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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상수경영(上手經營)’(5) 

이길 수 없으면 친구로 만들어라 

경쟁에 뛰어들 때는 먼저 자신을 냉철히 돌아봐야 한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와 경쟁을 벌이는 건 수레 앞에 선 사마귀나 다를 게 없다.

▎ 사진:이정권 기자
16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로버트 그린은 글을 써서 생활을 영위한 ‘최초의 전업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다. 소설과 희곡 등 꽤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셰익스피어를 향해 늘어놓은 그의 험담이었다. 그는 일련의 자전적 팸플릿에서 자기보다 네 살 어린 나이에 연극 배우이자 극작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셰익스피어에게 사정 없는 비판을 가했다.

“우리의 깃털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벼락 출세를 한 까마귀가 있다. 배우라는 껍데기 속에 숨긴 호랑이 심장으로 무장한 이 친구는 그대들(동료 작가들)만큼이나 무운시(無韻詩)를 멋지게 쏟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데다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어서 이 나라에서 연극 무대를 뒤흔들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식으로 우쭐대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대학도 안 나온 주제에 품격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비평으로서의 가치보다는 셰익스피어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를 유추하는 자료로 더 많이 인용된다. 그린이 알면 참으로 치욕스러울 일이다.

그린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문단에 진출한, ‘가방 끈’ 긴 작가 그룹을 일컫는 대학재인파(大學才人派ㆍUniversity Wits)의 일원이었다. 그런 그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신출내기 셰익스피어에게 뭐 그리 불같은 질투를 느꼈을까.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기대고자 했던 너그러운 후원자 사우샘프턴 백작의 관심을 셰익스피어가 가로챘기 때문이었다. 그린에게는 어디서 날아온지도 모를 근본 없는 까마귀가 하루아침에 자신의 자리를 물고 달아나버린 꼴이었다. 그린은 사우샘프턴 백작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하며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했다. 하지만 이 젊은 백작은 공적이건 사적이건 그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셰익스피어에게만 다가가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어쩌랴. 상대가 너무 센 것을. 200년 뒤 영국의 문필가 토머스 칼라일이 “식민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호기를 부려 인도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아닌가. 그 후로 200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 전 세계 어딘가에서는 그에 관한 책이 매일같이 적어도 한 권 이상 출판되고 있다는 그런 셰익스피어가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에게 퍼부은 독설만큼이나 정열적으로 글을 썼다면, 쉼 없이 솟구치는 분노를 상상력으로 승화할 수 있었다면, 그린이라고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작품 한두 개쯤 못 썼을 이유도 없을 터다. 적대감을 극복하고 스스로 상대에게 다가가 연극에 대해 토론하고 고민했다면, 셰익스피어 대신 그린의 [맥베스]가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나 보다. 그린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질투와 저주를 멈추지 않았고, 쥐가 들끓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런던 시내 오두막에서 정부(情婦)의 잔소리를 들으며 길지 않은 생을 마쳐야 했다.

현실과 타협 안 한 모어의 비극

경쟁은 좋다. 그러나 무모한 경쟁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길 뿐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경쟁에 뛰어들 때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냉철히 돌아보는 게 우선이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와 경쟁을 벌이는 것은 수레 앞에 선 사마귀나 다를 게 없다. 수레에 깔리지 않으려면 수레에 맞설 힘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길에서 비켜서야 한다.

수레에 맞설 힘이 있다면 큰 문제가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 물리치면 된다. 그럴 힘이 없어서 길에서 비켜나야 한다면 다음으로 또 다른 두 가지 갈래길이 있다. 물러나 있으면서 수레에 맞설 힘을 기르는 것이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수레에 함께 타고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후자가 더욱 간편한 방법일 수 있다.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경쟁자가 아닌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과학자이자 철학자, 정치가인 프랜시스 베이컨과 그보다 1세기 가까이 먼저 태어난 성직자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의 삶은 두 사람의 대표적 저서만큼이나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상주의 국가상을 그린 저서 『유토피아(Utopia)』에서 ‘유토피아(이상향)’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토머스 모어는 최고위직인 국새상서(Lord Keeper of the Great Seal)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성직자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지난 1935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자 칭호를 받을 정도로 타협을 모르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러한 고결함은 그가 거부했던 영국 국교회(잉글랜드 성공회)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영국 국교회는 1980년 모어를 수호성인으로 받아들였다.

