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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상수경영(上手經營)’(2) 

가혹하게 처벌하면 OO 안 한다 

국가건 기업이건 어떤 임무에 실패했다고 해서 가혹하게 책임을 묻는 곳은 앞날이 밝다고 할 수 없다. 실패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조직에서는 조직원들이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저 현상 유지를 바랄 뿐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를 모아봤다.

▎칸나에 전투를 그린 [파울루스의 죽음], 존 트럼벌, 1773, 예일대 아트갤러리 소장. / 사진:위키피디아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는 기원전 216년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중남부 이탈리아 칸나에 평원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칸나에는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반도에서 뒷굽 위에 박차처럼 튀어나온 부분에 위치한다.

이 싸움은 성공적인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 전형으로 오늘날까지 세계 각국의 모든 사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 유명한 역사적 격전에서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5만 병력으로 8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을 완벽하게 포위해 궤멸했다.

일반적으로 포위 작전은 최소 세 배 이상의 병력을 가졌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더 적은 병력으로 더 많은 병력을 포위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니발의 기세가 워낙 강하기도 했지만, 로마의 정공법에 맞선 한니발의 변칙 전술이 한 발 앞선 것이었다.

칸나에 전투 당시 로마군 사령관은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였다. 그는 병력의 우세를 믿고 로마군의 주력인 중장보병을 사각 밀집 대형으로 평원 중앙에 배치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이에 반해 한니발은 경보병으로 구성된 주력부대로 정면에서 치고 빠지는 유인전을 펼쳐 적을 진영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러고는 수적으로 우세한 기병을 이용해 로마군 양 측면의 기병을 기습 공격했다. 이 당시의 전투 대형은 주력인 보병 양 측면을 기병이 보호하는 형식으로 로마군이나 카르타고군이나 같았다.

카르타고는 로마군 병력의 2배에 달하는 좌익 기병으로 로마군 우익 기병을 공격해 이내 분쇄했다. 이어 뒤로 크게 돌아 대등한 병력으로 접전을 벌이고 있던 우익 기병과 합세해 로마군 좌익 기병을 부수었다. 양 측면이 무너지면서 로마군 중장보병은 더는 무적이 아니었다.

좌우익 기병과 정면 보병으로 로마군을 포위한 카르타고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합지졸로 변해버린 로마 대군을 마음껏 유린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7만 명이 전사했고 숙영지 보호를 위해 남겨뒀던 예비 병력 1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사령관인 바로는 호위병 몇 명과 함께 가까스로 달아날 수 있었다.

반면 카르타고군은 병력 6000명을 잃었을 뿐이었다. 로마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대부분 고대국가에서 그 정도 참패를 당한 장수가 병사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면 참수를 면치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로마는 달랐다. 행여 떨어질까 목을 움켜쥐고 도망 온 총사령관을 원로원 의원들이 달려나가 영접했다. 눈여겨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로마에서는 전쟁에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맥경화적 조직은 오래 못 버텨

칸나에 전투처럼 지휘자의 책임이 큰 작전 실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니발의 명성이 워낙 컸던 탓도 있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로마인들은 패전의 멍에만으로도 패장에게는 평생 따라다닐 불명예로 충분한 벌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마에서는 전쟁에 나가는 것 자체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고귀한 신분의 자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지휘관을 원로원에서 선출했기 때문에 책임이 공동체 전체로 돌아갔지, 패전한 지휘관 한 사람만 희생양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패전한 장수를 처벌하기보다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다시 전쟁터에 보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쪽을 택했다. 그것이 로마의 힘이기도 했다.

국가건 기업이건 크건 작건 모든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임무에 실패했다고 해서 가혹하게 책임을 묻는 조직은 앞날이 밝다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유능하고 최선을 다했더라도 하는 일마다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실패가 없다고 해서 반드시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전이 없으면 실패도 없다. 미국의 영화감독 우디 앨런이 말했듯이 “가끔 실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이하게 산다는 증거”인 것이다. 실패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조직에서는 조직원들이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저 현상 유지를 바랄 뿐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지 않는다. 창발성이 발휘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 동맥경화적 조직은 오래 버틸 수가 없다. 별다른 실패 없이도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합리적인 조직이라면 조직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 수 있도록 장려할 것이다. 그러다 실패하더라도 질책하는 대신 격려한다. 실패란 그만큼 대가를 치른 교훈이다.

