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17) 

미봉책-순간적 위안을 위한 단기적 선택 

세일 시즌에 아울렛을 방문했다. 좋은 물건이 너무 싸게 나와서 이것저것 잔뜩 쇼핑을 했더니 양손에 쇼핑백이 한가득이다. 쇼핑백이 늘수록 팔은 점점 무거워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계점에 다다른다. ‘쇼핑백을 더 늘리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지금까지 산 것에 만족하거나, 쇼핑백을 어딘가에 맡기거나 차에 옮겨놓는 것이다. 양손이 무거워지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더 취할지 선택해야 한다.

▎Puck 저널 [탐욕스러운 존불] 1896
1712년 스코틀랜드 작가 존 아버스넛(John Arbuthnot)의 작품에 처음 등장한 존불은 영국인을 조롱하는 차원에서 만든 캐릭터였다. 그러나 많은 영국 작가가 작품에 활용하면서 존불은 영국과 영국의 국민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1896년 미국의 저널 Puck에 실린 존불은 양손에 장난감과 음식을 가득 움켜쥐고 있다. 손에 다 들지 못한 물건 몇 개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정치적인 풍자화로 알려진 그림이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고 쥐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충분히 잘 나타내고 있다.

삶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덮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괜히 마주하며 불편한 것도 싫고, 지금까지 해온 대로 그냥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를 직면하고 지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면서도 달라지지 않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변화는 선택의 연속이다. 새로운 것을 거머쥘 수 있는 확률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기 전까지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곧 불편함으로 이어진다.

회피를 선택하는 사람들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회피적 장애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살면서 어려움이나 책임을 직면하는 것보다 회피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한다. 어떤 불편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 불편한 감정을 없앨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감정을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화가 샤갈은 가난한 유대인 집 안에서 9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미술을 시작한 샤갈은 벨라 로젠벨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22살 샤갈이 14살 소녀를 만나 1915년 그녀가 20살이 되던 해, 결혼식을 올렸다.

벨라는 꽃다발과 생일 케이크를 들고 샤갈의 방문을 열었다. 그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 그녀에게 황홀한 입맞춤을 했다. 그의 몸은 즐거움에 하늘 위로 붕 떠올랐고, 그의 두근대는 마음을 따라 벨라도 하늘 위로 떠오르려 하고 있다. 꽃다발을 든 벨라의 손 이외에는 손을 그리지 않았다. 입맞춤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온전히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샤갈은 이 그림에 “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 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라고 회고했다. [생일]은 샤갈이 벨라와 결혼하기 몇 주 전에 완성한 그림이다.

이들은 결혼 후 딸 이다를 낳고 29년을 함께 살았으나 벨라는 갑작스럽게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가벼운 인후염인 줄 알았지만 고열이 나기 시작했고, 병원에 도착했으나 전쟁통이라 병원은 제대로 된 약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혼수상태에 빠진 벨라는 1944년 9월 2일 저녁에 숨을 거두었다. 아내의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회피였다. 그림도 그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벨라의 죽음을 반유대주의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백인 기독교인만 받는다는 안내문을 본 적이 있으며 병원에서 나이와 이름, 종교를 물었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그녀가 입을 다물었고 이런 불편함으로 인해 호텔에 가게 되어 손쓸 수 없이 늦어졌다고 회고록에 기술했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샤갈은 유럽에서 추방당했던 경험을 덧붙여가며 아내가 죽은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위협을 받았을 때 싸우거나 피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오래전 우리의 조상은 자신을 공격해오는 동물을 만났을 때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동물과 싸우거나 도망을 갔고, 우리의 뇌는 그러한 DNA를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코트의 [폭풍]에는 강한 비바람을 피해 도망을 가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비와 바람은 외부에서 작용하는 위협 상황이다. 차가운 비를 오랜 시간 맞고 있거나 바람에 날아다니는 물건에 맞기라도 한다면 우리의 생명은 위험해질 수 있다. 위협 상황에서 피하려는 성향은 ‘투쟁-도피 스트레스 반응’으로 불린다. 이는 인간이 천부적으로 지닌 재능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위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지키는 고유 능력이다. 과거에는 동물을 만났을 때 싸워서 생명을 지키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위협은 스트레스와 같은 내면적인 것이다. 내면의 스트레스와 직면하는 것과 회피하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

