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혹은 뿌연. 사진가 민병헌(66)이 평생 추구해온 흑백사진의 화면은 늘 이렇다. 이름하여 ‘민병헌 그레이(grey)’다. 흑백이라도 화이트와 블랙의 대비가 강한 ‘쨍한’ 사진은 그의 몫이 아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안개가 끼거나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날이 되어야 비로소 카메라를 둘러메고 평소 눈여겨보아 둔 그곳으로 향한다. 아스라한 그리고 어렴풋한 잔상을 필름에 새긴 뒤 암실로 돌아와 인화지로 뽑아내며 그는 중얼거린다. 세상은 흑백만으로 구분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새를 찍고, 꽃을 찍고, 벌거벗은 사람 몸을 찍는다. 산등성이의 길도, 바닷가 외딴섬도, 호숫가의 풀도 마찬가지다. 서울 포스코미술관에서 열린 ‘황홀지경-민병헌, 사진하다’(5월 20일~6월 25일)는 그 뽀얗고 뿌연 화면을 즐기는 자리다.
▎설경을 뿌옇게 찍은 ‘스노우랜드’ 앞에 선 민병헌 작가. 화이트 월이 아닌 벽돌의 질감이 사진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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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미술관은 서울 삼성동 포스코센터 지하 1층에 있다. 테헤란로 대로변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쉽지 않은 문화공간이다. “사진작가로는 이번이 세 번째”라는 김윤희 포스코미술관 관장은 “아무래도 회사원 관람객이 많은데, 최근 사진에 관심이 높아진 이들에게 사진이 어떻게 예술이 됐는지, 흑백사진의 예술성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말했다.코로나19로 연기 끝에 가까스로 열린 전시였기에 그동안의 갈증도 심했었나 보다. 전시장을 돌며 90점에 달하는 실버젤라틴 프린트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민병헌 작가의 표정이 살짝 상기돼 있다. “제 사진이 사이즈가 작은 게 많잖아요. 그래서 여기저기 벽을 치고 공간을 나눴어요. 특히 그동안은 화이트 월을 고집했는데, 이 ‘스노우랜드’(2005)는 벽돌 벽면 위에 그대로 디스플레이해보니 액자도 그렇고 느낌이 아주 좋네요.”대표작 ‘새’ 연작이 있는 곳부터 투어가 시작됐다. 그는 대뜸 “저는 새를 탐구하는 조류 사진가나 생태 연구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냥 ‘아름다운 자연’으로 새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얀 도화지에 4B 연필로 슬쩍슬쩍 그어놓은 듯한 삐침이 자세히 보니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은 문득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도록에는 이렇게 적었다. “전국 각지의 새들이 렌즈에 들어오길 기다렸지요.(…) 조선시대 문인의 성정을 담은 화조화 같은 느낌이라고 하는데, 홀로 나는 새를 담을 땐 정말 그랬어요.”
‘길’ 시리즈는 먼지가 많아 공기가 탁한, 그의 말을 빌리면 ‘기분 나쁜 뿌연 날’의 모호함을 구현한 작품이다. 안개 낀 날과는 느낌이 또 다르다. 산 위에 올라가 내려다본 마을의 꼬부랑길을 찍었다. “사람의 시선은 밝은 쪽을 먼저 향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실낱같은 길에 먼저 시선이 가지만, 내 입장에선 산등성이 숲의 디테일도 중요하지요. 뿌연 속에서 두루 다 잘 보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FLOWER, OF012, BHM2011. / 사진:포스코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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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드를 찍는 대상은 전문 모델이 아니다. 일반인이다. 시간만큼 돈을 주는, 일로서 하는 모델로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다. 인화한 사진을 액자에 넣어 선물하는 것이 유일한 대가인데도. “제가 모델을 고르는 기준은 이쁘냐 안 이쁘냐가 아닙니다. (한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남자인데 라인이 여자보다 더 아름답지 않나요. 무엇보다 피부가 좋아야 해요. 점도 없고 주름도 없어야죠. 내 사진에서는 (포토샵으로) 점이나 주름을 없앨 수 없으니까. 인체 작업이지만 자연을 보는 느낌을 담았달까. 자연이든 인체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은 거죠.”
안개가 유명한 경기도 양수리에서 살다가 2015년 전북 군산으로 옮겼다. 그의 집은 1960~80년대 전북 최고 갑부가 살았다는 ‘고판남 가옥’으로, 거의 100년 된 서양식 고택을 1년 가까이 고쳐 세상 멋진 집으로 만들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새로 시작한 연작이 ‘남녘유람’이다. 군산을 중심으로 아랫쪽 전남과 경남까지 행보를 넓혔다.
▎ST095, BHM2020. / 사진:포스코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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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집착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한 뒤 그런 집착이 많이 사라졌죠. 따뜻한 남쪽으로 왔으니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따뜻함을 즐겨보자, 소풍 다니듯 유람하듯 다녀보자 싶었던 거죠. ‘마음의 남녘’을 찾았달까. 군산에 주로 있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런데 사진 보러 안 오고 집 보러 와. 아냐, 사실 술 마시러 와. 하하하.”
