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전 최초의 여성 엔지니어로 입사시스코코리아는 인터넷 붐이 시작되던 1994년 문을 열었다. 네트워크 장비, 유무선 통신 등으로 입지를 굳건히 다지다가 최근엔 CDA(세계 각국의 디지털화를 지원하는 시스코의 스폰서십 프로그램)를 국내에 론칭하는 등 한국의 디지털화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5G, 스마트팩토리 보안, 클라우드 등 7개 프로젝트에 투자했다. 이에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전 세계 지사 가운데 압도적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최 대표는 “환경적인 도움도 좀 받았다”며 “삼성, NHN, KT 등 국내 클라우드가 성장했고, 배터리 생산 공장들이 들어서며 우리의 인프라를 필요로하는 곳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시스코코리아의 역사 대부분을 함께 써 내려간 최 대표. 벌써 22년 세월을 시스코코리아에서 보냈다. 그는 “입사했던 2000년을 돌아보면 나도 회사도 참 많이 성장했다”고 회상했다. 최 대표는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다. 첫 직장인 데이콤(현 LGU+)에서 10여 년간 엔지니어로 일하다 출산과 육아를 위해 잠시 일을 쉬었다. 이후 둘째 아들을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인 2000년, 시스코에서 두 번째 기회를 얻어 사회로 복귀했다. 시스템엔지니어로 입사한 그는 마케팅, 협업 솔루션, 통신사업자, 파트너 조직을 거쳐 CGEM(시스코 글로벌 엔터프라이즈 마켓) 삼성 영업 디렉터, CGEM 영업 매니징 디렉터(수석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시스코코리아의 다양한 사업 분야를 두루 경험했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려온 그에게 그간의 얘기를 들어봤다.입사 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면.한 회사를 20년 넘게 다녔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3~5년 주기로 계속 소속이 바뀌었다. 엔지니어로 시작했는데 마케팅, 영업, 파트너 조직까지 최소 8번은 팀이 바뀌었다. 개인적으로는 업무에 익숙해져 나태해지지 않도록 환기 효과가 있었고, 새로운 업무를 익히려 끊임없이 학습하다 보니 급변하는 시장 환경을 절로 놓치지 않게 됐다.조직이동은 회사 차원의 인재 양성 프로세스인가.아니다. 처음 이동할 당시엔 사내의 프로덕트 마케팅팀을 강화하려면 기술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 차출됐다. 입사한지 4~5년째 되던 해로 나 역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부연하자면, 엔지니어로서 다수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기술이 좋다고 무조건 고객의 선택을 받는 건 아니다’는 것을 경험해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케팅 기법이 뭘까 궁금해하던 시기였다. 선뜻 마케팅팀으로 자리를 옮겼고 시장분석, 메시지 작성법, 각종 캠페인을 진행하며 새로운 기술을 체득했다. 4년이 지났을까. 또다시 기회가 왔다. 당시 부임한 신임 사장님이 마케팅 부서엔 무거운(연차가 많은) 사람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며 모두 필드로 나가라더라. 그때는 화상회의 기술인 텔레프레젠스를 막 론칭한 상태였는데 이 제품의 영업을 맡으며 자연스럽게 영업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영업 조직에서 통신사, 포털사, 게임사 등 여러 부문 업체를 담당했다. 다양한 사업 분야를 두루 익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후 파트너 조직으로 이동할 땐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자원했다.회사 생활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입사할 때만 해도 여성 엔지니어에게 그렇게 친화적인 회사는 아니었다. 나를 채용할 때도 여성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분분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입사 후 1년이 가장 힘들었다. 최초의 여성 SE이자 경력사원으로서 능력과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욕심이 나를 채찍질했다. 잠시 일을 놓았던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자발적으로 회사에 남아 밤새도록 장비를 만지고 기술을 익혔다. CCIE라는 필수자격증을 따기 위해 주말도 반납했다. 육아도 팽개치고 업무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가족의 희생도 있었지만 회사에서도 많은 부분을 감내해줬다. 이를테면 글로벌팀이나 비즈니스 유닛에 아주 쌩뚱하거나 기초적인 질문을 던져도 동료들이 성의 있게 답변해줬다. 특히 호주에 있는 엔지니어가 큰 도움을 줬다. 그렇게 1년 반 정도가 지나니 자신감이 붙었고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한국 기업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올해 조사한 ‘유리천장지수’에서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10년 연속 꼴찌다. 대표님의 성과가 지금의 자리를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유리천장은 견고했을 텐데, 유리천장을 뚫은 비결이 뭔가.여성 대표가 탄생하려면 우선 여성 임원이 많아야 한다. 예전엔 여성 임원을 보기 힘들었는데 요즘엔 제법 많다. 특히 글로벌 IT기업을 중심으로 여성 대표들이 속속 나오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내가 대표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로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여러 부서를 두루 경험하며 ‘제네럴리스트’가 됐다는 점과 남녀 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의 경영방침이다. 시스코는 남성 리더십과 여성 리더십이 조화롭게 작용하길 바라는 회사다. 실제 시스코 글로벌의 임원 중 절반은 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남성 리더십과 여성 리더십은 어떻게 다른가.일반적으로 남성 리더십 하면 진취적이고 빠르게 실행에 옮기는 것, 여성 리더십 하면 친절하고 타인을 잘 보듬는 것으로 구분하지만 나는 굳이 나누지 않는다. 너무 획일화된 느낌 아닌가. 성별에 상관없이 개인의 성격에 따라 발휘하는 리더십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남성 리더십과 여성 리더십을 모두 지니고 있다.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실행에 빨리 옮기고 싶어 한다는 점은 남성 리더십에 가깝고, 팀원을 적극적으로 돕고 챙기는 점은 여성 리더십에 가깝다. 다만 여성 리더십을 좀 더 길러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젊은 직원들은 수평적인 문화, 개개인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친절히 이끌어주는, 엄마 같은 리더십이 발휘되는 문화를 선호하더라. 회사는 결국 개인이 모여 만들어지는 곳이니 회사가 직원들에게 맞춰야 한다.
