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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34) 돌과 나무의 작가, 최병훈 

작가는 묻는다, 작품을 보고 가슴이 뛰는가 

정형모 전문기자
지난 7월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의 전시 1동 안내데스크는 묘하게 생겼다. 벽에 붙은 나무 장에는 고색창연한 분위기와 현대적 감성이 동시에 배어 있고, 길이 4m가 넘는 테이블은 거친 돌모래 표면과 반질반질 반짝이는 검정 바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돌덩어리다. 최병훈(69) 전 홍익대 미대 학장의 작품 ‘태초의 잔상’ 시리즈다. 관람객들이 박물관 곳곳에서 공예가들의 작품을 직접 만지고 느끼면서 질감과 스타일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한 기획력이 이 작품에서 십분 발휘됐다. 작가 최병훈의 대표작 30여 점을 즐길 수 있는 전시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이름하여 ‘침묵의 메시지(A Silent Message·11월 12일~12월 12일)’다.

▎최병훈 작가는 돌과나무를 섞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강원도 태백에서 한의사 집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소년은 넓은 세상이 궁금했다.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와 미술반에 들어간 뒤, 그의 꿈은 디자이너가 됐다. 바야흐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수출 보국’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던 시절이었다. 홍익대 응용미술학과 4학년 때 작가들의 등용문이라 불리던 ‘국전’에 덜컥 입선하면서, 그는 디자인과 아트의 구분과 결합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됐다.

ROTC 제대 후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디자인실에서 근무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우리 물건을 팔기 위해 관용여권을 들고 세계 곳곳으로 출장을 떠난 스물예닐곱 젊은이는 멕시코의 마야문명, 아프리카 세네갈의 원시예술, 페루의 잉카문명 앞에서 그저 경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리비아 출장길에 경유한 로마 시내에서 만난 고대 유적지 돌무더기가 준 충격도 빼놓을 수 없다.

“엄청난 행운이었죠. 그 나이에 인류의 문명을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었다는 것이요. 정말 가슴이 뛰고 소름이 돋았어요. 그때 깨달았죠.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지구 반대편에도 엄청난 게 있구나’. 그 뒤로 오래된 유적지나 폐사 터를 탐방하는 게 제 여행의 기준이 됐어요.”

두 번째 기회는 1987년 제2회 대한민국공예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었다. “그때 핀란드 해외여행권을 부상으로 받았어요. 경기대 교수 시절이었는데, 덕분에 1988년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 미대에서 연구교수로 지내며 유럽의 최신 디자인 경향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이듬해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 객원교수까지 역임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진력했다.

20대에 세계 곳곳에서 목도한 인류 문명에 전율


▎태초의 잔상 021-568’(2021), 248×69×63㎝, basalt./ 사진:가나아트센터
최병훈의 작품은 공예이면서 가구이자 조각이다. 즉, 특정 장르로 구분하고 한정하는 건 부질없다는 얘기다. 1993년 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그는 자신을 ‘아트 퍼니처’ 작가라고 소개했다. 나무는 물론 아크릴과 알루미늄까지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제가 목공예 작가인데, 꼭 나무만 사용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국에서 처음으로 ‘아트 퍼니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정신이 그의 작품세계를 꿰는 화두가 됐다. 이런 철학이 담긴 작품을 프랑스 파리 최고의 예술 가구 전문 갤러리인 ‘다운타운 갤러리’가 눈여겨보았고 1996년 첫 전시를 열었다.

“제 전시 오프닝 날 아침에 근처에 있는 다른 갤러리들을 둘러보았어요. 그리고 제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로 들어갔는데, 제 작품들은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유럽 작가들의 작품과 확실히 달랐어요. ‘아, 이런 담백함 때문에 내 작품을 전시하겠다고 했구나, 앞으로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를 현장에서 깨달았죠.”


▎‘태초의 잔상 019-519’(2019), 56×33×80㎝, black urethane finish on red oak, scholar stone./ 사진:가나아트센터
2012년 무렵,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조경용으로 국내에 수입된 인도네시아산 현무암 ‘바잘트(basalt)’를 접하게 된 것이다. 모래흙으로 만든 듯한 돌 껍질 속에 검디검고 매끈하고 단단한 ‘속살’을 가진, 특이한 돌이었다. “처음에 한 덩어리를 사서 2년 정도 보고만 있었어요. 이걸 어떻게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러다가 서예의 ‘일필휘지’ 느낌을 살려, 붓획을 긋듯 검은색 속살을 드러내고자 했죠.”

