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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이 만난 아트 인플루언서(13) 디자이너 정구호 

“달항아리와 색동저고리, 양극단을 포용하는 게 한국의 미(美)” 

얼마 전 우연히 하루에 무용 공연 두 편을 연달아 보게 됐다. 국립현대무용단의 기획 신작 [그 후 1년]과 유니버설발레단의 고전발레 [돈키호테]였다. 전자는 낯설고 생소한 무대가 결코 아름답지 않았지만 몹시 동시대적인 코로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후자는 매우 보기 좋고 아름다웠지만 고전의 틀을 빈틈없이 재연할 뿐이었다. 두 공연을 차례로 보며 무용이란 게 아름다우면서도 동시대적이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실감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 최근 국립무용단 [산조]를 연출한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다.

▎ 사진:국립무용단
정구호는 무용가가 아니지만, 훗날 2010년대 한국무용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록될 사람이다. 2012년 [단]을 시작으로 [묵향], [향연] 등 그가 국립무용단 공연을 연출하는 동안 한국무용이 환골탈태했기 때문이다. 어딘지 촌스러웠던 한국춤이 그가 손을 대자 몰라보게 세련된 속살을 드러냈고, 그의 작품이 국내외에서 널리 호평받으면서 ‘한국적 아름다움’의 이미지와 그 방향성까지 달라졌다. 그런 그가 [춘상](2017) 이후 4년 만에 국립무용단에 다시 돌아와 신작 [산조]를 선보였다. 한국무용을 시작할 때부터 품었던 목표에 부쩍 가까워진 ‘정구호의 야심작’이었다.

[산조]는 전통 기악 독주 양식인 산조에 담긴 비대칭적이고 비정형화된 아름다움을 동시대 감각으로 재해석해 춤과 음악, 무대 미장센으로 풀어낸 무대이다. 산조 음악이 지닌 흩어짐과 모임의 미학을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안무와 감각적인 무대, 다채로운 음악의 변주로 표현한 것이다.

무용 공연의 콘셉트를 왜 기악 독주 형식인 ‘산조’로 정했나요.

한국무용을 시작할 때부터 진짜 하고 싶었던 게 현대와 전통이 반반으로 만나는 ‘모던 전통’ 장르를 만드는 것이었거든요. 처음부터 서두르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니 크레디트를 쌓아가며 때를 본 건데, 지금이 과감해질 시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산조’라는 콘셉트를 정한 것도 그래서죠. 무용 음악이 대부분 시나위, 민요 베이스예요. 산조가 춤추기 어려운 게, 되게 불규칙적이고 불완전한 음악이거든요. 그래서 더 아방가르드한 매력이 있죠. 들으면 들을수록 궁금증이 생기는 음악이랄까요. 과거에 즉흥에 가깝게 만들어져서 지금껏 흘러온 산조를 지금 위치에서 재해석한다면 어떨까. 이러한 음악에 대한 챌린지와 그걸 무용으로 표현하는 실험을 시도한 것이죠.

젊은 안무가들이 만든 움직임이 전통의 무게를 벗었는데요.

요리로 치면 기본 메소드는 한국 요리인데 푸아그라 같은 재료를 썼달까요. 제 작품을 계속 보신 분들은 이 정도 챌린지는 받아들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해요. 요새 ‘범 내려온다’만 봐도 한국적 장단이지만 움직임은 다르잖아요. 우린 그보다는 좀 심각하긴 한데, 확실히 젊은 안무가들이라 재치 있는 동작이 많아요. 어떤 장면은 제가 봐도 너무 가벼워서 처음으로 좀 무겁게 가자고 제안했죠. 선생님들께는 항상 좀 가볍게 하자고 했었는데, 내가 나이가 들었나 싶기도 하고.(웃음) 그런 변화가 재밌더군요.

늘 다양한 예술가와 협업해왔는데, 영향도 받겠죠.

프로젝트 할 때마다 저한테 생각의 변화를 주는 분들을 만나곤 하는데, 요번에는 음악을 맡은 김재덕씨와의 만남이 새로웠어요. 끼가 넘치는데 가볍지 않더군요. 장르를 마구 믹스하면서 본인의 폭을 최대한 늘려서 활용하는 분인데, 누구에게는 ‘투머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잘 완성된 그릇에 담았을 때 정말 가능성이 클 것 같아요. 본인의 안무작인 [다크니스 품바]는 작품보다 그 발상이 좋더군요. ‘만일 나와 같이했다면 완전 새로웠을 텐데’라는 생각도 들었죠. 물론 협업하기 쉬운 대상은 아니에요. 서로가 너무 완성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불꽃 튀는 시너지가 날 수도 있죠. 공연하면서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을 발견하는 게 너무 즐거워요.