시스코의 강점은 임직원을 존중하는 기업 문화‘워킹맘’으로 사는 건 힘들지 않나.또 회사 자랑을 해야겠다. 입사 후 남편과 입주 이모님의 도움을 받아 두 아들의 양육과 일을 병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8년 남편이 중국 베이징으로 발령을 받아 안정적인 삶에 변화가 생겼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일을 그만두고 함께 베이징으로 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더니 매니저가 서울과 베이징을 오가며 일해도 좋으니 관두지 말라고 하더라. 당시 마케팅 팀장을 맡고 있었는데도 ‘플렉서블하게 일해도 좋다’고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회사를 더 다녀보기로 했다. 매주 금요일, 오전 근무를 마친 후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갔다가 월요일 오후에 회사로 복귀했다. 금요일 오후와 월요일 오전마다 자리를 비웠는데도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이 생활을 이어갔다. 엄청난 ‘베네핏’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회사에 대한 애사심과 충성심이 배가됐다.그 외 자랑할 만한 복지나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면.‘컨셔스(conscious) 컬처’, 즉 회사가 임직원을 의식하고 존중한다는 문화를 기반으로 업무 환경을 조성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몇 가지 소개하면, 첫째, 근무시간을 체크하지 않는다. 원래도 재택근무가 활성화돼 있었지만 팬데믹을 거치면서 ‘하이브리드 워크’ 제도가 완벽히 자리 잡았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원하는 장소에서 일할 수 있다. 재택근무를 해도 근무시간을 따로 체크하지 않는다. 회사가 직원을 신뢰하고, 직원은 책임감을 갖고 일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둘째, 주간 일기장이다. 매주 금요일에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 힘들었던 점, 즐거웠던 점을 자유롭게 작성하는 프로그램이다. 팀 단위로 진행하는데, 이를 보고 팀장은 팀원들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고 또 동기부여가 필요한 시점에 적절히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에 얽힌 일화가 있다. 얼마 전 시스코의 인사 정책 수장이 오프라 윈프리와 대담을 하던 중 이 시스템을 소개했는데, 이를 들은 오프라 윈프리가 “이런 회사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며 “진짜 좋은 회사”라고 감명받았다고 한다. 셋째, 칭찬하는 문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 않나. 아무리 사소한 일이어도 칭찬을 자주 해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임직원끼리 ‘이런 이유로 칭찬합니다’라는 사유를 적어 칭찬을 날릴 수 있다. 칭찬 리워드는 5만원부터 200만원까지 다양한데 리워드를 받은 만큼 금액을 합산해 직원의 월급에 반영한다. 이 외에도 임직원들의 심리상담, 멘토-멘티 시스템, 스폰서 시스템 등이 있다.시스코와 달리 아직 열악한 환경에 놓인 여성 후배도 많다. 그들에게 조언 한마디.우선 커리어를 잘 설계해야 한다. 크게는 한 분야에 매진해 전문가가 되는 ‘스페셜리스트’, 나처럼 여러 분야를 두루 다니며 경영 전반을 파악하는 ‘제네럴리스트’가 될지 선택해야 한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스페셜리스트가 ‘CEO’가 되긴 어렵다. 만약 제네럴리스트가 되기로 했다면 나처럼 3~4년마다 적을 옮겨 커리어를 확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여기서 전제돼야 할 건 개인 성향이다. 변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잠재력을 가진 사람인지 자신의 성향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다음엔 ‘러닝(learning)’이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기면 일단 도전해보고 학습해보길 추천한다. 그래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학습능력’이 좋은 사람이 유리천장을 뚫을 확률이 높다고 본다. 학습능력이 좋다는 건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적응력이 뛰어나며 어떤 문제에 직면해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즘 링크드인 등의 채널에서 일면식도 없는 후배들이 커리어 상담을 요청해 온다. 이처럼 도움을 요청할 만한 채널이 활짝 열려 있으니 이 또한 잘 활용해보길 바란다.앞으로 시스코를 어떻게 이끌 계획인가.경기가 안 좋지만 IT업계는 꽤 낙관적인 상황이다. 예전엔 경기가 나빠지면 IT 기술의 투자부터 줄였는데, 코로나19 등으로 IT 기술이 꼭 필요한 상황이 됐다. 한 서베이에서 GDP 성장률이 멈추거나 내려가도 IT 기술에 투자하는 금액은 크게 줄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시스코코리아도 성장률을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 선보이지 못한 좋은 기술이 많다. 보안기술이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최근의 화두인 ESG에 대한 준비도 잘돼 있다. 시스코는 이미 제품 생산단계부터 재생에너지, 재생자원을 사용한다. 이후엔 우리가 공급한 장비가 사용되는 장소에서 에너지 사용을 줄일 수 있도록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려는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또 이미 은퇴했지만 실력은 녹슬지 않은 베테랑 인력, 능력은 있지만 경력단절로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여성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할 생각이다.- 신윤애 기자 shin.yunae@joongang.co.kr·사진 정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