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거치면서 세계 최대 물류회사 DHL이 저력을 보여줬다. 전 세계 220여 개국에 뻗어 있는 DHL 물류 네트워크는 팬데믹 중에도 경제활동을 이어가려는 이들에게 동아줄이 됐다.
▎독일 DHL 물류센터에서 포즈를 잡은 프랑크 아펠 DHL 그룹 회장. / 사진:DHL 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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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 배송 분야 세계 1위 업체인 도이치 포스트 DHL(이하 DHL)에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하루 수십만 개 택배를 이틀 안에 배송해야 물류센터에서 자칫 확진자가 나와 한 곳이라도 폐쇄하면 전 세계를 잇는 물류망이 한순간에 셧다운될 수도 있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이 집에 있게 되면서 물류 배송은 폭주했고, DHL은 지난해 역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DHL은 완전한 기회를 잡은 셈이다. 지난해 DHL 총매출 668억 유로 (약 90조 2,000억원) 영업이익(EBIT) 48억 유로를 달성했다. 올해 1분기(1~3월)에는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3.2배 늘어난 19억 유로를 기록했다. DHL도 올해 연간 영업이익이 지난해보다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역대 최고치다.“2020년은 정말 특별한 한 해였습니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발병했을 당시만 해도 그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유행병이 퍼지자 DHL은 우선 직원을 보호하는 방법을 강구했고, 전 세계인을 돕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가용자원을 살펴봤습니다. 당장 드는 비용보다 각국 정부를 비롯한 우리 고객이 원하는 모든 걸 시도하면서 DHL만의 ‘본연의 가치’를 확인한 기회였습니다.”지난달 전화 인터뷰한 프랑크 아펠(Frank Appel·60) DHL 회장이 한 말이다. DHL은 독일 우체국(도이치포스트)이 민영화된 이후 여러 물류회사를 인수합병(M&A)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DHL은 현재 직원 수 57만 명, 전 세계 220여 개국, 12만 개 지역으로 물건을 나른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19 이후 엄격한 온도 조건(최대 영하 80도)이 필요한 진단키트와 백신을 전 세계에 공급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 완벽한 백신 수송을 위해서 각 사업부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까지 갖추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해 9월 맥킨지와 공동으로 코로나19 백신 운송에 대한 매뉴얼을 내고 정보 공유에도 힘쓰고 있다.하지만 십수 년 전 아펠 회장이 내린 결단이 아니었다면 이번 기회를 놓쳤을 지도 모른다. 2008년 DHL은 창립 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미국 국내 특송사업에 야심 차게 진출했지만, 경쟁에서 페덱스, UPS에 밀렸고 매해 15억 달러에 이르는 적자를 내고 있었다. 전임인 클라우스 줌빈켈 회장 시절부터 40억 달러(약 4조5000억원)나 쏟아부은 거대 프로젝트였기에 쉽게 철수할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DHL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었다.아펠 회장은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시장에서 과감히 철수했다. 자회사였던 포스트방크도 도이치방크에 팔아버렸다. 당시 일부에서 ‘미친 결정’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지금은 경영학에서 과감하게 철수해서 살아남은 사례로 자주 등장한다. 그도 “독립적으로 수익을 내지 못하는 시장을 운영하는 건 환상을 좇는 것”이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런 아펠 회장의 눈에 띈 곳이 한국을 비롯한 아태지역이다.
한국 시장이 인상 깊다고 했다.한국은 DHL 포트폴리오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나라다. 한국에서 거둔 매출만 약 7억5000만 유로인데 10년 전보다 2배 가까이 성장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30% 이상 매출이 급증했고 처리 물량도 40%나 늘었다. 골드만삭스가 최근 내놓은 자료를 보니 리테일 영역에서 이커머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2024년 글로벌 시장은 23.9%, 한국의 경우 46.8% 비중을 차지할 거라고 했다. 전체 전자상거래 총거래액을 보더라도 현재 한국의 규모는 전 세계 톱 6~7위 수준에 해당한다. 한국 이커머스 시장은 아태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큰 곳이다.
급성장하는 곳은 한국 말고도 많은데.그렇다. 하지만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안정적인 정치 상황과 예측 가능성, 개방된 국경, 높은 수준의 교육과 인프라 같은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 한국은 이런 점에서 독일과 비슷하다.
인천 게이트웨이를 확장하는 이유인가.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08년 문을 연 인천 게이트웨이의 화물 처리량이 크게 늘면서 사실상 포화 상태가 됐다. 지난해 약 1800억원을 투자해 인천 게이트웨이 시설을 확장하고 있으며 2022년 하반기 중에 공사가 마무리된다. 완공되면 아태 지역에서 DHL의 게이트웨이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한국, 몽골, 중국 북부지역, 러시아 극동지역 등 동북아 시장을 위한 물류 집하기지로 활약하고 더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전자상거래 인프라 중심으로 올라설 수 있다.
전자상거래 성장이 대단하다.그렇다. 난 지난해 ‘코로나19는 소비자 행동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라는 질문을 숱하게 던지며 고민했다. 전자상거래는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뿐만 아니라 기업 간 거래(B2B) 시장도 키웠다. 지난해 4월만 해도 모든 이가 소비를 멈췄다가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개인과 기업이 돈을 쓰기 시작했다. 실제 DHL을 통해 해외로 운송되는 전자상거래 물량은 지난 2017년부터 연평균 30%씩 성장하다가, 2020년 9월 기준 전년 대비 200% 이상 뛰어올랐다. 특히 한국 전자상거래 시장은 연평균 15% 이상 성장해 2023년이면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시장이 될 것 같다. 전자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업계도 점차 살아나고 있다. 2023년 정도면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않겠나.
