원작과 우리 버전은 70%가 다르거든요. 우리가 저작권 일부분을 인정받아 일본 공연 때나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 공연에서도 일부 로열티를 받았죠. 사실 라이선스란 게 아무리 각색을 해도 모든 권한이 원작자에게 귀속되는 게 일반적인 패턴인데, 제가 토호를 오래 설득했어요. 1월 중에 일본에서 3연이 올라가는데, 요한슨 연출이 원격으로 연출을 하고 있죠. 70살 가까운 요한슨 연출이 코로나19 때문에 심란한데 매일 그렇게 작업하면서 살맛이 난다고 하시더군요.(웃음)”지금 공연 중인 [몬테크리스토]도 특이한 형태다. 스위스에서 수입한 작품이지만 한국 재창작 버전이 가장 평가가 높자, 아예 IP를 사들여 이제는 ‘EMK 오리지널’이 됐다. “중국에서 우리 버전으로 꼭 제작하고 싶다고 해서 자극을 받았어요. 전 세계에서 한국을 주목하고 있으니 우리가 콘텐트를 성장시키겠다고 스위스 상트갈렌 시어터를 1년 동안 설득했죠. 이제 우리 오리지널이 됐는데, 유례없는 일이라 그런지 아직 한국에선 이해가 부족하더군요. 정부에서 영상화를 지원한다고 해서 [몬테크리스토] 영상으로 세계로 나가겠다고 하니 ‘창작’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세계적인 브랜드를 우리가 인수한 것인데도 ‘창작’이라는 감성적인 기준에 묶여 사각지대에 놓여야 하는 현실이 별로 세련되지 못한 것 같아요.”코로나 시대 맞춤형 콘텐트로 주목받은 웹뮤지컬 [킬러파티]도 혁신적이었다. 브로드웨이 창작진과 함께 아이디어를 내 미국과 한국에서 각각 제작한 미스터리 살인사건 소재의 ‘병맛코미디’로, 배우 10명이 한 번도 만나지 않고 각자의 공간에서 촬영한 영상을 편집했다. 무대 배우들을 영상 플랫폼에 데뷔시킨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브로드웨이는 계속 셧다운이라 실력 좋은 배우들이 다 떠나고 있거든요. 미국판에는 [알라딘], [해밀턴], [신데렐라], [맘마미아]에서 주연을 맡은 최고 배우들이 다 나오죠. 2월에 극장판을 개봉하면 콘텐트의 다양성과 확장성이 확인될 거예요. 처음 시도라 제작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면서 시작했지만 기발한 콘셉트에 좋은 반응을 얻었어요, 여러 가지 형태로 기획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어서, 앞으로 무궁무진한 시도가 가능할 것 같아요.”사실 EMK는 엄홍현 대표의 ‘시골 청년 성공 스토리’로 유명하다. 하지만 회사명을 두 사람의 이니셜에서 따왔을 정도로 김지원 부대표의 존재감이 작지 않다. 유명 호텔에서 세일즈 마케팅을 하던 서른 살에 이벤트 사업을 하던 엄 대표와 3개월짜리 프로젝트로 만난 게 인연의 시작이다. 소문난 워커홀릭이었던 그에게 반한 엄 대표가 “얼마면 되겠냐”고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자기가 만난 사람 중에 제가 일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서, 월급을 훨씬 더 많이 주겠다는 거예요. 웃어넘겼지만, 결국 동업을 하게 됐죠. 마음 맞는 4명이 청년 창업처럼 모여서 각자 본인이 하고 싶은 일로 시너지를 내자고 했는데, 마침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었거든요.”그가 하고 싶은 일은 여행 컨설팅 사업이었다. 20대 시절 모 대기업 회장의 여행비서로 일하며 100명에 달하는 일행의 109박 110일 해외여행 일정을 도맡아 관리하던 노하우를 살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일을 하면서 일머리는 다 배웠어요. 울기도 진짜 많이 울었죠. 인터넷도 잘 안 되던 시절에 혼자 세계 곳곳을 미리 답사하며 숙소부터 그 지역 전반 시설까지 다 체크해야 했거든요. 가족들 성향까지 파악해서 완벽하게 편안한 여행을 인솔하고 나니 각종 그룹 비서실에서 연락이 오더군요.(웃음) 저는 기존에 누가 한 일을 똑같이 한 적이 없어요. 일에 대한 선입견이 없어선지, 어딜 가도 아예 없던 신사업만 벌였죠. 지금도 남들 패턴을 따라가지 않아요. 새로운 일도 돌아보면 다 하면 되는 일이었어요. 남이 안 해서 그런 거죠.”
“잘 찍은 영상은 공연 보게 하는 원동력”
▎뮤지컬 [몬테크리스토]는 EMK가 스위스에서 IP를 사들여 세계적인 콘텐트로 성장시키고 있다. / 사진:EMK뮤지컬컴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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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입견 없이 시작한 공연 사업은 쉽지 않았다. 무작정 돈만 끌어와 만든 첫 작품 [드라큘라]는 쓰라린 실패 경험을 줬다. “여행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엄 대표가 큰 공연 사업을 들고 온 거예요. 우선 이것부터 돕자고 동업자 4명이 다 같이 뛰어들었는데, 호기롭게 들어왔다 된통 당했죠. 실패하고 나니 모든 법적 문제가 사업자 대표였던 저를 향했는데, 엄 대표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더군요. 그 리더십에 반해서 18년째 함께하고 있어요. 실패를 돌아보니 자금 구하러 다니느라 작품을 제대로 만드는 사람이 없었더군요. 그래서 대외적인 부분은 엄 대표가, 실무는 제가 맡기로 하고 다시 시작한 거죠.”뮤지컬에 애정이 생긴 것도 실패하고부터다. “이렇게 실패하고 끝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작정하고 만든 [모차르트!]와 [몬테크리스토]가 큰 사랑을 받자 “신이 나서 미친 듯이” 일하다 한 달간 병원신세를 졌을 정도다. 코로나19로 힘든 지금은 새삼 그 애정을 확인하게 됐다고. “좌석 띄어 앉기를 하다가 [몬테크리스토] 오픈 첫 주에 잠시 전석 오픈이 가능했거든요. 그때 오랜만에 객석을 꽉 채워 공연을 했는데, 소름이 돋고 눈물이 나더군요. 그때도 박수만 칠 수 있었는데, 관객이 내뿜는 에너지가 환호성으로 환청이 들릴 정도였죠. 배우도, 스태프도, 한 번의 무대라도 열면 맨발로 뛰어가겠다고 할 정도로 무대의 소중함을 알아버렸어요. 이 가치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요. 제가 영상화에 앞장섰지만, 공연의 본질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앞으로도 라이브의 가치는 더 단단하게 살아남을 겁니다.”
※ 유주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휩쓸던 영광의 기억을 품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살아왔다. 2010년부터 중앙SUNDAY에서 공연을 중심으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을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전달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