나폴레옹도 “영웅에겐 성공보다 실패가 많다”고 했다.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조직이 공유함으로써 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실패는 값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실패 경력이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기업도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도 『미래로 가는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패한 기업에 몸담은 경력이 있는 간부들을 의도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실패할 때는 창조성이 자극되게 마련이다. 밤낮없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을 주위에 두고 싶다.”

빌 게이츠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스스로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는 1981년 이렇게 외쳤다. “640kb이면 모든 것을 다 하기에 충분한 메모리 용량이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 한 장의 용량이 흔히 640kb의 열 배 이상 되는 현실에서는 웃음밖에 나올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런 상상력의 빈곤(지금 생각하면 빈곤이지만, 1.4mb 용량의 3.5인치 플로피디스크가 처음 나온 게 1982년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이라 할 수 있다)이 사고의 지평을 훨씬 넓혔을 게 분명하다.

이 같은 실수는 한 번 창피하고 말 뿐이었지만, 빌 게이츠도 크게 낭패를 겪은 실패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 진출 실패였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MS)는 1992년 중국에 진출했다. 당시 중국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지식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물질적인 형태를 지니지 않은 소프트웨어는 만드는 데 돈이 안드니 당연히 공짜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시장점유율은 높았지만 매출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절망적 상황에 마주치게 됐다. MS는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해 불법복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기업들을 고소했으나 중국 법원에서 번번이 패소하고 말았다.

중국에서의 빌 게이츠 실패

참다 못한 게이츠는 1998년 포춘지 인터뷰에서 중국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중국 소비자들은 돈을 주고 운영 프로그램을 사려 하지 않고 훔치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훔치더라도 MS 것을 훔쳤으면 한다”며 중국 시장을 잃고 싶지 않은 속내를 내비쳤다.

하지만 그의 말은 중국 소비자들을 자극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중국인들은 “안하무인인 MS는 중국에서 물러가라”고 외쳤다. 중국 소비자들의 가장 큰 불만은 MS가 중국인들의 소득을 고려하지 않고 프로그램을 지나치게 비싸게 판다는 것이었다. 당시 MS는 ‘전 세계 동일 가격’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중국에서도 고가 전략을 펼쳤다.

하지만 성과가 없자 MS는 중국 사업 책임자들을 계속 교체했다. MS 중국법인은 유능한 경영자들의 무덤으로 인식됐다. 책임자들이 평균 2년을 버티지 못하고 경쟁사로 이직했다.

2001년 MS는 드디어 중국에 새로운 정책을 도입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허용하지 않는 저가 정책이었다. 당시 윈도우와 오피스 패키지의 불법복제품 판매가격이 2달러였는데, 학생용 윈도우와 오피스 패키지 정품을 복제품과 거의 비슷한 3달러에 판매한 것이다.

또 학교와 기관들에 PC와 소프트웨어를 무상 공급하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중국의 IT 인력을 양성하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게다가 복제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복제 시장에서조차 점유율을 높이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 불법복제에 좀 더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MS의 중국 시장 점유율이 90%까지 치솟았다. 그럼에도 MS가 현재 중국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매출은 전 세계 매출의 2%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MS에 대한 중국 소비자들의 호감도는 다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에서 구글 검색엔진은 사용이 제한되고 있지만, MS의 검색엔진인 빙(Bing)은 사용이 가능하다. 좀 더 먼 미래를 보고 투자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실패에서 배운 게 없었다면 그나마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먼지만 날리며 중국에서 철수해야 했을 것이다.

