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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택 세운철강 회장] 존경받는 기업가의 조건 

 

한 사람의 이력이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을까. 신정택 세운철강 회장은 부산을 대표하는 중견기업인이자,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큰 일꾼’이다. 철강 가공이라는 본업에서는 남다른 통찰로, 지역사회에선 신뢰로 쌓아온 성공의 열쇠 말을 직접 물었다.

‘석유왕’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는 미국의 근대 경제를 상징하는 기업가다. 반독점법 적용으로 인해 그룹이 해체되었을 만큼 무자비한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악명을 떨쳤지만, 1890년대 후반부터 세상을 떠난 1937년까지는 현직을 떠나 오로지 자선사업가로서 남은 생을 살았다. 1892년에는 시카고대학교 설립을 위해 8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록펠러의학연구소(록펠러대학교의 전신)를 뉴욕시에 세웠다. 또 록펠러재단을 비롯해 유명 자선기관을 여럿 설립했는데, 그가 일생 동안 기부한 금액만 5억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

록펠러의 여러 자선활동 중 재미있는 일화가 뉴욕의 상수도 건설이다. 록펠러는 가난하든 부자든 누구나 물은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뉴욕시에 거액을 기부했다. 그 결과 지금도 뉴욕의 수돗물은 모든 시민에게 공짜다. 록펠러의 삶은 한 사람의 기업가가 세상의 변화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부산에 터를 잡은 이라면 미국의 록펠러 못지않게 ‘부산의 신정택’이라는 이름 석 자를 자주 들었을 것이다. 신정택 회장은 지난 1978년 부산에 세운철강을 세운 이래 오로지 철강 외길을 걸어온 기업가다. 세운철강은 2021년 기준 9900억원대 매출을 올린 데 이어 올해는 1조원대 매출을 바라보며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자체 철강 생산이 아닌 포스코 가공센터로는 유례없는 기업 규모이자 성과다.

사업적 성과와 더불어 신 회장은 부산 지역에서 신망을 한 몸에 받는 ‘큰 어른’으로도 통한다.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누구보다 앞장서 활동해온 덕이다. 석유왕 록펠러가 자선사업의 전설로 남아 추앙받는 것처럼, 신 회장은 일생을 세운철강의 성장은 물론 부산 경제와 지역사회 발전에 바쳐왔다.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가 신 회장을 만나 세운철강의 현재와 미래, 지역 발전에 몸바쳐온 기업가의 길을 물었다.


▎부산가공센터 가공라인에서 자동차 공장으로 출고될 제품을 점검하고 있는 신정택 회장.

▎세운철강 부산가공센터. 한국지엠, 르노삼성자동차 등 완성차 및 자동차부품업체 등이 주요 고객사다.
1978년, 당시 진양구청 공무원에서 창업가로 변신하셨다. 안정적인 공직을 그만두고 32세 젊은 나이에 사업에 뛰어든 계기가 궁금하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면서기라도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던 어머니의 희생으로 형제들이 모두 잘 성장했다. 모두 부모님의 헌신 덕분이다. 큰형님은 서울 법대를 나와 대법관으로 퇴임했고, 셋째는 행시 합격 후 여성가족부 초대 차관과 예술의전당 사장을 역임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인 넷째는 현재 세운철강 부회장이다. 막냇동생은 육사를 나와 소장으로 예편했고 현재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둘째인 나도 형님을 따라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경북사대에 진학했는데, 학비 문제로 군복무를 먼저 마쳤다. 제대 후에도 복학할 여력이 없어 공무원 시험을 쳤고 진주 진양군청으로 발령 났다. 당시 새마을사업이 한창이었는데, 마침 지붕 개량 사업을 맡게 됐다. 농가 지붕을 슬레이트나 양철로 바꾸는 일이었는데, 그걸 계기로 철강과 인연을 맺게 됐다.

국내 굴지의 철강 가공 기업이 새마을운동 지붕 개량 사업에서 출발했다는 게 재미있다.

양철 지붕 재료를 구입하려고 당시 연합철강이라는 회사를 자주 찾았다. 기업 사람들과 친해지고 나서 ‘국내 양철 지붕 수요가 어느 정도’라며 사업성을 이야기하니 “그럼 직접 와서 일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더라. 그렇게 우연찮은 기회로 철강 인생이 시작됐다.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 회사가 여러 차례 부도를 겪는 등 부침이 많았다. 그러던 중 당시 포항제철에서 냉간압연(냉연) 강판을 처음 생산해 판매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장 서울로 올라가 면접을 봤다. 하지만 젊기만 했지 가진 물건도 경력도 자본도 없던 터라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때가 31살, 1971년이다.

