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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체코 프라하(Praha) 

620년 역사와 전설의 카를 다리 

체코 민족의 혼을 담은 블타바강은 카를 다리 아래로 흐른다. 프라하에서 중요한 명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다리는 동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교역로 역할을 했으며 재난을 극복하는 힘과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블타바강과 카를 다리. 강 건너편 언덕 위에 성 비투스 대성당과 프라하 성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우리는 무심코 ‘체코는 동유럽 국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체코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좀 언짢아한다. 그들은 ‘체코는 유럽의 중심’이라고 강변한다. 사실 체코는 중부 유럽에 있고 슬라브족 나라 중에서는 가장 서쪽에 자리한다. 수도 프라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보다 더 서쪽에 있으며, 프라하와 독일 국경 간 직선거리는 불과 8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체코는 서쪽으로는 독일,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길게 맞대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게르만 문화권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메타나가 찬양한 블타바강


체코에서 가장 긴 강은 약 420㎞에 달하는 블타바(Vltava)이다. ‘블타바’는 특히 체코의 국민주의 음악가 스메타나가 1874년에 작곡한 ‘블타바’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강이다. 이 작품은 6곡으로 구성된 그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의 두 번째 곡으로, 체코 국민뿐 아니라 시대와 국경을 넘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스메타나가 음악으로 찬양한 블타바강은 남부 보헤미아 숲에서 흘러나오는 강줄기에 서부 보헤미아 숲에서 흘러나오는 또 하나의 지류가 합류하여 프라하의 중심부를 지난 다음에는 보헤미아 북서쪽으로 흘러가다가 독일의 엘베강과 합류한다.

‘블타바강의 딸’ 프라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 뒤에는 시련의 역사가 스쳐간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체코는 17세기부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주권을 잃었고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따라서 블타바강의 이름도 독일식으로 몰다우(Moldau)가 표준이었다. 또 체코는 20세기에 나치 독일의 점령에 이어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런 격동기 속에서도 프라하는 다행히 파괴되지 않고 아름다운 옛 시가지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체코 민족의 혼을 담고 흐르는 블타바강은 내륙 국가인 체코의 젖줄이지만 가끔 범람하여 아름다운 프라하 시가지에 큰 위협이 되기도 한다.


▎블타바강과 카를 다리. 강 건너편 언덕 위에 성 비투스 대성당과 프라하 성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동유럽과 서유럽을 잇는 돌다리


▎카를 다리가 보이는 블타바강 변에 있는 스메타나 동상. / 사진:정태남
블타바강에는 프라하에서 매력적인 명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돌다리가 놓여 있는데, 완공된 지 올해 꼭 620년이 된다. 이 품위 있는 아치 구조의 돌다리는 폭이 약 10m , 길이는 약 515m로 블타바강 서쪽 지역과 동쪽 지역을 연결한다. 이 다리의 이름은 독일식으로는 ‘카를 다리’이고 체코식으로는 ‘카렐 다리’이다. 같은 이름이라도 나라마다 철자와 발음이 다르다. 라틴어 이름 카롤루스(Carolus)는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Carlo)’,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Carlos)’라고 하고, 독일어권에서는 ‘카를(Karl)’, 체코어에서는 ‘카렐(Karel)’, 프랑스어에서는 ‘샤를(Charles)’이라고 발음한다. 영어권에서는 프랑스식 표기를 그대로 들여와 ‘찰스’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이 다리를 ‘찰스 브리지(Charles Bridge)’라고 한다.