실패를 대하는 데 극명하게 다른 두 가지 태도가 있다. 요즘 각광받고 있는 인공지능(AI) 알고리즘에 관한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재범 가능성을 예측하는 사법부의 AI 알고리즘이 인종에 따라 재범률을 과대 또는 과소 예측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또 지난해 영국에서는 한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A레벨 시험 성적을 산출하는 AI 알고리즘이 교육 환경이 좋은 학생들에게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 법원은 판사가 재판 과정에서 전적으로 인공지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기술의 사용을 인정했다. 반면 영국에서는 해당 알고리즘을 사용해 성적을 산출하는 방법을 폐기했다. 한쪽이 100% 옳고 다른 쪽은 100%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기껏 개발한 알고리즘을 버리는 것보다는 개선하고 보완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런 사고가 로마에서는 상식이었다. 1차 포에니 전쟁 때인 기원전 255년 카르타고 앞바다에서 펼쳐진 해전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항해 도중 태풍이 몰아쳤다.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면 절대 피해야 할 것이 육지에 접근하는 것이다. 자칫 암초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해 경험이 풍부하지 못했던 로마 지휘관들은 겁에 질려 해안선 쪽으로 키를 돌렸다. 고대 지중해 사상 최대의 비극이 일어났다. 배들이 암초에 부딪혀 230척 중 80척만 폭풍 속에서 살아남았고 병사 6만 명이 수장됐다. 전쟁에서 이기고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대부분 병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지휘관들은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이듬해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재개되자 또다시 지휘관으로 출전했다. 그들은 실패 경험을 딛고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중에 3차 포에니 전쟁에서 25세 나이로 백전노장 한니발을 꺾고 117년에 걸친 전쟁의 대미를 승리로 장식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푸불리우스 스키피오)의 할아버지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도 있었다.

잔잔한 바다에선 훌륭한 선장 안 나와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해난 사고의 책임은 없지만 로마 최초의 해군을 지휘해 출정했다가 판단 미숙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사들과 함께 카르타고의 포로로 잡혔던 인물이다. 로마는 스키피오에게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는 보기 좋게 명예 회복을 한 것이다.

만약 할아버지가 한 번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처벌받는 모습을 보았다면 손자 스키피오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니발과 맞붙을 용기를 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손자 스키피오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운명을 건 일전을 위해 카르타고 남서부 자마로 진격했다. 이른바 ‘자마 회전(Battle of Zama)’가 벌어질 참이었다.

스키피오는 칸나에 전투의 실패 원인을 살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병의 약세였다. 칸나에 전투 당시에는 로마군 병력이 절대적으로 많았지만 이번에는 로마군 3만7000명, 카르타고군 4만2000명으로 로마군이 열세였다. 병력이 열세일 때는 기병의 중요성이 훨씬 커지게 마련이다.

스키피오는 역사적으로 카르타고와 가까웠던 누미디아를 로마 편으로 끌어들였다. 오늘날 알제리와 대체로 일치하는 누미디아의 경기병들은 시오노 나나미가 ‘지중해 최강의 기병’으로 묘사한 강력한 존재였다(카르타고는 오늘날의 알제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튀니지와 지역적으로 일치한다). 이런 기병이 로마와 손잡은 것은 카르타고엔 엄청난 타격이었다. 누미디아 병력이 로마 편에 섬으로써 전체 병력에서 로마가 열세였지만 기병에서는 6600명 대 4000명으로 절대 우위를 보였다.

스키피오의 로마군에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는 나중에 로마군의 상징이 된 양날 단검 글라디우스(Gladius)였다. 로마 보병의 중심 전술은 적과 맞붙는 근접전인데 과거에는 장검을 사용했기 때문에 밀집대형에서 칼을 휘두르기 불편했다. 그러나 짧은 글라디우스를 사용하면 밀집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도 충분히 효율적인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이는 로마군의 장방형 방패 스쿠텀(Scutum)과 육박전에 돌입하기 전에 적에게 투척하는 창 필룸(Pilum)과 짝을 이뤄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개발해 한니발이 완성한 기동·포위 전술을 카르타고군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스키피오의 로마군은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꺾고 지중해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정예병 1만5000명을 포함해 2만 명이 넘었고 2만 명은 포로로 잡혔다. 반면 로마군의 피해는 4000명을 넘지 않았다. 칸나에 전투의 실패가 없었다면 자마 회전의 성공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며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 조직은 그만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훌륭한 선장이 나올 수 없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2104호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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