포스코 철강의 최고 가공기업이 첫 대리점 모집에선 퇴짜를 맞은 셈이다.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웬만한 시련에는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있었던 것 같다. 보름이 다 되도록 여인숙에서 자면서 매일 포항제철 관계자를 찾아갔다. 각고의 노력 덕이었는지 박태준 사장을 만날 수 있었고, 집요한 요청 끝에 준판매점 자격을 얻었다. 물건을 받아 팔아보고 실적이 있으면 정식 인가를 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첫 제품을 1978년 6월 15일에 출하했다. 세운철강 창립기념일이 바로 그날이다.

창업 때부터 냉연강판을 선택한 배경이 무척 궁금하다. 당시만 해도 후방산업인 자동차나 백색가전 등은 수요가 부족한 상황 아니었나? 요즘으로 치면 개화하지 않는 미래 사업에 뛰어든 스타트업과 비슷한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냉연은 말 그대로 콜드, 즉 ‘찬밥’ 신세였다. 반면 열연강판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따뜻한 밥’으로 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동차나 가전제품 등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클 거라 예상했다. 사업 방향도 아예 처음부터 냉연에 맞췄다. 산업이 발전할수록 생활수준도 높아질 테고, 운송수단인 자동차도 크게 늘어날 거라 봤다.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1990년대 들자 냉연 수요가 열연을 역전하더라. 1994년 세운 창원공장도 LG전자 납품을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LG전자의 가전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우리 같은 강판 가공기업 입장에선 고객사에 물건을 적기에 공급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창원에 LG전자 공장이 있었기에 우리도 선제적으로 창원에 가공센터를 세운 것이다.

열연강판은 철강 반제품인 슬래브를 고온·고압으로 누르고 늘여서 만든 강판을 말한다. 자동차 프레임이나 선박 등에 사용되는데, 다른 철강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본 재료라고 이해하면 쉽다. 반면 냉연은 열연강판을 산을 이용해 세척(산세)하는 과정을 거쳐 매끈하고 광택이 나도록 만든 강판이다. 자동차 차체나 가전제품, 사무용품 등에 쓰이는 고부가가치 강판이다.


창원공장 사례처럼, 고객사 인근에 가공공장을 세우는 전략은 어떻게 착안하셨나.

철강 가공업의 핵심은 적기 납품, 즉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이다. 이는 지금도 변하지 않는 경영 원칙 가운데 하나다. 완제품을 생산하는 고객사 입장에선 가공센터에서 제때 재료를 공급받아 조립에만 힘쓸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세운철강은 부산을 비롯해 창원, 울산, 포항에 각각 가공센터를 두고 최상의 품질과 납기 준수에 힘쓰고 있다. 부산은 르노삼성과 한국지엠, 창원은 LG전자, 울산은 현대·기아자동차 등이 주요 고객사다. 현재 광양에 3만3000㎡(1만 평) 규모의 새 가공센터를 짓고 있다. 10월 완공 예정인데, 본격적인 전기자동차 시대를 맞아 연간 30만 톤 규모의 전용 강판 생산에 주력할 계획이다. 2012년 들어 세운철강은 포스코 매입 1000만 톤을 기록했고, 김해에서 부산으로 본사를 옮기면서는 1500만 톤을 넘어섰다. 쌓아두면 부산 금정산 전체와 맞먹는 양이다. 오는 2025년까지 누적 매입 2000만 톤 돌파 목표를 세웠다.

철강 가공업체임에도 불구하고, 포스코라는 단일 기업과만 거래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우리가 납품하는 고객사와의 신뢰 못지않게 1차 제품 공급사와의 신뢰도 중요하다. 다른 가공업체들은 해외 업체에서 수입도 하며 거래처 다변화에 힘쓰지만 우리는 정반대다. 세운철강은 오로지 포스코 정책에 따라 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고객사에 납품한다. 포스코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사이기 때문이다. 포스코와 우리 같은 가공센터, 여기에 최종 고객사와의 파트너십 및 신뢰를 쌓아온 게 오늘의 세운철강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창업 이후 지금까지 30~40년이 넘게 거래해온 고객사가 다수다.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진짜 큰 기업과 기업가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세운철강 창업 이후 위기는 없었는지,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하다.