예술가들과 소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한데.

커뮤니케이션이 제일 힘들죠. 하지만 모노드라마를 하기 전에는 공연예술 자체가 독단적일 수는 없어요. 종합예술이니까요. 저도 협업하기 힘든 사람 중 하나인데, 챌린지가 재밌네요. 힘들어서 도전이 되고, 그걸 통해 결과를 내는 거니까.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거워”


▎정구호는 [산조]의 연출 및 무대, 영상, 의상 디자인까지 책임졌다. / 사진:국립무용단
사실 [산조]의 탄생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2019년 한국무용계 거장 국수호와 함께 준비하던 [색동]이 국립무용단 내홍으로 제작이 무산된 것이다. 홀로 남은 정구호는 젊은 안무가 최진욱, 임진호와 색다른 조합을 택했다. “사실 큰 계획 중에 하나였어요. 원래 [색동]까지만 원로를 모신 다음 새로운 세대와 현대적인 작업을 하려고 했었죠. 원로들은 평생 지켜온 고집을 굽히지 않는 게 맞고, 젊은 안무가들은 도전하는 게 맞으니까요.”

한국무용을 시작할 때 무용계 화두가 현대화, 대중화였다면, 지금 필요한 건 뭘까요.

빨리 세대교체가 돼야 해요. 새로운 인물의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때죠. 젊은 무용가들이 선생님들 눈치 보지 말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위해 더 과감한 도전을 하셨으면 해요. 젊은 분들에게 기회도 많아져야죠. 나랏돈으론 역부족이고, 여유 있는 분들의 관심과 기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최근에 구찌가 한국 문화를 오마주했던데, 대단하다 생각해요. 다른 브랜드는 한국에서 돈만 벌어가잖아요. 기왕이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국 문화에 더욱 인볼브해서 한국무용 프로젝트까지 한다면 좋지 않을까요.(웃음) 그 정도는 여기서 벌고 있거든요.

요즘 젊은 안무가들은 한국무용이라는 정체성과 대중성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던데요.

그럴 거예요. ‘범 내려온다’ 이후에 더욱 고민이 많을 테죠. 하지만 적어도 저는 대중성을 고려한 적은 없어요. 관객이 호응할 수 있는 이해도가 중요하죠. 전에 현대무용을 할 땐 항상 어렵단 얘기를 들었어요.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이니까요. 반대로 한국무용은 잘 알지만 식상해하더군요. 그래서 어려운 것과 식상한 것을 접목해서 새로운 장르로 만들자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온 거예요. 젊은 분들이 하고 싶은 걸 깊이 있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요즘 관객들은 굉장히 열려 있잖아요. 새로운 걸 찾는 데도 적극적이고.

정구호는 무용을 넘어 전방위 비주얼 마스터다. 국립오페라단 야외오페라 연출, 파라다이스 아트스페이스 예술감독, 롯데백화점 리뉴얼 총괄, 최근엔 신인가수 앨범 아트 디렉팅에 삼성미술관 리움 재개관 자문까지, 일일이 열거하는 게 구차할 정도다. 본업도 열심이다. 제일모직에서 퇴사한 이후에도 최근까지 빈폴과 제이에스티나 리뉴얼을 책임졌고, 지금은 조이너스, 꼼빠니아 등을 가진 패션기업 인디에프의 쇄신을 위한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7월부터 9월까지 4개 브랜드 론칭을 동시에 준비 중이다. 이쯤되면 그야말로 경계를 모르는 ‘장르가 정구호’라 할 만하다.

리움 재개관은 언제쯤인가요.

올해 안에는 되겠죠. 미술관을 오픈한 지 꽤 됐으니 오래된 걸 정리하는 정도예요. ‘리움’ 하면 일반 대중이 접근하기 아주 친숙한 뮤지엄은 아니라서 대중이 좀 더 접근하기 좋은 개방성을 가져가도록 변화하고 싶은 것 같더군요. 그러기 위한 여러 요소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한 가지만 공개한다면, 뮤지엄 스토어가 뉴욕의 모마 스토어처럼 멋지게 바뀔 겁니다.

요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절정인데, 한국적 아름다움이란 어떤 걸까요.

우리가 가진 재미난 아름다움 중에 하나는 무한대로 단순미를 가치 있게 생각하는가 하면, 무한대로 컬러풀한 키치적인 전통도 좋아한다는 거죠. 양극단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게 우리예요. 달항아리를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면서 색동저고리 입고 춤추는 ‘범 내려온다’도 좋아하잖아요. 스타일의 다양성을 가진 게 포인트라고 봐요. 나는 그 가운데서 양쪽을 다 활용하는데, 이번에는 좀 더 미니멀한 요소를 많이 가져왔죠. 블랙앤드화이트가 가진 미니멀함으로 완전 무채색에 가까운 공연을 추구한 거죠.

