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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26) 종이와 불의 작가, 김민정 

한지를 자르고 태우고 붙이며 명상을 합니다 

번득이는 영감을 낚아채 휘리릭 표현하는 개념미술이 현대미술의 대세라고는 하지만, 끊임없는 ‘노동’으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한 땀 한 땀 치열하게 구축해나가는 작가도 적지 않다.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김민정(59)이 그렇다. 그가 한지를 이리저리 접고 잘라내고, 색을 칠하고, 촛불이나 향불로 가장자리를 태우고, 차곡차곡 붙이는 일련의 작업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고통을 호소할 법하건만, 작가는 자신의 내면과 오롯이 만날 수 있는 명상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3월 28일까지 열리고 있는 ‘김민정-Timeless’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들은 작가의 그 지난한 수고로움에 우선 놀라고, 이윽고 작품에 배어 있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The Room’(2019) 앞에 선 김민정 작가. 가느다란 선들은 모두 한지 가장자리를 태운 흔적들이다. / 사진:갤러리 현대
소녀의 놀이터는 아버지의 작은 인쇄소였다. 잘리고 버려진 종이를 갖고 놀며 그 얇고도 강인한 질감을 손에 익혔다. 사생 대회에 나갈 때마다 상을 받아 오는 딸이 대견했던 어머니는 서예와 수채화는 물론 피아노까지 가르쳤다. 홍익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며 분채를 활용한 채색화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처녀는 큰물에서 놀면서 유명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대학원을 마친 그의 선택은 이탈리아였다. “당시 제 친구들은 대부분 뉴욕으로 갔어요. 하지만 저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가 좋았고, 르네상스의 발상지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이탈리아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부심을 느껴요.”

1992년 부푼 꿈을 안고 밀라노의 브레라국립미술원에 입학했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사진과 영상, 퍼포먼스 작업에 관심이 쏠려 있었고, 서예와 수채화, 구상회화 경력이 전부인 그가 발 디딜 틈은 없어 보였다.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대담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소외된 느낌이 들었고,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 이 학교와 커리큘럼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자신감을 잃고 있었죠. 이렇게 멀리 떠나왔는데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어 무척 우울했어요. 그때 마우리지오 보타렐리 교수를 만났죠.”

교수는 그에게 “봄을 추상적으로 표현해보라”, “수채 물감 자국을 활용해보라”, “좀 더 자유로워져라”는 등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붓과 먹, 수채 물감과 화선지는 새로운 길을 찾았고, 그를 동양과 서양이 혼재하는 새로운 추상회화의 세계로 이끌었다.

한지는 내 피부와도 같은 재료


▎‘The Street’(2020)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70×130㎝
한지는 천년을 간다고 한다. 한지 만드는 과정을 한 번 보면, 저런 정성을 들이니까 그리도 오랜 생명력을 갖게 됐구나 하고 절로 느끼게 된다. 그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질긴 생명력도 거기서 기인할 것이다. 전통 한옥의 바닥이나 창문 같은 우리 삶 구석구석에까지 쓰여온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백 년간 종이를 만져온 작가에게 한지는 각별한 의미다. “투명할 정도로 얇고, 연약하고, 쉽게 손상될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강한” 이 재료에 대해 “내 피부와도 같은, 너무나 편한 재료”라고 말한다. 작가에게 재료의 친밀도는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재료가 작가에게 익숙하지 않으면 자기 생각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Mountain’(2021) Ink on mulberry Hanji paper, 136×173.5㎝
“종이가 먹을 빨아들이는 흡수성이나 공기가 건조할 때 뿜어내는 성질은 곧 종이가 살아 있다는 뜻이죠. 피부가 숨쉬는 것과 같습니다. 물리적으로 태우거나 구멍을 뚫지 않는 한 한지는 몇 천 년을 갈 수 있는 질긴 재료이고, 약하지만 끈질긴 습성은 저와도 잘 맞지요. 그래서 인사동에서 한지를 고르거나 살 때 가장 행복합니다. 제게 종이는 섬김의 대상이거든요.”

“종이 위에 그리기만 하는 것이 지루했다”는 그는 항상 찾던 자연의 선(線)을 만드는 방법을 “2000년대 초 의도치 않게 ‘발명’했다”고 말한다. 가늘게 잘라낸 한지의 끝을 촛불에 댄다. 불이 붙으면 곧바로 손으로 눌러 끈다. 살짝 탄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진갈색 그을음이 생긴다. 바로 불이 만들어낸 ‘자연의 선’이다.