탁월한 식견과 외교력으로 국왕 헨리 8세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지만, 끝까지 왕의 이혼과 왕이 가톨릭이 아닌 영국 국교회 수장 자리에 오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 헨리 8세의 위상을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런던 탑에 갇혔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처형대 앞에서도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좋은 신하이기 전에 하나님의 착한 종으로 죽는다”고 선언했다. 국새상서에 임명됐을 때 모어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주위 사람들의 축하를 물리쳤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과학의 발전이 가져올 미래주의 이상사회의 모습을 그린 『새로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을 쓴 프랜시스 베이컨은 마찬가지로 국새상서의 지위까지 올랐지만 훨씬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세력가였던 에식스 백작의 재판 문제는 그의 현실감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에식스 백작은 베이컨의 먼 친척이자 그를 정계에 입문시킨 은인이었다. 베이컨을 법무차관 자리에 앉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위로하기 위해 거대한 영지를 선물할 정도였다.

에식스 백작은 아일랜드 반란군을 진압하러 나섰다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허락도 없이 반군과 휴전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여왕의 노여움을 산 백작은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내란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그를 단죄하기 위한 재판에서 베이컨은 여왕 편을 들면서 에식스 백작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백작의 편을 든다고 해도 그가 처형을 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여왕의 진노로 볼 때 백작을 옹호하면 함께 처형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은인을 배반했다는 비난이 평생 베이컨을 따라다녔지만 그것만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시대 상황이라는 거대한 수레에 맞서는 당랑거철의 무모함보다는 수레에 함께 올라타 시대를 헤쳐나가는 선택을 한 것이다.

현실을 바로 본 베이컨의 처세

이렇게 노력했지만 더디기만 하던 베이컨의 출세 가도는 제임스 1세가 즉위하면서 탄탄대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왕의 편에 서서 의회를 견제하고 왕권을 옹호하는 데 앞장서면서 제임스 1세의 신임을 얻은 그는 1618년 드디어 국새상서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대법관이 됐다.

하지만 왕의 측근이 되다 보니 의회파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몰아내기로 작심한 의회파는 그가 뇌물을 받은 사례를 28가지나 모아 뇌물 수수 혐의로 제소했다. 결국 그는 예순 살 나이로 대법관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불명예 퇴진을 하긴 했지만 베이컨은 그 후에도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지나간 물결을 돌이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베이컨은 이제 길에서 비켜나 있었다. 토머스 모어 같으면 길에서 걸어 나오기 전에 결코 굽힐 수 없는 소신에 따라 의회파와 한판 승부를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베이컨에게는 너무나 냉엄한 현실이 눈에 보였다. 그는 자신의 재판에 대해 이렇게 승복했다.

“나는 지난 50년간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었지만, (나에 대한)이 판결은 지난 200년 동안 의회가 견책한 사건 중에서 가장 공정한 판결이었다.”

그가 뇌물을 받았는지, 받았다면 얼마나 많은 액수였는지 지금까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베이컨은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그 같은 주장을 뒤집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제 베이컨은 정계 복귀에 눈을 돌리는 대신 다른 곳에 관심을 쏟았다. 저술과 연구 활동이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물론이고 『헨리 7세 치세사』, 『자연사 및 실험사』, 『삶과 죽음의 역사』 등 그의 뛰어난 저서들이 쏟아져 나온 게 바로 이때다.