“영감의 원천은 식지 않는 호기심”

늘 대규모 사업의 러브콜을 받으니 대단한 수완가인가 싶지만, 알고 보면 전형적인 예술가 스타일이다. 유일한 흑역사로 꼽는 평창 올림픽 개폐막식 총연출 사퇴도 계약에 어설프고 정치에 어두워 벌어진 일이다. “계약도 안 한 상태로 1년 동안 일을 했어요. 하도 괴로워하니까 누군가 해결해줄 만한 분을 소개해주겠다하더군요. 하늘의 뜻인지 내 인생에서 약속을 잊은 게 처음이었어요. 부산에 가 있는데 왜 안 오냐고 전화가 와서 깜짝 놀랐죠. 안 그래도 억울한데 그때 만났으면 더 억울할 뻔했어요.(웃음) 밀라노에서 공예 프로젝트를 할 때도 한창 설치 중에 정치인 전화를 받았죠. 자기가 추천한 작품을 메인 전시장에 안 놨다고 불만이길래 나를 총감독으로 임명했으면 믿고 맡기라고 끊어버렸는데, 뒤늦게 오싹하더군요.(웃음)

다양한 창작 작업을 동시다발로 진행하는데, 영감의 원천이 뭘까요.

짜놓은 공연이 열몇 개쯤 되고 영화 시나리오도 세 개나 써놨지만, 그러기 위해 뭘 하러 다니지는 않아요. 끊임없는 호기심이 원천이랄까요. 새로운 게 보이면 헤집고 다녀야 하는 성격이에요. 그러다 보면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르도 보이고, 새로운 아이템도 발견하죠.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내야 되는 사람이니까 ‘어느 날 아이디어가 안 나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지만,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는 뭔가를 할 거예요.

코로나19 이후 가장 달라진 게 디지털 전환인데, 공간 전문가로서 가상공간에도 관심이 있나요.

전부터 디지털을 좋아해서 디자인 포럼에서 강연한 적도 있어요. 팬데믹이 아니어도 가상세계는 반드시 올 것이었고,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죠. 10여 년 전에 현대무용 작업할 때부터 시점이 다양한 무용 영상을 찍자는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어요. 관객이 무대를 바라보는 시점이 하나인데, 나는 시점 변화가 항상 중요하다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향연] 때도 오고무를 빙빙 돌렸어요. 공연을 360도 원하는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너무 좋지 않을까요. 그런 작업에 너무 관심이 가요. 극장이라는 틀 자체가 고대부터 온 건데, 그 틀을 깨는 시점이 지금이 아닐까 싶어요.

도무지 한계를 모르는 것 같네요.

사업을 못해요. 저는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지 운영과 관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죠. 제 스스로 뭔가를 만들지 않는 이유예요. 투자를 할 테니 사업을 같이하자고 해도 절대 못하고, 프로덕션을 만들라 해도 절대 못하죠. 연애도 못해요(.웃음) 하루의 89%를 일에 쓰고, 11%를 쉬는데, 쉴 때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못 쓰거든요. 차라리 힐링을 택하겠어요. 연애를 하려면 잘해야 하고, 가벼운 만남을 못해서 그렇기도 해요. 2007년 11월 이후 아무도 못 만나고 있네요. 그 이전에 비해 100배쯤 일이 많아지다 보니, 이제 외로움에도 무뎌진 것 같아요. 점점 일이 많아지니 기회가 올 듯해도 일부러 포기해버리곤 하죠.

일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요.

쉬면 안 될 것처럼 세뇌당한 느낌도 있어요.(웃음) 가끔 ‘왜 이렇게 열심히 하지’ 싶죠.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걸 보면 저러고 살아도 되는데 싶다가도 금세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그저 열심히 살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면 좋겠네요. 어떤 영화에서 모든 과거 기록과 온라인 데이터를 싹 지워주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렇게 다 삭제하고 죽는 게 목표예요. 남들은 제가 명예욕이 심하다고 오해하는데, 오직 일 욕심만 있어요. 일이 좋고, 도전과 결과를 만드는 걸 좋아하죠. 예전에 누가 저더러 무용에 연출이 뭐했냐고 묻던데, 그런 흐름이 없었던 거죠. 뭔가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를 통해 흐름의 변화를 가져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만일 뭔가를 했는데 아무 영향도 못 준다면, 차라리 그만두고 칼국수를 끓일거예요. 제가 칼국수도 맛있게 끓이거든요.(웃음)

※ 유주현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휩쓸던 영광의 기억을 품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살아왔다. 2010년부터 중앙SUNDAY에서 공연을 중심으로 영화, 문학,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을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전달하고자 부단히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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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호 (202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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