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캄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전자음악 혹은 컴퓨터음악 연구소다.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연구소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을 것이고, 예술의 현대화에 기여할 것이며, 첨단 과학기술을 자극하는 실험적 예술 활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일캄과 퐁피두센터. 왼쪽이 일캄 건물이고 오른쪽이 퐁피두센터이다. / 사진:주미 프랑스 대사관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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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캄(IRCAM)은 영어 ‘Institute for Research and Coordination in Acoustics/Music’의 이니셜이다. 프랑스어로는 ‘Institut de recherche et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이다. 직역하면 ‘음향학과 음악의 연구 및 상호 조정을 위한 연구소’쯤 된다. 일캄은 퐁피두센터 정문을 바라볼 때 그 오른쪽에 있으며, 센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퐁피두센터 혹은 조르주 퐁피두센터에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공공 정보도서관이라는 구성 요소도 있다. 프랑스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붙인 이 현대적 건물은 파리 중심가에 있다.조르주 퐁피두(Georges-Jean-Raymond Pompidou)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프랑스 19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드골 대통령 시절 총리를 역임했던 그는 정치적으로는 온건 보수파였다고 한다. 대통령 시절, 파리에서 보기 힘든 고층 건물 몽파르나스타워를 지었고, 그곳에 레알(Les Halles) 지구의 노천 재래시장을 옮겨 오는 등 파리를 현대화했다. 레알 지구는 동쪽에 인접해 있는 보부르(Beaubourg) 지역과 함께 파리의 슬럼가였는데, 퐁피두는 이 슬럼가를 개발하기 위해 센터를 만들었다. 센터 건립에는 뉴욕에 대항할 예술적 거리를 조성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으며, 낡은 도서관을 수많은 도서를 비치할 크고 현대적인 도서관으로 만들겠다는 의도 역시 있었다. 퐁피두센터의 연간 방문자가 종종 루브르박물관 방문자보다 더 많은 걸 보면 이 의도들은 어느 정도 실현된 듯하다. 명실상부한 파리의 대표적 명소인데, 에펠탑이나 여러 박물관과 달리 현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특징이다.퐁피두 대통령은 음악의 연구·공연 등을 위한 센터를 추가하여 국립 현대미술관, 공공 정보도서관과 연결함으로써 퐁피두센터가 다학제적이며 융합적인 연구와 창조를 위한 장소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 생각을 실현하려고 퐁피두 대통령은 당대 최고의 현대음악가 피에르 블레즈에게 일캄을 운영해달라고 요청했다. 1970년의 일이다. 현대음악 작곡가로, 지휘자로, 음악학자로 인정을 받아온 블레즈는 일캄의 초대 대표로 취임해 일캄을 독특한 연구·공연 기관으로 만들었다. 일캄은 음향학 같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음악가들이 공생하는 국립 연구소다. 그곳에서 음악가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실현하고자 존재하지 않는 첨단의 음악적 도구를 과학자들에게 만들어달라고 주문한다. 과학자들은 첨단의 음악적 도구를 음악가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음악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곡가의 창조적 과정을 뇌과학으로 연구
▎일캄 내부 콘서트홀. 이 음악회장은 ‘조절 가능한 모듈적 음악 홀’이라는 개념을 구현한 사례다. 대부분의 연주회장과 달리, 이 음악회장의 관객석은 건축적 모듈들을 특정하게 조립함으로써 달라질 수 있다. 연주되는 곡의 특성에 맞게 천장의 높이나 벽면의 양감(量感) 등을 바꿀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음향이 달라진다. / 사진:일캄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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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활동을 생각해보자. 작곡가가 머릿속에서 악상 혹은 음악적 생각을 고안해낸 후 그것을 악보에 적는다. 연주자들은 공연장에서 각자의 악기를 들고 그 악보에 따라 연주하고, 공연장에 온 청중들이 음악을 듣는다.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각자의 집에서 녹음된 음악을 듣는다. 이러한 사회적·과학적 과정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작곡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과정을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연구할 수 있다. 그 창조적 과정의 결실로 악보가 만들어지는데, 오늘날 거의 모든 작곡가는 예전과 달리 종이 위 오선지가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에 뜬 오선 악보에 커서와 자판을 이용해 음을 기재한다. 이를 위해 컴퓨터에서 오선 악보를 띄어주는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져야 한다. 여러 기업에서 이런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다. 그 덕분에 무대 위 연주자들이 종이 악보를 보면대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고풍스러운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태블릿 패드 같은 디스플레이를 보면대 위에서 작동한 후 그것을 보고 연주하는 세상이 되어 서점에 가서 종이 악보를 사는 일도 드물어졌다. 이러한 소프트웨어는 악보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악보를 저장하는 용도로도 쓰이며, 일종의 전자적 악보 도서관 혹은 데이터베이스가 되고 있다. 모든 종류의 데이터베이스는 통계적 분석을 허용한다. 고립된 섬으로 존재해왔던 클래식의 여러 작품은 이제 상술한 데이터베이스 속에 저장되어 대규모의 통계적 연구를 기다리게 되었다. 개체에서 드러나지 않는 패턴을 연구하는 것이 학문이라면, 음악 작품들을 대규모로,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우호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연주자가 악보를 보며 연주할 때, 그가 연주하는 악기도 과학의 산물이다. 