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게임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2012년 나를 포함한 후배 창업가들을 만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故) 김정주 넥슨 창업자(그는 자신을 ‘제이’라고 불러달라 했다)가 자신을 소개하며 했던 말이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넥슨을 ‘조그만 게임 회사’라고 표현하는 데 동의하지 못했다. 참 겸손한 분이라 여겼지만, 이제와 돌아보건대 디즈니나 닌텐도 같은 글로벌 기업을 꿈꾸던 그에게 10년 전 넥슨이 조그만 회사라는 설명은 겸양이 아닌 솔직함이었을 테다.몇 해 후 여름, 제주에서 열린 ‘20세기 한국 컴퓨터 개발 역사 워크숍’에서 제이는 ‘바람의 나라’ 세션을 맡았다. 그는 “인터넷에서 돌아가는 첫 번째 게임으로 시작했고, 새로운 플랫폼과 새로운 기술을 제공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걸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 회사를 꿈꾼다”고 말했다.창업 22년 차에도 제이의 꿈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에 봤을 때보다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이후 다른 자리에서 “디즈니 본사 건물에 일곱 난쟁이가 사는 것을 알고 있느냐”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숨어 있는 무엇,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회사에 스며든 조직문화를 형성하고 가꿔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6년,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내가 업계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회사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첫 사업에서 자그마한 성과를 얻었을 때, 처음엔 ‘내가 잘해서’라는 큰 오해를 했다. 다음번엔 ‘우리 구성원이 잘해줘서’라는 데 생각이 닿았다. 한참을 지나서야 ‘나보다 앞서 시작했던 선배 창업가들의 역할’이 컸음을 깨달았다. 지도조차 없을 때 어찌어찌 첫 번째 루트를 찾아낸 선배,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큰 돌을 치워준 선배, 포장도로를 까는 데 애썼던 선배까지. 당신들이 켜켜이 올린 발판 위에서, 그저 한 발 내디뎠을 따름이더라. 그걸 깨닫고부터는 지금 나와 우리 팀이 쌓아가는 시간도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고 영감이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의 꿈 한 조각쯤은 내게 전이된 게 아닐까.제이는 ‘게임중독이 큰 문제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훌륭한 인재들이 게임만 개발하는 현상’이라고 염려하곤 했다. 지금은 훌륭한 창업가들이 다양한 산업에서 크고 작은 혁신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세상은 제이가 꿈꾸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 세상에 제이는 없다. 그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제이가 평안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