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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의 TRAVEL & CULTURE | 체코 프라하(Praha) 

격동의 체코 역사를 증언하는 얀 후스 기념상 

프라하의 심장인 구시가지 광장은 유럽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 광장은 체코가 겪은 격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 광장에 세워진 종교개혁자 얀 후스 기념상은 외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자 더 나아가 독립과 자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얀 후스 순교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상. / 사진:정태남
유럽 심장부에 자리 잡은 프라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를테면 프라하는 ‘블타바강 변에 핀 보헤미아의 꽃’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프라하의 심장은 구시가지 광장이다. 프라하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이곳은 특히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절기에 맞는 전통시장이 열리는데, 이때 이 광장은 더욱 더 매력적인 도시 공간으로 변모한다. 또 이 광장은 격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프라하의 심장 구시가지 광장


▎당당한 모습의 얀 후스. 뒤쪽에 있는 성 미쿨라슈 성당은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하에 세워졌다. / 사진:정태남
이 광장은 11세기에 시장으로 조성된 이래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으로 변모해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손꼽힌다. 어떻게 보면 이 광장은 시대와 양식이 다른 건축물들의 전시장 같다.

예를 들면, 독일 건축가 집안 출신의 보헤미아 건축가 킬리안딘첸호퍼가 세운 바로크양식의 성 미쿨라슈 성당과 로코코양식으로 장식된 킨스키 궁은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듯하고, 프라하의 지붕선을 뚫고 하늘로 높이 솟은 틴(Tyn) 성당의 쌍둥이 첨탑은 엄숙한 모습으로 이 광장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틴 성당은 12세기 초에 이곳에 있던 성당을 14세기부터 15세기 중반에 걸쳐 오늘날 우리가 보듯 수직성이 매우 강한 고딕양식으로 개축한 건축물이다. 이 성당의 정식 이름은 ‘틴 앞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다. ‘틴 앞’이라고 한 것은 이 성당 자리가 원래 외국 상인들이 체류하던 틴 중정 앞이기 때문이다. 이 성당 앞 구시가지 광장에 면해 있는, 지붕선이 특이한 건물은 ‘틴 학교’이다. 이 건물은 틴 성당이 세워진 후에 르네상스풍으로 세워졌다.


▎구시가지 광장의 야경. 왼쪽에 구 시청사 탑의 천문시계가 보인다. / 사진:정태남
이 광장에서는 고딕양식의 구 시청사 탑이 서쪽 하늘의 실루엣을 이루는데, 이 탑에 올라가면 구시가지 광장을 바로 내려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프라하 시가지 전경도 조망할 수 있다. 구 시청사 탑은 천문시계로 더욱 유명하다. 탑의 남쪽 면에는 중세의 천동설을 바탕으로 만든 천문시계와 그 바로 밑에 계절에 따른 보헤미아의 농경생활을 주제로 일 년 열두 달을 표시한 일종의 달력이 있다. 동화에서나 나올 듯한 이 천문시계는 현지에서는 간단히 오를로이(Orloj)라고 한다. 오를로이는 정교하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톱니바퀴로 작동되기 때문에 내부 구조가 아주 복잡하다. 즉, 이를 제작하기 위해 고도의 수학적 계산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1410년 10월 이 오를로이가 처음 선보였을 당시 이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환호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프라하 시장은 이 시계를 제작한 명장 하누슈가 다른 도시에도 이런 명품을 만들까 봐 두려워서 그의 눈을 뽑아버리도록 했다고 한다.

얀 후스의 종교개혁


▎구 시청사 탑에서 내려다본 구시가지 광장의 얀 후스 기념상(왼쪽)과 틴 성당. / 사진:정태남
오를로이가 선보이던 무렵 체코 역사에서 아주 굵직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 광장 북쪽에는 그 사건의 주인공 얀 후스(Jan Hus, 1370년경~1415)를 기리는 커다란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이 기념상은 얀 후스와 군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당한 모습으로 홀로 우뚝 서 있는 얀 후스는 틴 성당 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벽에는 체코어로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기원하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사제이자 프라하 카렐대학 총장이었던 그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 올리기 100여 년 전에 먼저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운 주역으로, 체코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당시 라틴어 미사의 틀을 깨고 일반 대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체코어로 미사를 집전했고, 체코어 찬송가를 보급했다. 또 그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부패한 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성서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기독교를 꿈꾸며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농민에서부터 부유한 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층으로 늘어났다. 마침내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되고 1414년 11월에는 남부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회의에 소환되었다.


▎얀 후스가 시선을 던지는 틴 성당. / 사진:정태남
그는 도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기스문트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신변 보장을 약속 받았기 때문에 콘스탄츠에 가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려 했다. 하지만 신변 보장 약속은 한갓 함정이었을 뿐이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이단으로 몰려 체포되었고 70일 이상 구금된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1415년 7월 6일 그는 화형대 위에서 종교 당국의 회유를 거부하고 끝까지 진리를 지키려는 순교자의 자세로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는 불길 속에서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후세 사람들은 말했다. 신이 그에게 “저들이 지금 거위의 입을 틀어막지만, 나는 100년 후에 너의 재에서 백조가 태어나게 하리라. 그때는 아무도 입을 막지 못하리라”라고 약속했을 것이라고. 후스(Hus)는 체코어로 ‘거위’란 뜻이고 100년 뒤에 나타난 백조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의미한다.

얀 후스의 죽음이 알려지자 후스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크게 분개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체코 민족에 대한 탄압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419년, 동요한 후스의 추종자들은 시청으로 달려가 시의회 의원들을 구 시청사 창문에서 광장 바닥으로 내던지고,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리하여 ‘후스 전쟁’이 발발하여 15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틴 성당은 바로 후스 추종자들, 즉 후스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성전이었다.

후스파는 틴 성당 정면 상부에 커다란 황금성배 형상을 올려두었는데, 이것은 가톨릭교회에서 성직자와 특권층에게만 빵과 포도주를 주는 성찬예식에 반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것을 상징했다. 하지만 후스 전쟁은 후스파의 내부 분열로 인하여 패배로 끝났고, 체코에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김이 강해졌다. 이에 따라 황금성배는 녹여져서 성모 마리아의 형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얀 후스 기념상


▎얀 후스 기념상 실루엣. / 사진:정태남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얀 후스 순교 500주년을 앞두고 기념상 건립 계획을 추진했고 체코 조각가 샬로운이 제작을 맡았다. 이 기념상의 제막식은 얀 후스 순교 500주년 기념일인 1915년 7월 6일에 있었는데 제막식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행사였을 뿐이다. 당시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 중이어서 사회적으로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던 이유도 있지만, 이 기념상이 반(反)가톨릭적인 성격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지배자 오스트리아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프라하 시민들은 제막 축제를 대신하여 각자 꽃 한 송이를 들고 와 이곳에 조용히 바쳤다. 그 이래로 이 기념상은 외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자 더 나아가 독립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이 기념상을 보면 얀 후스를 중심으로 좌우에 체코 사람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왼쪽에는 후스파 전사들, 오른쪽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보인다. 그런데 여인과 아기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일까? 아니면, 새로 태어나는 체코를 상징한 것일까? 수세기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온 체코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비로소 슬로바키아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으로 독립국을 세울 수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조용히 갈라졌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작가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분야 외에도 미술, 음악, 역사, 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로마를 중심으로 30년 이상 유럽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에 여러 권이 있다.(culturebox@naver.com)

202207호 (202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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