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기술 연구개발(R&D) 사업을 기획하고 평가·관리하는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은 2년여의 시범사업 끝에 올해 ‘산업기술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를 출범했다. 한국이 글로벌 기술 패권을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첨단기술 선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함이다. 이 프로젝트는 중장기 도전·혁신형 R&D로서 초고난도 목표를 위해 실패도 용인하는, 기존에 없던 연구개발 지원체계다. 정양호 KEIT 원장으로부터 이 프로젝트의 큰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정양호 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 서던일리노이대 경제학 박사, 28회 행정고시 합격, 산업자원부 총무팀장, 지식경제부 산업기술정책관, 지식경제부 에너지자원개발정책관,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장, 33대 조달청장, 4대 한국산업기술 평가관리원 원장(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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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프로젝트, 유럽 미래신생기술 플래그십(FET flagship), 일본의 문샷(Moonshot) 등은 주요 선진국이 국가 주도로 운영하는 초고난도(High risk, High return) 연구개발 지원프로그램이다. 목표는 미래 신산업 창출과 신시장 선점이다. 즉, 실패에 대한 비용 및 시간 리스크가 높더라도 성공할 경우 기존 기술력의 역할과 임무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연구와 기술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DARPA가 군사용으로 개발한 아르파 넷(Arpa Net)이 이후에 인터넷의 원조가 된 사례가 대표적이다.정양호 KEIT 원장은 “우리나라는 그동안 성공을 전제하거나 단기간의 성과를 지향하는 연구개발 위주로 지원해왔고 글로벌시장을 추격하는 데만 매진했다”며 “한국이 여러 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정상에 올라선 만큼 이제 더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서는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한계가 산업기술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배경”이라고 설명했다.“프로젝트 이름처럼 중세의 연금술(Alchemy)은 저렴한 금속으로 금을 만들려고 노력하다 그 과정에서 파생된 기술들이 근대 화학의 기반이 됐다는 점을 주목했어요. 5~10년 후에 세상과 기술이 어떻게 바뀔지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기존의 단기성·성과중심형 정부 연구개발 지원정책에는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연금술의 성과처럼 실패를 용인하더라도 연구개발 과정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자산에도 의미를 두는, 기존과 완전히 다른 연구개발 지원 시스템이 바로 산업기술 알키미스트 프로젝트입니다.”이 프로젝트는 지난 2020년 시범사업으로 시작해서 예비타당성조사를 마치고 올해 본격화한다. 향후 2031년까지 10년간 4142억원 규모의 연구개발자금을 투입하는 대형 사업이다. 정 원장은 “대규모 정부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준비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며 “그동안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그랜드챌린지위원회가 혁신 테마를 선정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밝혔다.“미래 먹거리 기술과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꿀 원천기술의 특허 보유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발상부터 바꿔야 했죠. 연구자의 제안을 수용하는 기존 방식을 넘어 미래학자, 인문학자 등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 테마를 먼저 논의했습니다. 이렇게 단계별로 연구 테마를 좁혀나갔고 최종 4개 연구 테마를 선정했습니다. 본연구로 채택된 4개 사업에 학계뿐 아니라 관련 기업들도 참여하도록 해 산학협력 매칭 시스템도 구축했죠. 정확히 미래에 어떤 시장이 열릴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혁신성과 도전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정 원장은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유연성이라고 꼽았다. 그래서 다양한 방법론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최적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3단계 경쟁형 방식을 도입했다. 10년 계획의 연구개발에서 1단계는 개념연구다. 1년간 6배수의 연구기관이 선정되고 연 2억원을 지원한다. 2단계는 선행연구로 1년간 3배수의 연구기관에 연 5억원을 지원한다. 그리고 최종 3단계 본연구에서는 1개 기관에 대해 5년간 연 40억원을 지급한다.