완전한 정상화에 백신이 필수 아니겠나.그렇다. 백신 개발에 주목하는 건 보건·제약 분야다. 팬데믹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의료 종사자와 대응인력에게 진단키트나 임상시험에 쓰일 샘플 등을 저온 상태로 안전하게 배송하는 게 중요하다. DHL 글로벌 포워딩과 DHL 익스프레스가 유럽과 그 외 지역에서 백신 포장부터 배송까지 세심하게 처리하는 노하우를 쌓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각국 정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백신 운송 계약을 맺었고, 독일 내 코로나19 백신의 저장과 유통까지 책임지고 있다. 우리는 20년간 9000여 명으로 구성된 생명과학 전문가 커뮤니티를 꾸려왔고, 전 세계에 140개 생명과학 인프라 네트워크를 구축한 상태다. 우리는 앞으로 2년간 수십억 인구가 백신을 맞으려면 최대 선적 20만 회, 냉동박스 1500만 회, 항공 수송 1만5000회 등 글로벌 물류 역량이 필요하다고 본다. 글로벌 물류 기업의 힘이 절실한 상황이다.
DHL 직원만 50여만 명이다. 직원 한 명만 감염돼도 큰 문제가 생기겠다. 그렇다. 지난해부터 전 세계 물류 네트워크 상황을 직접 챙기는 이유다. 매일 아침, 내부와 각국 정부 상황을 파악해 글로벌 수준의 지침을 만들어 공유했다. 24시간 풀가동 체제였다. 의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는 마스크, 방호복 같은 기본적인 방역 도구부터 선제적으로 공급했다. DHL의 각종 위기관리 프로세스를 점검하고 보완하는 계기였다. 세계 경제 정상화를 위해 배송을 멈출 수 없었지만, 세계 220여 개국 DHL 조직에서 일하는 직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20억 유로 투자한 ‘디지털화’
▎ 사진:DHL 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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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L에도 변화가 있다고 들었다.판도를 바꿀 만한 묘책이나 혁신은 아니지만, 작은 변화는 무수히 많았다. 인공지능(AI) 기술을 도입해 조종사가 더 안전하고 연료를 절약할 수 있는 항로를 찾거나 물류 네트워크 데이터를 디지털화하는 식이다. 이 사업에 20억 유로(2조7575억원)나 투자했다. 매년 수억 개가 넘는 택배가 오가는 상황을 사람의 손으로 다 통제할 수 없기에 택배의 위치와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자 디지털화 사업을 본격화했다. 물류 최적화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대학에서 신경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고, 맥킨지에서 컨설턴트로도 활약했다. DHL에서 하는 일과는 아주 다르겠다.조언하는 직업(컨설턴트)보다 직접 경영하는 게 훨씬 더 즐겁다(.웃음)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고민을 하는 건 비슷하지만, 결정에 책임을 지는 면에서 CEO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나도 인간인지라 13년간 CEO로 일하면서 수많은 실패와 실수를 저질렀다. 거울을 보며 “좋아, 당신이 결정했어.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져야 해.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고!”라고 외치며 마음을 다잡는 경우도 많았다. 힘들었지만, CEO로 일한 건 행운이다. 2008년부터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했다.
2008년이면 DHL이 매우 어려웠을 때다.가장 어려웠던 결정을 내렸던 때가 아닐까 싶다. 미국 사업부서를 줄일 때 대규모 구조조정을 해야 했고, 많은 이에게 직장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해야 했다. 반대 의견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도 고통스럽다. 물론 지금 미국 내 특송 업무만 안 할 뿐이지 미국을 들고나는 수출입 업무를 하고 있다. 인도, 멕시코, 러시아에서는 특송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수합병만 하면 시너지가 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부른 일이었다.
이런 경험 이후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생겼다면.무엇보다 직원 중심의 기업문화 조성에 힘썼다. 누군가는 보여주기식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항공기를 늘리거나 물류센터를 짓는 일은 어떤 기업도 할 수 있지만, 기업문화를 갈고닦는 건 오랜 시간과 노력이 수반되는 일이다. 이런 노력이 DHL의 서비스를 질적으로 발전시킨다고 믿는다.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이 고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전가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직원을 붙잡고 “지난 1~2년간 DHL에서 좋은 점이 뭐냐”고 물었다. 아예 한국, 미국, 독일 등 모든 직원에게 매년 한 차례 이상 설문조사를 했다. 좋은 점뿐만 아니라 회사의 능력이나 리더십을 평가하는 항목도 넣었다. 우리의 문제점을 파악할 기회다. 큰 회사를 운영하는 CEO라면 잘 들어야 한다.
세계 경제, 곧 정상화될까.코로나19가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잘못하면 수십 년 만에 최악의 경제공황으로 이어질 뻔했다. 아무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 세계 공중 보건 분야에서 거둔 성과로 백신을 개발했고,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정상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 상태로라면 빠르면 올해부터 세계 경제가 살아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신이 승인돼 빠르게 보급되고 있다. DHL은 백신을 보급하는 데 그 누구보다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