▎전시장 모습.
원하는 만큼만 태우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야 한다. 더 정교한 선이 필요할 때는 초 대신 향을 켠다. 그렇게 한지를 태우고 손으로 끄는 작업은 무수히 반복된다. 지문이 다 없어졌을 정도다. “한지가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는 몇천 년 걸리는데, 종이를 태우는 일은 그 시간을 축약하는 것이며 사라지기 직전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한지 조각을 일정한 간격으로 하나하나 세심하게 붙인다. 직접 쑨 전분 풀은 아주 얇게 발리기에 얇은 한지 조각을 붙이기에 제격이다. 먹이나 색을 머금은 한지는 어느새 산맥을 이루고 물결을 만들며 빽빽한 지우산이 되기도 한다.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은 작품마다 다른데 보통 2주에서 4주가량 걸린다고 한다.

“작업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생각이 사라집니다. 시간의 흐름도, 마음속 번뇌도 잊게 되죠. 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능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놀라운 우주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자신을 잃게 되면 저 자신보다 더 거대한 어떤 것에 더 가까워지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나를 잃어버려야 우주의 섭리 이해


▎‘Pieno di Vuoto’(2020)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45×200㎝
이번 전시에는 총 30점이 나왔다. 대부분 지난해 만든 작품이다. 작가는 “코로나 덕분에 시간이 많아졌다”며 웃었다. 전시장 1층에 가면 길이 2m짜리 대작 ‘Pieno di Vuoto’가 관람객을 맞는다. ‘비움과 채움’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형형색색의 꽃들로 가득한 정원을 위에서 내려다본 느낌인데, 원 모양의 종이 가운데를 뚫어 도넛처럼 ‘비워진’ 한지 조각을 화면에 가득 ‘채워 넣었’다. 비움으로 가득 찬, 비움의 채움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다. 작가는 “이 세상이 색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색은 그 자체로 텅 빈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기도 한 ‘Timeless’는 먹과 색의 농담 차이를 통해 내면의 깊이를 점층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깊은 바다의 단면을 담담하게 잘라낸 듯한 ‘Timeless’에 비해 ‘The Water’는 훨씬 역동적이다. 굽이치는 계곡물의 힘찬 기세가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Nautilus’는 살아 있는 화석인 앵무조개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 황금 비율에 맞춰 중심에서 방사형으로 뻗쳐 나오며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누르스름한 한지 조각의 치밀한 층위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2층으로 올라가면 ‘Pieno di Vuoto’의 담백한 버전인 듯한 ‘The Street’를 비롯해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Mountain’과 ‘Story’가 눈길을 붙든다. 엷은 물감을 수십 번 겹쳐 놓은 ‘Mountain’은 원래 바다를 그리려다가 사람들이 산처럼 보인다고 해서 제목을 바꿨다. ‘Story’는 책이 가득 꽂혀 있는 도서관 책장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Timeless’(2020) Watercolor and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80×136㎝
“지하 전시장에는 우연과 계획, 충동과 질서, 잘린 것과 남은 것 같은 서로 상충하는 에너지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작품을 모았다”는 것이 김재석 갤러리 현대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공간감을 부각한 ‘The Room’, 입체성을 강조한 ‘Sculpture’가 대표적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하는 ‘Couple’은 잘라낸 한지 조각과 자르고 남은 조각을 합쳐서 만들었다. ‘제로 웨이스트’를 강조하는 최근의 환경 이슈와도 맥락이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느 날 버려지는 종이에 눈길이 갔어요. ‘모두 같은 종이에서 왔는데 왜 동그라미는 선택되고 나머지 부분은 버려져야 하는가.’ 그래서 저는 남겨진 조각들에 애정을 부여하고 서로 짝이 되는 두 개의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현재 프랑스 생폴드방스에서 주로 작업을 하고 일 년에 한두 달은 뉴욕에 가서 지낸다. 그의 작품은 2017년 대영박물관에 소장됐다. 2018년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 2019년 독일 노이스 랑겐 파운데이션, 2020년 미국 뉴욕 힐 아트파운데이션에서 연속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세계적인 출판사 파이돈은 최근 펴낸 미술 전문서 『비타민 D3: 오늘의 동시대 드로잉 베스트』에서 김민정을 한국 대표 작가로 소개했다.


▎작품 제작 중인 김민정 작가.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2104호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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