사진은 눈으로 본 것을 잘라내는 작업
▎HB043, BHM2001. / 사진:포스코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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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다. 고교 시절 음악에 빠졌고, 대학에서도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하지 않았다. 대신 신촌에서 만화방과 군고구마 장사를 하면서 우연히 카메라를 알게 됐다. 취미는 곧 삶이 됐다.
1984년 첫 개인전 이후 계속 아날로그 흑백사진 작업을 해왔다.당시는 필름 시대였다. 현상소에 맡겨 인화해야 했다. 난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해보고 싶었다. 물론 처음엔 컬러사진을 하고 싶었지. 그런데 돈이 문제였다. 기곗값이며 설치비가 너무 비쌌다. 그래서 문간방에 흑백사진용 암실을 만들었다.
암실 작업이 쉽지 않았겠다.열등감 컸던 시절이었다. 누가 내 옆에 있는 게 싫었다. ‘다 가버려, 다 꺼져버려, 난 이렇게 살 거야’라고 뻗댔다. 그런 내게 암실은 천국이었다. 딴지 거는 사람도 없고. 모든 불안을 제거해주는 어둠, 그 어두운 빛이 주는 안도감, 그 공간감이 너무 좋았다. 40년을 약품에 절어 살다 보니 후각이 마비됐다는 점만 빼고.
왜 뽀얗고 뿌연 작품을 만드나.
▎MG409, BHM2013. / 사진:포스코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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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빛의 작업이다. 꼭 강한 빛이 있어야 좋은 사진이 될까 생각했다. 강하든 약하든 빛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촛불 하나를 켜도 한 시간 노출하면 되지 않을까. 처음엔 콘트라스트(명암 대비)가 명확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검고 흰 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죽더라. 콘트라스트를 최대한 억제하니 다양한 높낮이의 회색톤에서 비로소 디테일들이 살아났다.
무엇을 찍을지 어떻게 정하나.사진은 눈으로 본 것을 잘라내는 작업이다. 결국 ‘프레이밍’, 즉 어디를 얼마나 잘라내느냐의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눈으로 찍는 훈련이 가장 중요하다. 보이는 풍경의 구도를 놓고 프레임을 어떻게 짤지, 몇 mm 카메라로 찍을지 마음속으로 정한다. 그리고 원하는 날씨를 기다렸다가 카메라를 들이댄다. 나는 찍을 때 이미 최종 결과를 예측한다. ‘이거는 콘트라스트가 이렇게 나와야겠다’, ‘톤은 이렇게 해야겠다’ 감이 온다. 원하는 콘트라스트와 톤을 얻기 위해 온도를 맞추고 시간을 조절한다. 그런데 한 화면에서 톤을 일정하게 맞추기가 사실 쉽지 않다.
디지털카메라를 쓰면 좀 쉽지 않을까.필름 카메라의 매력은 미리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필름을 배낭에 넣고 돌아오는 길의 그 기대감, ‘오늘 최고의 사진을 건졌다’는 뿌듯함을 (결과를 바로 아는) 디지털카메라는 결코 주지 못한다.
필름이나 인화지 생산이 줄고 있지 않나.뭐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 거지. 어떨 때는 빨리 없어졌으면 싶기도 하다, 그래야 그 핑계 대고 그만하지.
‘민병헌 그레이’라는 수식어도 생겼다.
▎ST115, BHM2020. / 사진:포스코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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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러주는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내 사진이 ‘회화적’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사실 좀 듣기 싫은 말이다. 난 스트레이트 사진을 하는데, 왜 그렇게 말할까. 우리가 사진을 재현해 보는 것과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기에. 하지만 그게 내 사진의 ‘색깔’이다.
민병헌 사진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누구였나.신구전문대 홍순태 선생님이다. 보성고 시절 담임은 아니었고 서울대 상대 나온 상업 선생님이셨는데, 사진 찍기를 워낙 좋아하셨다. 사진을 시작한 뒤 수소문해서 찾아가 조수 역할을 몇 년했다. 감사한 점은 자기 방식을 강요하지 않고, 내 방식 그대로 봐주셨다는 점이다.
외국에서 반응도 좋았다던데.2000년대 들어 미국의 몇몇 갤러리와 미술관에 소개를 받았는데, 가자마자 컬렉션이 됐다. 내심 ‘이러다가 금방 세계적인 스타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마 해외 미술관에 가장 많이 소장된 한국 작가 중 몇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하지만 곧 흐지부지됐다.
왜 그런가.핑계를 대자면 너무 나만 생각했고 건방졌다. 그때는 내가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다 내 잘못이었다. 2010년쯤 해외 갤러리를 거의 다 정리했다. 그런데 2~3년 전에 프랑스 갤러리에 정리하러 갔다가 날 도와주고 싶다는 분을 만났다. 그래서 세계적인 사진 아트페어인 파리 포토에도 처음 가게 됐는데, 아는 얼굴이 많이 보이더라. 이젠 좀 원만하게 살아야지.
그럼 올해도 파리 포토에 가나.그럴 예정이다. 코로나19로 보류된 프랑스 전시 일정도 챙겨볼 생각이다. 그러려면 백신부터 맞아야 한다.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