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24) 

사회적 편견에 굴하지 않고 나를 표현하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클리셰처럼 들리는 이 문장은 더는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곳에서 이와 유사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는 선뜻 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에이나르 베게너 [Poplerne langs Hobro Fjord] 1908.
나는 여러 강연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며 ‘남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조언을 자주하는 편이다. 누구나 첫사랑이 있고 누군가를 사랑했던 경험이 있다.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을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남을 사랑하는 단계는 4가지로 나뉜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간다.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취미는 무엇인지, 주말에는 무엇을 하는지, 어떤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등. 그다음에는 그 사람의 매력을 찾게 된다. 목소리가 좋고, 예의가 바르고, 웃을 때 입술이 사랑스러울 수 있다. 그 사람의 매력에 빠져든 우리는 이제 허락을 구해야 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는지, 계속 함께해도 되는지. 그 뒤로 마지막 단계인 사랑이 시작된다.

나를 사랑하는 과정에서도 이 단계는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부터 막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내가 대인관계에서 절대로 견디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핵심 욕구를 깊이 있게 알아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때 자신의 모습이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모습과 다를 때가 있다. 여자로서 남자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혹은 어른으로서 기대되는 모습에 맞추며 살아간다. 그런데 때로는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모습과 진짜 나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여전히 많은 기성세대는 여자라면 응당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를 바란다.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모성애를 가지고 아이 돌보기에 충실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이 없이 사는 딩크족에게는 불효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비혼주의자는 사회적 패배자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이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성애자가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무수히 많은 편견이 담겨 있다.

우연히 발견한 나


▎게르다 베게너 [발레리나 울라 폴슨] 1927.
덴마크 화가 릴리 엘베(Lili Elbe)의 본명은 에이나르 베게너(Einar Wegener)였다. 그녀는 화가였지만 남성의 몸으로 태어나 세계 최초로 남성에서 여성이 되는 성전환수술을 받은 인물로 더 유명하다. 1930년,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적 의식이 전무하던 시절, 가짜 뒤에 숨겨져 있던 진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녀는 목숨을 건 수술을 감행했다.

풍경화를 주로 그리던 베게너는 덴마크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알게 된 여성 화가 게르다와 결혼을 했다. 게르다는 보그를 포함한 다양한 패션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1909년 덴마크 신문 폴리티켄이 주최한 미술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재능 있는 화가였다. 한 번은 게르다가 그리고 있던 그림의 모델이 결석을 해 게르다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사건의 발단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림 모델 대신 베게너가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아내의 그림 앞에 섰다.

이전부터 여성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었고 여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던 베게너에게 드레스를 입고 스타킹을 신는 행동은 자신 안에 억눌려 있던 여성성을 마주하는 발단이 되었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사람들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거나 수치스러운 욕망들을 무의식의 세계로 억제하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베게너가 1882년 출생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기에는 사회가 너무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억제해왔던 욕망은 그림이 그려지던 순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감추는 가면을 더는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여성성에 눈뜬 베게너는 자신에게 여성의 이름 ‘릴리엘베’를 붙여주었다.

선택을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


▎게르다 베게너 [릴리 엘베의 초상] 1928.
통상적으로 남편이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이라고 밝혔을 때 보이는 반응과 달리, 게르다는 릴리의 선택을 이해해주었다.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지만, 릴리가 여장을 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지지해주었고, 릴리를 그림의 뮤즈로 자주 등장시켰다. 남성인 동시에 여성인 릴리는 게르다에게 최고의 모델이었고 대중과 비평가들도 그녀의 그림 속 신비로운 여성에게 매료되며 게르다는 화가로서 성공 궤도에 올랐다.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에 게르다는 자신의 사촌동생 릴리라고 소개했다. 여장을 한 릴리와 함께 외출을 하고 파티에 참석하며 두 사람은 뮤즈이자 연인이자 친구로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베게너가 릴리라는 정체성을 발견했을 때 게르다가 그를 혐오하거나 인격을 침해하는 대응을 했더라면 릴리로서의 정체성은 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이 다시 남자로 돌아와 자신을 안아주기를 원하거나 분노를 표출하기를 선택했더라면, 베게너는 아마 과거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남성 작가로서 살아가는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릴리와 베게너의 삶이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게르다 덕에 릴리와 베게너는 균형을 이루며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릴리로서 숨 쉴 수 있는 탈출구를 만들어준 단 한 사람, 게르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험을 감수한 선택