감미로운 오보에의 코맹맹이 소리, 은은하고 달콤한 플루트의 소리, 유리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피아노의 영롱한 소리, 그윽한 첼로의 소리는 모두 근대적 과학을 발전시킨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물리적 악기가 작동하며 내는 것이다. 작은 바이올린은 어떻게 음악회장 구석구석에 자신의 소리를 전달할 수 있을까. 연주자가 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이올린이 잘 만들어져야 하며, 연주회장도 잘 만들어져야 한다. 아파트를 짓는 건축 기술만으로는 최고 수준의 콘서트홀을 만들지 못한다. 건설사에 음악적 음향학에 정통한 이가 많아야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콘서트홀의 물리적 구조를 연구하는 학자가 있어야 한다. 그 학자는 기본적으로는 과학자 혹은 공학자이겠지만, 음악에도 꽤 조예가 깊어야 한다. 일캄에서는 이러한 과학자가 음악가들과 대화하며 연구한다. 거기서는 최고의 음향을 내는 바이올린 같은 악기의 물리적 특성도 연구한다. 모든 악기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연구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악기와 그것의 물리적 진동으로서의 연주를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어떤 악기 연주의 녹음만을 물리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원인을 연구하는 첫 번째 연구를 통해 악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악기를 연주하는 로봇도 만들 수 있다. 악기를 만들어내는 과학을 발전시켜 스트라디바리우스보다 더 좋은 바이올린, 스타인웨이 피아노보다 더 좋은 피아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참고로, 2027년 세계 악기산업 매출액은 약 180억 달러(20조1000억원)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악기를 연주하는 로봇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간 동작들과 그 동작들의 일련의 명령어들을 만들어내는 연주자의 뇌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결과를 연구하는 두 번째 연구를 통해 어떤 악기 연주의 녹음을 물리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음향을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신시사이저라고 알려진 이 소프트웨어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오늘날, 거대한 피아노라는 물리적 몸체가 들어가 있지 않은 자그마한 컴퓨터 안에서 피아노 소리를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가 구동될 수 있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가 내는 소리, 세상의 모든 소리를 그것의 원인인 물리적 실체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이제 세상에 없는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현의 길이가 1㎞에 달하는 현악기의 소리를 컴퓨터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연구를 일캄이 하고 있다. 오늘날 스타인웨이와 더불어 고급 피아노를 제작·수출하는 일본 기업 야마하가 1970년 대에 신시사이저 시장에 진출하여 기존 강자인 유럽 회사들을 시장에서 몰아냈는데, 그 동력이 일캄에서 개발한 신시사이저용 소리 합성 알고리즘이었다. FM 기법으로 알려진 이 알고리즘을 일캄에서 개발해 야마하에 팔았고 야마하는 그것을 사서 신시사이저에 탑재해 성공했다. 필자가 2018년에 썼듯이(포브스 2018년 2월호) 영화 [파리넬리]의 아리아도 이렇게 합성된 소리였다.
▎일캄의 한 스튜디오에서 32채널 마이크와 스피커 24개를 장착해 피아노의 소리를 분석하고 있다 / 사진:일캄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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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 명이 넘는 인구가 살며 연구를 위한 기금을 모으는 것이 쉬운 미국에서는 주로 대학, 그것도 사립대학교에서 이러한 연구소를 만든다. 인구 7000만 명이 좀 안되는 프랑스는 이러한 연구소의 설립과 운영을 위한 지원을 국가가 담당한다. 일캄이 만들어진 후 유럽의 부국들에서도 일캄과 비슷한 연구소를 개원해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캄처럼 음악에만 특화된 연구소를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차기 정부가 음악뿐 아니라 미술, 무용, 문학, 건축, 사진, 영화, 연극 등 모든 예술에 연결된 과학을 예술과 함께 연구하는 연구소를 개원해주면 좋겠다. 그곳에서 화가는 물감을 만들어내는 첨단의 화학적 방법을 화학자들과 같이 고민하고, 무용가는 자신의 몸 여러 곳에 센서를 달아 현란한 동작을 할 때 그의 몸과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과학자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분야의 예술가들이 과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상상력을 키우고, 예술가들의 요구에 응하는 과학자들은 무언가를 연구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 가칭 <예술과 과학의 융합과 조정 연구소>(Institute for Convergence and Coordination in Science/Art)를 개원해 과학과 예술을 동시에 연구하고 장려하면 좋겠다. 거기서 틈새 과학과 첨단 예술이 연구되어 그에 기초한 실험적 예술활동이 공연·전시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활동을 접함으로써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될 것이며, 사회 전체적으로 창의성과 혁신에 대한 고민이 늘어날 것이다.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 연구소가 자리한 지역에는 든든한 소비자집단이 새로 형성될 것이다. 무엇보다 국격이 높아질 것이다.
※ 김진호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 대학교의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매혹의 음색』(갈무리, 2014)과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갈무리, 2017)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