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유틸리티 차량으로서 명성을 떨친 지프의 레거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지프에서 오프로더 색이 가장 강한 랭글러의 또 다른 아이코닉 아일랜더가 열대 해변의 새로운 미학으로 11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1988년 랭글러 YJ 모델로 첫선을 보인 ‘아일랜더’ 에디션은 2010년 랭글러 JK 모델 에디션 모델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11년 만에 부활한, 지프의 전설적인 4×4 성능과 함께 푸른 바다와 해변에 어울릴 만한 개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아일랜더 에디션은 국내 고객들에게는 신선한 첫 경험일 수 있겠다. 지난 4월 국내 50대 한정판으로 선보인 아일랜더 에디션을 시승했다.개인적으로 지프차는 처음 시승해보는데 외형 디자인은 익숙해도 실제 크기는 압도적이다. 덩치와 달리 보닛 측면과 후면의 여분 타이어 커버에 새겨진, 폴리네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티키(Tiki)를 모티브로 만든 독자적인 캐릭터 ‘티키 밥’이 익살스럽다. 지프 랭글러 스포츠 4도어를 바탕으로 제작된 아일랜더 에디션은 기존 할로겐 램프에서 업그레이드된 LED 램프, 17인치 실버 알루미늄 휠이 다른 버전과의 차별점이다. 특히 외관과 통일감이 있는 세라믹 화이트 계기판이 앙증맞다.소프트톱은 운전석과 조수석의 잠금장치만 풀면 후루룩 뒤로 제껴져 오픈할 수 있으며 문 4개도 다 떼어버릴 수 있도록 문고리의 나사도 바깥면에 있다. 문을 다떼내고 천장을 열고 (마치 군용 지프처럼) 해변에서 달려보고 싶은 욕망이 확 밀려왔지만, 실제로는 문은 떼내지 않고 소프트톱만 걷어내고 시승해봤다.
시승 구간은 서울 강남에서 가평, 청평의 호명산 정상, 자라섬 캠핑장까지 돌고 오는 왕복 약 150㎞ 구간이다. 도심에서 매끈한 대형 럭셔리 SUV는 조심조심 몰아야 할 듯한 느낌이 있지만, 랭글러는 거침없이 과감히 몰아야 진가가 발휘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큰 차 운전에 편안함을 느꼈다. 일례로 식당 주차장에서 보도를 거쳐 도로로 나올 때 경계석 높이가 낮은 곳을 찾아 나오느라 차의 각도를 힘들게 빼곤 했는데, 랭글러로는 보도와 도로의 높이 차이를 무릅쓰고 과감히 넘어 봤다. 도심 속 작은 와일드라고나 할까.
올림픽도로 구간에서 속도를 높일 때 액셀을 꾹 밟으면 한 박자 늦게 튕겨나가는 감이 있지만, 안정적인 가속은 만족스럽다. 승차감에서 매끈하게 달리는 느낌은 애초에 이 차에 기대하지 않았기에 역동적인 흔들림이 오히려 지프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한다. 다만 터널을 통과할 때 소프트톱을 덮어도 크게 들려오는 풍절음은 다소 적응이 안 된다.청평호를 따라 달리는 회전 구간과 호명산 오르막길에서의 가속력, 제동력, 핸들링은 ‘아, 이 맛이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이내믹하다. 지프는 미국에서 오너들이 오프로드 주행을 학습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지프 어드벤처 아카데미(Jeep Adventure Academy)를 202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하루 세션에 99달러를 내면 지프 4×4의 기본 사항, 운전기술, 차량 준비, 지형과 도전적 장애물 안전팁, 트레일 에티켓 등 오프로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지프 애호가를 위해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지프는 편의 기능으로는 스마트키 시스템, 전/후 센서 주차 보조 시스템, 사각지대 모니터링 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다. 차량에 내비게이션 기능이 없어 한참을 찾았는데, 스마트폰과 연동하면 티맵 안내를 중앙 스크린에 띄워 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랭글러의 공인 연비는 10㎞/ℓ이지만 시승 기간에 측정한 연비는 평균 8.1㎞/ℓ이었다. 개성을 추구하는 운전자에게 지프, 랭글러, 아일랜더라는 3단계 계층적 조합은 운전자의 정체성을 꽤 강하게 뽐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진원 기자 lee.zinon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