▎게르다 베게너 [창문 앞 두 여성] 1920년대.
당시 여자가 되고 싶다는 남성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는 차가웠다. 의사들은 치료와 입원을 통해 병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릴리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하고자 한 독일인 의사 마그누스 히르슈펠트(Magnus Hirschfeld)를 만날 수 있었다. 릴리는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고환 적출 수술, 음경 제거 수술, 난소와 자궁 이식수술까지 강행했다. 세계 최초의 수술이었던 상황에서 현재도 적용되지 않는 이식수술들까지 진행한 것은 분명 위험한 도전이었다. 수술 후 릴리는 여성의 몸을 얻게 되었고 릴리 일제 엘베네스(Lili Ilse Elvenes)라는 이름으로 새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한국 신문에도 기사가 실렸다. 덴마크에서는 동성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게르다와 릴리의 결혼은 덴마크 왕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1989년 세계 최초로 시민 결합 형태의 동성 커플을 인정한 나라가 덴마크라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1931년 9월 릴리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수술로 인한 거부반응 때문이었다. 9월 13일 그녀는 법이 인정한 여성의 몸으로 숨을 거두었다. 수술로 인해 결국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녀였지만 단 한순간이라도 진짜 여성으로 살고 싶다는 그녀의 꿈은 이루어졌다.

나를 마주할 수 있도록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 1972.
여전히 어렵지만 예전에 비해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지향성을 밝히는 일이 늘었다.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스페인, 덴마크, 프랑스, 호주, 미국의 몇 개 주 등 20여 개가 넘는 국가가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지아니 베르사체, 마크 제이콥스, 이브 생 로랑, 크리스티앙 디오르, 조르조 아르마니, 알렉산더 맥퀸 등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가 동성애자라고 밝혔으며 그들의 예술적 원천으로 자신의 연인을 공개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생존 작가 중 가장 높은 그림 가격을 기록한 영국 작가이다. 호크니는 동성애에 보수적이었던 영국에서 이주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국에서 작업을 했으나 1950년 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동성애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분류되어 이를 들키면 공무원과 군인들은 강제로 해고를 당하던 시기였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는 동성애자임을 숨기지 않았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녹여내어 그림을 그렸다. 그가 자신을 숨기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그의 그림 속에 담긴 진짜 그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대다수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소수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소수자가 약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인은 모두 다른 인격과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반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관음은 관찰을 당하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만 서로 합의한 동성애는 맞고 틀리고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 과거에는 동성애가 성정체성 장애로 분류되었지만 지금은 장애라는 단어도 쓰지 않는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인식도 점차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편견과 시선 속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는 것은 비단 동성애뿐만이 아니다. 오타쿠적인 취향, 나이 많은 사람이 아이돌에게 ‘덕질’하는 것에 대한 편견, 특정 지방 출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해 출신지를 감추기도 하는 등 사소하고는 소수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소수자가 약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인은 모두 다른 인격과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반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관음은 관찰을 당하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만 서로 합의한 동성애는 맞고 틀리고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 과거에는 동성애가 성정체성 장애로 분류되었지만 지금은 장애라는 단어도 쓰지 않는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인식도 점차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편견과 시선 속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는 것은 비단 동성애뿐만이 아니다. 오타쿠적인 취향, 나이 많은 사람이 아이돌에게 ‘덕질’하는 것에 대한 편견, 특정 지방 출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해 출신지를 감추기도 하는 등 사소하고도 다양한 편견이 사회에 만연하다. 그로 인해 진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숨기기도 한다. 반드시 모두에게 자신을 오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베게너가 릴리가 되어 자신만의 탈출구를 찾았듯이 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면 나의 인생은 충분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소울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202호 (20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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