더는 수레에 함께 타고 갈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는 수레에서 내린 것이다. 이후 베이컨은 길에서 비켜나 자신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았다. 1626년 3월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베이컨은 조금은 우스운, 그러나 나름대로 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닭고기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눈 속에서 냉동 효과를 실험하다 찬 바람을 많이 맞는 바람에 독감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 때문에 베이컨은 ‘실험과학의 첫 번째 순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뇌물 수수 혐의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야 했던 그가 과학계에서는 가장 명예로운 순교자라는 찬사를 받게 된 것이다.

베이컨의 삶이 지나치게 출세지향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시대가 낳은 산물일 수도 있다.

베이컨과 셰익스피어가 살던 르네상스 시대는 완벽한 도덕성보다는 정치가이자 법률가이고 인본주의 철학자이자 문필가, 과학자로서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베이컨 같은 만능인이 더 존경받던 시대였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베이컨이 그처럼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한계를 다른 분야를 통해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이길 수 없는 분야에서 절망적인 투쟁을 계속하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나감으로써 종합적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덕목은 베이컨의 시대보다 요즘 같은 시대에 더욱 절실한 가치다.

‘카스파로프 법칙’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카스파로프 법칙이란 “인간이 기계와 협력하면 인간의 창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스파로프는 옛 소련의 체스 선수다. 1985년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20년 뒤인 2005년에도 세계 챔피언으로서 은퇴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사람과의 체스 시합에서 진 것은 2000년 딱 한 차례에 불과한, 1500년 넘는 체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알려져 있다.

카스파로프의 법칙

카스파로프는 1997년 뉴욕에서 IBM이 개발한 1000만 달러짜리 슈퍼컴퓨터 ‘딥블루’와 세기적 대결을 했다.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하기 약 20년 전의 일이다. 1년 전 카스파로프는 딥블루와 겨뤄 5승 1패로 승리를 거뒀었다. 그런데 1년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딥블루에게 패하고 말았다.

카스파로프는 이 뼈아픈 패배의 충격으로부터 카스파로프의 법칙을 이끌어냈다. “약한 인간과 기계, 우수한 프로세스의 조합은 어떠한 슈퍼컴퓨터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인간이라면 기계를 무시하거나 두려워할 게 아니라, 더욱 창의적인 사고를 함으로써 기계의 사용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기계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동차나 비행기가 개발된 것은 그만큼 빠르게 달리거나 하늘을 날 수 없는 인간이 빠르게 달리고 하늘을 날고 싶었기 때문이다. 슈퍼컴퓨터를 만든 것도 인간이 처리할 수 없는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계산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인간의 도전은 이제 인간처럼 생각하고 진화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냈다.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천재 이세돌을 꺾는 수준에 이르렀다. 앞으로 이세돌을 뛰어넘는 어떠한 천재 기사가 나와도 결코 알파고를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꺾으려고 노력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인공지능을 꺾을 수 없다면 인공지능한테서 배움으로써 자신을 발전시키는 게 현명한 일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 즉 카스파로프의 법칙을 따르는 사례들이 일어나고 있다.

체스 선수 바비 피셔는 1958년 14세 나이에 최고수를 일컫는 그랜드마스터 자리에 올랐다. 이 기록은 33년 동안이나 유지됐다. 1991년이 돼서야 유디트 폴가르라는 천재 선수가 나타나 기록을 깼다. 하지만 폴가르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몇 해에 걸쳐 더 어린 천재들이 연이어 나타나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컴퓨터 게임에 쓰이는 체스 엔진이 나날이 강해지고, 이를 이용한 훈련용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인간의 체스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간의 잠재력을 일깨운다. 인공지능을 무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친구처럼 가깝게 대할수록 잠재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힘이다. 인공지능조차 따라올 수 없는 인간의 역량이다.

이길 수 없으면 친구가 되는 게 좋다. 가장 강력한 적이 친구가 된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나. 선동렬이라는 불세출의 마무리 투수를 가졌던 해태타이거즈가 다른 팀들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 시절을 오랫동안 구가했는지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2107호 (202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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