2014년 뉴욕 프리드먼 벤다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들은 거친 돌덩어리에 새겨진 굽이치는 계곡물과 잔잔한 호수의 명경지수 같은 작품을 보며, 명상에 빠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수억 년의 시간이 응집된 대상이잖아요. 거기에 제 감성과 터치를 더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주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을 ‘침묵의 메시지’라고 붙인 이유는 “어지럽고 요란한 세상에 침묵이 주는 의미를 전해주고 싶어서”다. 지금까지 해온 ‘태초의 잔상(Afterimage of Beginning)’ 시리즈의 최신작 중심으로 내놨다.


▎‘태초의 잔상 021-582’(2021), 193×51×80㎝, black urethane finish on ash basalt natural stone./ 사진:가나아트센터
3개 전시장은 각각 ‘빈장의 공간’, ‘빈상의 공간’, ‘빈좌의 공간’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빈’은 ‘비어 있다’는 의미일 수도, ‘빛난다(彬)’는 뜻일 수도 있다. ‘장’은 물건을 넣어두는 가구, ‘상’은 작은 테이블, ‘좌’는 긴 의자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전시장을 점령한 최병훈의 작품들은 그러나 침묵하지 않는다. 검정 우레탄으로 마감한 미국산 물푸레나무는 표면 위로 우아한 나뭇결을 드러내고, 울그락불그락한 형상의 괴석과 모래흙 속에 ‘먹’을 숨긴 인도네시아산 현무암은 그런 나무를 듬직하게 떠받치고 있다. 나무와 돌, 원시와 현대, 자연과 인공, 반질반질함과 까끌까끌함, 무광택과 윤기가 자르르하게 흐르는 옻칠 등 서로 극렬하게 대비되는 요소가 절묘한 충돌과 균형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상념에 빠지게 한다. 장롱 문을 열면 수석이 튀어나오는 유머도 빛난다.

신소재 박람회에 젊은 예술가들 불러주길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모습./ 사진:가나아트센터
지난해 11월 미국 휴스턴미술관 신관 개관에 맞춰 그는 올라퍼 엘리아슨, 아이 웨이웨이 등 세계적인 작가 8명과 함께 의뢰받은 조각작품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선비의 길(Scholar’s Way)’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바잘트 조각 세 점이었다. “처음에 요청을 받고 깜짝 놀랐어요. 조각가도 아닌 내게 조각을 의뢰하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마음대로 만들어주세요’라는 말을 듣고 ‘이게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구나’ 생각했죠.”

정년 퇴임을 한 지도 몇 년이 지났지만, 그는 회고전을 할 생각이 없다. 회고전은 커녕, 매년 베니스비엔날레 같은 세계적인 미술 행사에는 반드시 참석한다. 거기에는 “내 작품보다 더 훌륭한 작품들이 등장해 내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탓에 최근 2년간 베니스에는 가지 못했지만, 대신 방향을 국내로 돌렸다. 최근에는 광주광역시 일원에서 열린 수묵비엔날레에도 다녀왔다.

‘가슴 뛰는 일’은 곧 새로움을 찾는 일이다. 그의 작품 중에 ‘명상의자’라 불리는 것이 있다. 계단처럼 구불구불하게 생겼는데, 맨 왼쪽 바닥을 검정 화강암으로 고정해 의자에 앉으면 저절로 돌과 시선을 맞추게 된다. 독일의 비트라 디자인미술관에서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래 스틸로 만들었는데, 앉으니 자꾸 주저앉더라고요. 포스코연구소에 자문도 해봤는데, 별 소용이 없었죠. 그래서 합판으로 교체했더니 텐션은 많이 좋아졌어요. 그런데 몇 년 전 세계적인 디자이너 론 아라드가 국내에서 전시를 했는데, 카본 파이저라는 신소재를 쓰더라고. 이건 또 뭔가 싶어 이리저리 알아보고 저도 사용하기 시작했죠. 이탈리아 같은 나라가 디자인 강국으로 꼽히는 이유는, 신소재 박람회를 할 때 꼭 예술 작가들을 부른다는 점이에요. 우리 젊은 작가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이 얼마나 신이 나서 창의력을 발휘하겠어요.”

경기도 파주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다양한 기물이 있다. 곁에 두고 늘 보면서 “시각적으로 흡입한다”고 했다. 미적 경험이 쌓이면 되새김질하듯 ‘내 것’이 되어 나온다면서.

“작가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저는 지금 돌 찾는 여행을 하고 있어요. ‘전국 수석(水石)지도’도 만들어놓았죠. 좋은 돌을 만나면 제 가슴이 뛰겠죠. 저의 종점이 어딜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 정형모 전문기자&중앙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 hyung@joongang.co.kr·사진 신인섭 기자

202112호 (202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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