물론 건강한 사람들도 회피를 사용한다. 프로이트는 사람이 이성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불안을 통제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자아의 붕괴를 막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를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방어에는 자아를 보호하는 요소와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요소가 포함된다. 그렇기에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도 어느 정도 회피하며 자아를 보호한다.

미봉책도 나쁘지 않으니까


▎피에르 오귀스트 코트 [폭풍] 1880
문제를 회피하면서 지금 잠깐 눈앞의 불편함만 해소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순간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선택, 미봉책이다. 미봉책은 대부분 비합리적 신념에 아주 부합한다. 하지만 미봉책은 말 그대로 임시로 꾸며대어 눈가림만 하는 계책을 의미한다. 본질을 바라보지는 않지만 현재 상황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미봉책을 선택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불편한 상황은 순간적으로만 해소될 뿐 지속적으로 삶에 위험 요소가 된다.

매 순간 투쟁하며 살 수는 없다. 살다보면 지치는 순간도 오기 때문이다. 폴 고갱의 [올리브산 위의 그리스도] 속 예수도 다소 지쳐 보인다. 유다와 병사가 예수를 체포하려고 뒤에서 다가오고 있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나고 붉은 머리의 예수는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있다. 고갱은 자주 예수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는데, 1889년 파리에서의 전시가 실패로 돌아가자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한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열심히 준비했던 작품이 외면당했을 때는 미봉책으로 이런 좌절과 고난을 예수의 고통에 비유하면서 정신 승리를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우선의 불편한 감정들은 해결하고 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냥 넘어가자


▎고갱 [올리브산 위의 그리스도] 1889
그동안 불편한 것들을 버리지 않고도 지금까지 문제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을 지속적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순간적인 위안을 위해 장기적인 행복을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이다.

미봉책은 순간적으로 기분을 바꾸어준다.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고 치킨을 먹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담배와 술의 판매량은 증가한다.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마치 그것이 해결책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친구와 술을 마시며 회사를 욕하면 기분이 좋아지기에 문제가 해결된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런 미봉책의 선택들은 자생력을 얻고 행동들도 예측 가능한 패턴을 따른다. ‘운동을,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불편함에서 벗어나 우선 쉬고 보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패턴을 잘 알고 있다. 불편한 가족 구성원과 그냥 지금처럼 지내는 것이 괜히 들쑤시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우선 술이나 한잔하자’는 결론을 내기도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에 했던 미봉책의 선택을 반복하며 부정적 감정과 문제행동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내가 지고 갈 책임은 직면하는 것보다 회피하는 것이 더 쉽다’는 신념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주 보편적인 행동의 목적 중 하나로, 당장의 불편한 감정을 피함으로써 안도감을 얻는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미봉책을 반복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미 관계가 끝났다고 느껴지는 연인과 헤어지는 것을 계속 미루는 사람들은 이별할 때 발생하는 정신적 에너지와 이별 직후 느껴지는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흐지부지 끝나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현재 직장에 불만이 많고 늘 그만두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서 사표를 내는 것을 계속해서 미룬다. 또 부모의 기대감으로 만들어진 ‘착한 아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짜 자신을 버리고 진짜 자신을 마주할 때 겪어야 하는 성장통을 피하기 위해 착한 아이에서 은퇴하기를 미룬다. 감정의 회피는 안도감으로 이어지고,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가천대학교 조소과 객원교수이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이다. 현재 플로리다마음연구소 대표로,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107호 (202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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