이 다리가 세워지기 전에 블타바강 양안을 잇는 다리가 하나 있었으나 1342년에 홍수로 파괴되어 유실되고 말았다. 프라하는 동유럽과 서유럽을 연결하는 도시인데 교역로를 잇는 다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프라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다가 1346년에 독일계 룩셈부르크 왕가의 카를 4세(1316~78)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했는데, 그는 135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도 즉위하여 프라하를 방대한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프라하를 멋진 문화 중심 도시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강 건너편 언덕 위에 웅대한 성 비투스 대성당을 세우도록 했고, 프라하 시가지를 확장하고 단장했다. 게다가 프라하에 대학도 설립했다. 이를테면 그는 체코의 ‘세종대왕’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는 세종대왕보다는 약 50년 이전 인물이었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카를 다리. / 사진:정태남


카를 4세는 다리가 없어서 배를 타고 블타바강을 건너야 하는 상황을 그냥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성 비투스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은 독일 출신의 페터 파를러에게 블타바강에 새로운 다리 건설을 위임하고는 초석을 정확히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에 놓도록 했다. 유럽에서는 보통 날짜를 월 앞에 쓰기 때문에 초석을 놓은 순간을 년-일-월-시-분 순서로 간략히 정리하면 135797531이라는 아주 재미있는 수열이 된다. 1부터 홀수로 상승하고 뒤에서도 홀수로 상승하고 있는 좌우대칭의 수열이다. 이와 같은 특별한 수열에 맞추어 날짜뿐만 아니라 시간과 분까지 정확히 지키며 초석을 놓은 이유는 카를 4세가 이것이 길조의 수열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사제 얀 네포무츠키 기념상. / 사진:정태남
한편 전설에 따르면 이 다리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석재를 접착하는 모르타르에 계란을 섞었다고 하는데, 이를 위해 카를 4세는 보헤미아의 모든 마을에 계란을 한 수레씩 바치도록 명했다고 한다. 당시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르타르에 어떤 유기물질이 섞여 있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고 한다.

이 다리는 착공한 지 45년이 지난 1402년에야 완공되었다. 하지만 카를 4세는 다리가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378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다리는 처음부터 카를 다리라고 부른 것이 아니고 단순히 ‘돌다리’라고만 불리다가 1870년부터 카를 4세를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사제 얀 네포무츠키의 전설


▎카를 다리에서 본 블타바강 서쪽 지역. / 사진:정태남
이 다리는 단순히 강의 양안을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즉, 사람들을 지나가게 하는 동시에 머물도록 한다. 특히 다리 양쪽에 세워진 성인들의 석상과 다리 양쪽 끝에 세워진 높은 감시탑 때문에 이 다리는 감싸는 듯한 광장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런가 하면, 인적이 드문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이 다리를 걸어가면 전설과 신비에 휩싸이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다리 양쪽 난간에 세워진 성인 30인의 조각상은 마치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데 그중에서 사제 얀 네포무츠키의 청동상은 1683년 이곳에 가장 먼저 세워졌다. 얀 네포무츠키는 왼손으로 십자가를 안고 있고 오른손에는 순교를 상징하는 야자수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뒤의 후광은 황금빛 별 다섯 개로 장식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조각상 아랫부분 오른쪽 청동 부조에서 강물로 떨어지는 얀 네포무츠키와 왕비 소피아가 새겨진 부분에 손을 갖다 대는데, 그렇게 하면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 절대 누설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카를 4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바츨라프 4세는 의심이 많았다. 하루는 왕비 소피아의 정조를 몹시 의심해 얀 네포무츠키에게 왕비가 그에게 고해성사한 내용을 낱낱이 밝히라고 명했다. 하지만 얀 네포무츠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왕은 그를 죽도록 고문하고 혀를 자르고는 그의 시신을 카를 다리에서 블타바 강물에 던져버리도록 했다. 얼마 후 가뭄이 들어 블타바강의 수위가 낮아지자 다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별 다섯 개가 수면 위에 반짝였는데 바로 그 아래에서 네포무츠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전설일 뿐이고, 역사적 실체는 아주 복잡하다.

이렇듯 역사와 전설이 배어 있는 카를 다리는 축조된 이래로 블타바강의 홍수로 인하여 여러 번 손상을 입긴 했지만 무너지지 않고 즉시 복구되었으며, 격랑의 역사 속에서도 지금까지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다리는 프라하가 지닌 신비스러운 힘, 즉 재난을 극복하는 힘과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한 셈이다. 카를 4세가 정한 135797531이 정말 길조의 수열이기 때문일까?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2202호 (20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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