회사를 세운 지 45년이 됐다. 왜 위기가 없었겠나. 오일쇼크부터 시작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이번 팬데믹, 또 이로 인한 경기침체에 이르기까지 위기 아닌 때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창업 초기에는 오일쇼크와 거래처 도산이 겹치면서 파산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신정택은 돈 떼먹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주변의 신뢰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 때는 가장 큰 고객사인 대우자동차가 부도를 맞아 또 한 번 존폐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직원들이 먼저 상여금을 반납하면서 회사 살리기에 나섰고, 나 역시 ‘죽어도 같이 죽자’는 마음으로 단 한 명도 내보내지 않았다. 2003년에는 홍수로 창원공장이 온통 바닷물에 잠기는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철은 염분에 취약하니 침수된 제품은 거의 못쓰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도 피해 복구에 임직원들이 발 벗고 나섰고, 포스코까지 못 쓰게 된 제품을 새 것으로 바꿔주었다. 이 모든 과정에는 결국 신뢰라는 말이 숨어 있다. 고객은 물론 임직원들 간에 단단히 쌓인 신뢰는 위기가 닥칠 때 빛을 발한다. 평소 『논어』의 ‘무신불립(無信不立)’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유다.

뉴욕 맨해튼 시민은 누구나 공짜로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물을 사용할 수 있다. 록펠러가 상수도 시설을 기부한 덕이다. 회장께서도 부산지역에서 존경받는 기업가로 이름이 높다.

기업의 이윤은 결국 사회에서 나온다. 나도 평생 도움을 받은 사람이니,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사회에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나. 배고픈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 이만큼까지 온 것이 모두 사회의 도움 덕분이다. 특히 기업은 적정한 수준의 이윤을 사회로 돌리고, 인재 육성에도 앞장서야 한다. 이런 신념은 2006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내며 더 강해졌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6년간 부산상의 회장을 맡으셨다. 그 기간에 지역 발전을 위해 정말 다양한 프로젝트를 주도하셨다.

부산상의 회장을 맡으면서 지역의 미래 비전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개별 기업인이 아닌 큰 틀에서 지역의 발전을 바라보게 된 계기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명례산업단지 개발이다. 지역 경제와 산업 발전을 위해선 기업과 공장이 들어설 땅부터 확충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상의 주도로 2007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수요자 개발 방식으로 산업용지를 조성했다. 현재 155만㎡ 너른 부지에 거의 입주를 마친 상태다. 신공항 건설 추진도 잊을 수 없는 성과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은 부산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사업 개시부터 회장께서 산파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다.

동남권 신공항은 부산과 대구 등 영남권 전체의 숙원사업이었다. 2006년 부산상의 회장을 맡았는데 그해 말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을 찾았다. 그때 신공항 건설을 공식 건의했고, 결국 노 대통령께서 영남권 신공항 건설 검토를 공식적으로 지시했다. 결국 올해 4월 가덕도 신공항 추진계획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첫 건의 이후 15년 넘게 걸린 셈이다. ‘신공항 전도사’로 불리며 뛰었던 세월이 스쳐가며 그야말로 감개무량했다. 부산은 예부터 철강·자동차·조선 같은 중후장대 산업이 중추를 이루며 성장했다. 하지만 세계적인 공급 과잉과 가격 경쟁으로 인해 전통 산업의 경쟁력이 날로 떨어지고 있다. 지역 산업의 획기적인 구조개혁이 절실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존 산업에 관광과 금융 등이 합쳐진 새로운 산업구조를 세우려면 24시간 운영되는 허브공항이 필수였다.

신공항 건설과 함께 지역 항공사인 에어부산 창립에도 큰 역할을 하셨다.

‘부산에 비행기가 뜨고 가는 건 보고 죽겠다’는 신념 때문이다. 허브공항을 유치하면 지역을 대표하는 항공사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산 시민이 항공사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판단에 지역 기업들이 힘을 합쳤다. 현재 에어부산의 지분은 아시아나항공이 최대주주이고, 나머지는 세운철강을 비롯한 부산 지역 기업들이 나눠서 보유 중이다.

부산 지역 현안과 개발 사업을 들여다보면, 웬만해선 회장의 이름이 빠지지 않아 놀랐다.