“미국의 유인 달 탐사 프로젝트인 아폴로 계획은 준비단계에서 모든 계산을 했지만, 실제 주행에서는 중간중간 변수에 따라 경로를 새로 계산했죠. 상황 변화에 따라 접근 방식을 새롭게 하니 솔루션에 접근할 수 있었어요. 산업기술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도 단계별 진행 과정에서 미래 시장을 창출할 수 있도록 유연성 있게 설계됐습니다.”유연성을 갖는다는 것은 중도에 실패해도 수렴하고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수정, 보완한다는 의미다. 정 원장은 “의미 있는 실패를 위해서는 실패에서 얻는 것도 많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성공 사례로 국내 착용형 로봇기술이 사이배슬론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사실을 언급하며 “초기 시범사업 단계에서 우리의 로봇기술이 한계가 있었지만 한 단계 한 단계 실패를 극복하며 경쟁우위를 점했다”며 “또 온실가스 대응 기술 등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해가고 있다”고 말했다.“본 프로젝트는 예산으로 약 4000억원이 확보돼 있습니다. 이 재원으로 앞으로 10년간 16개 연구 테마를 지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도출된 성과를 지속적으로 제시할 것이며 사업화에 가까워지면 기업의 투자와 매칭될 것입니다.”이 프로젝트의 기업 멤버십 제도 또한 기존 정부의 원천기술 지원 기술개발이 반영하지 못한 시장 수요를 보완하는 차별점이다. 기업이 연구 테마별로 멤버십 회원에 등록하고 기술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얻으며 시장 수요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뿐 아니라 최종 개발된 기술의 지식재산권(IP) 실시권의 우선협상권을 확보해 사업화로 이어가도록 유도한다. 정 원장은 “사업화 가능성이 높을수록 기업과 정부가 합동으로 지원해 기술 성공률을 높여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등 14개사가 현재 기업 멤버십에 참여 의사를 밝혔고 7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테마도 있다”고 덧붙였다.
4개 테마 선정 및 3개 신규 추가지난 2년간 시범사업에서 10개 테마 중 4개가 본연구 테마로 선정됐다. ▶B2X(생각으로 외부기기를 제어 쌍방향 인터페이스) ▶면역거부반응 없는 소프트 임플란트▶AI 기반 초임계 소재▶아티피셜 에코푸드(인공육)이다. 여기에 올해 3개 테마가 추가된다. ‘고령화, 무경계, 지속가능’이라는 미래 사회 이슈에서 발굴한 ▶노화 역전 ▶초실감 메타버스 시각화 ▶생체모방 탄소 자원화가 신규 선정됐다. 테마별로 개념연구 6개 과제, 총 18개가 추진된다.“그랜드챌린지위원회가 백캐스팅* 기획을 통해 논의하고 선정한 3가지 추가 테마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첫째, 노화역전은 항노화(Anti-aging)를 넘어 젊음과 건강을 되찾기 위한 기술으로 초고난도입니다. 둘째, 초실감 메타버스 시각화는 인간의 시각인지 한계에 도전하는 기술들이죠. 셋째, 생체모방 탄소 자원화는 전 세계적 경제 트렌드인 ESG를 위해 탄소저감 기술 중 생물체의 메커니즘을 모방해 친환경적으로 탄소를 포집하고 자원화하는 기술입니다.
*백캐스팅: 미래에 달성하고자 하는 상황을 미리 설정하고 그에 도달하기 위해 현재 어떤 일을 시행하면 향후 어떤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통해 미리 설정된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지 여부를 검토하는 방법론.정 원장은 “신정부의 연구개발 기조는 크게 국가 난제 해결을 위한 창의·도전적 연구 확대, 기업과 시장이 주도하는 산업의 혁신 성장, 디지털 전환 및 융합을 통한 신시장·신산업 육성 등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산업기술 알키미스트 프로젝트는 이에 가장 부합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신정부의 기조는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에 선택과 집중,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또 창의·도전적 연구개발, 오픈 이노베이션 등을 강조합니다. 산업부와 KEIT도 같은 마인드를 갖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신정부에서 현재 사업이 하나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조달청장을 지낸 정 원장은 취임 후 지난 3년간 일본과의 무역분쟁으로 인한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디지털 전환 가속화, 탄소중립 2050 등 역사적 이슈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소부장 국산화 연구개발과 관련해 주요 기술개발 외에도 수습할 추가 이슈가 많았어요. 납품, 품질확보 추가 노력, 수요기업 연구, 인허가 시스템 등이었죠.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발점이 됐지만 연구개발의 힘으로 성과를 남긴 좋은 선례라고 생각해요. 또 코로나19 상황에서 연구개발의 많은 요소가 온라인 시스템으로 구축됐어요. 기술평가, 연구기획, 세계수출동향정보, 혁신 인재 정보, 평가위원 섭외 자동화 등 기술개발과 관련된 여러 업무를 자동화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껴요.”공직자로서 리더로서의 철학을 묻는 질문에 그는 “산업부 공직생활 31년 동안 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영향력을 끼치고 반영되는지를 많이 체감할 수 있었다”며 “그래서 정책과 현장의 괴리와 병목현상을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해왔고 실천하려 노력했다”고 답했다.- 이진원 기자 lee.zinone@joongang.co.kr·사진 정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