아직 갈 길이 멀다. 1980년대 부산은 성장억제도시로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전통 산업에 관광을 더한 마이스(MICE) 산업으로 바뀌어나가야 한다는 게 오랜 염원이다. 판교밸리 같은 미래산업단지 개발도 꼭 필요하다. 이를 위해 원도심에 있는 도심철도부지 이전을 상의 회장 때부터 지금까지 추진 중이다. 철도시설을 옮긴 자리에 ICT 시설과 기업들을 유치해서 원도심과 신도심의 균형발전을 꾀해야 한다. 제조업은 어느 정도 틀을 갖춘 도시가 부산 아닌가. 이젠 관광, 물류, 마이스로 나아가야 한다. 젊은이들이 빠져나가 침체된 지역을 되살리는 고용창출의 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항의 오페라하우스 건설 이야기도 흥미롭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전당을 보라. 서울뿐 아니라 대도시엔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시설이 있게 마련인데, 부산에 그런 게 부족하다. 대한민국 제2 도시라는 위상에 걸맞으면서도 관광 인프라를 겸할 수 있는 문화의 전당이 꼭 필요하다 생각했다. 돌아가신 신격호 롯데 회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더니 오페라하우스 건설에 “내 사재를 털어서라도 돕겠다”며 1000억원이라는 거액을 선뜻 내주셨다. 사실 신 회장께는 지역항공사 건립도 제안했는데, 이후 오페라하우스 건설로 방향을 틀게 됐다. 현재 북항에 건립 중인데, 완공되면 부산은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시설로 남을 거란 기대가 크다.


신정택 회장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 추진, 북항 오페라하우스 건립, 강서구 산업용지 그린벨트 330만㎡(100만 평) 해제, 에어부산 창립, 민간 주도의 명례산업단지 조성, 도심철도부지 이전, 취수원 다변화 등 부산 지역의 경제·사회 현안 해결 및 과제 수립을 주도해왔다. 2006년 부산상의 회장 취임 이후 본업인 세운철강 경영 외에도 지역 발전에 앞장서온 그의 공로는 동아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2004), 국민훈장모란장(2015), 대한민국 창조경제리더 대상(2013), 자랑스러운 시민상대상(2012), 부산시민산업대상(2009) 등으로 이어지며 지역의 ‘큰 일꾼’으로 인정받았다.

지역 발전 외에 주변 이웃의 삶에도 관심을 아끼지 않으셨다.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역임이 대표적이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회장을 맡았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너무 맡은 일이 많아 정중히 고사했지만 “경제인이 한번 맡아야 하지 않겠나”는 요청에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취임 직후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터(Honor Society)’를 크게 늘리겠다고 약속했고 나부터 동참했다. 내심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듬해인 2016년 가까운 지인 11분이 선뜻 가입해주셨다. 사실 부산의 전체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해야겠다 다짐하며 조금씩 회원들을 늘려나갔다. 함께 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몰아갔다.(웃음) 11명이 한꺼번에 회원으로 가입한 건 부산이 처음이라 큰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후 2019년에는 이분들의 부인들도 회원으로 가입해 또다시 화제가 됐다. 임기 동안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을 157명이나 유치했다. 이것도 기록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성금 63억원을 모아 시에 기부하기도 했다.

신 회장은 “제아무리 재력가라도 선뜻 1억원이라는 큰돈을 쾌척하기란 쉽지 않다”면서 “기부의 맛을 알고 나면 끊기 어렵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아너 소사이어티 기부와 별개로 부산 지역의 사회·교육·스포츠·경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기부활동을 펼쳐왔다. 인재 육성을 위해 동아대·부산가톨릭대·부산과학영재고·부산국제외고를 비롯해 고향인 경남 창녕 대성중고교 등에 매년 장학금을 후원 중이다. 현재까지 신 회장이 사회에 환원한 기부금 규모만 100억원대가 훌쩍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자도생의 시대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 공인으로서 산업의 큰 방향을 만들어가는 큰 기업인이 점점 더 귀해지는 것 같다. 기업인들에게, 또 젊은 후배 경영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기업의 처음과 끝은 무조건 신뢰다. 앞서 말했듯 고객, 임직원에서 나아가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해관계자와 신뢰를 쌓아야 한다. 세운철강은 최근 원자잿값 급등에도 불구하고 가격인상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가령 10만 톤당 1만원만 더한다 해도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그럴 경우 수십 년 쌓아온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기업가가 돈 벌 수 있는 기회만 찾으면 결국 신뢰라는 가장 큰 자산을 잃게 된다. 기업의 사회 환원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있기에 기업도 존재한다. 신뢰는 결국 당사자들의 진정성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신정택 회장과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가 자리를 함께했다.
※ 최영찬 대표는… 선박과 플랜트 분야 제조업을 영위하는 선보공업의 차세대 경영인이다. 제조업체들이 스타트업 및 투자 생태계와 어떻게 공존하고 미래 사업을 만들지 고민하면서 선보엔젤파트너스와 기업 연합형 CVC인 라이트하우스를 창업했다. 200여 개 스타트업에 투자했으며, 컴퍼니빌딩 프로젝트와 기존 포트폴리오 기업을 공동경영 형태로 성장시키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창업한 2개 법인과 별도로 3개 프로젝트의 공동대표로도 활동하면서 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 대담=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정리=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최재승 객원기자

202208호 (202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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