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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륜 로지스올그룹 회장 

남이 가지 않는 길 

장진원 기자
물류(物流)는 말 그대로 물자의 흐름이다. 산업 현장의 원료 투입, 생산 제품의 출하와 이송을 위한 하역, 무역용 컨테이너 운송 등 물류의 범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다. 하지만 현장 하나하나의 물류는 지게차 포크에 얹힌 파렛트 위에서 시작된다. 서병륜 로지스올그룹 회장은 물류라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1970년대부터 국내에 파렛트풀 시스템을 도입한 선구자다. 한국 물류의 모세혈관을 이어온 45년의 노력이다.

▎서병륜 로지스올 회장이 플라스틱 파렛트 모형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자리 잡은 스미스소니언 국립 자연사박물관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억4800만 개에 달하는 표본과 유물 컬렉션은 자연과 인류 문명의 유구한 여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곳 ‘인류문명발달관’ 입구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그러나 쉬이 지나쳐서는 안 되는 그림 한 점이 있다. 한국의 ‘지게’다. 우리네 농촌에서 등짐 나르는 데 쓰던 지게가 한국도 아닌 미국 자연사박물관에 소개된 이유가 뭘까.

“인류문명발달관 입구에 들어서니 세계전도가 펼쳐져 있더군요. 물류 운반사를 빛낸 기술 개발을 그린 지도였죠. 그 순간 ‘우리 한민족이 물류 발달에 공헌한 게 있을까’ 싶었습니다. 설레는 맘에 한반도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놀랍게도 지게가 그려져 있지 뭡니까. 동력 기계가 발명되기 전, 인력을 활용한 도구 중 지게만 한 발명품이 없다는 의미였어요.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다가, ‘지게차’에서 시작된 제 물류 인생이 겹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서병륜 로지스올그룹 회장에게 물류(物流)와 맺은 첫 인연을 물으니 뜬금없는 지게 이야기가 쏟아졌다. 1980년부터 45년간 물류 외길을 걸어온 서 회장은 한국 물류산업의 태동과 개척, 성장을 이끌어온 정통 ‘물류맨’이다. 그가 국내 최초로 도입한 파렛트풀, 컨테이너풀 시스템은 현재 국내외 30만여 고객사가 이용하는 글로벌 물류 플랫폼으로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파렛트(Pallet)는 공장이나 물류창고 등에서 물자를 쌓아 올릴 수 있게 만든 받침대를 말한다. 단순히 물건을 올려놓은 받침대라 지나치기 쉽지만, 파렛트는 오늘날의 물류산업을 일으킨 모세혈관 같은 존재다. 수백킬로그램에서 1톤에 달하는 물자를 파렛트 위에 얹어야 지게차가 실어 나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렛트 시스템이 고안된 덕에, 등과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던 인류의 노동 혹사가 사라지게 된 셈이다. 파렛트풀(표준 규격 파렛트를 기업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시스템)은 그 자체로 ‘물류 혁명’이었다. 마찬가지로 컨테이너풀은 산업·유통 현장에서 쓰는 다양한 용기(컨테이너)를 기업 간 공동으로 이용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40여 년 전 한국 최초로 파렛트풀·컨테이너풀을 도입한 로지스올은 2022년 매출 2조원을 기록했다. 창립 50주년인 2034년에는 매출 10조원을 달성해 풀링(Pooling) 기반 글로벌 톱 티어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목표다.

서 회장과 파렛트의 인연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농대에서 농기계를 전공한 서 회장은 당시 국내 최대 중공업사인 대우중공업에 입사했다. 기계전공 엔지니어가 처음 발령받은 곳이 바로 ‘지게차’ 생산 공장이었다. 인터뷰 초반에 지게 이야기부터 꺼낸 뜻이 그제야 이해된다.

“전남 광양이 고향입니다. 농촌 지역이라 어릴 때부터 탈곡기, 발동기 같은 기계가 뭣 모르고 좋았어요. 대학 졸업 후 대우그룹 공채 12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죠. 기계 분야 시험을 봐 엔지니어로 입사했습니다. 처음 발령받은 곳이 지게차 생산 공장이었어요. 시골 촌놈이 월급 많이 주는 대기업, 그것도 엔지니어에게 제격인 기계 공장에 들어갔으니 그저 좋았죠. 열심히 일했습니다.”

운명을 바꾼 지게차와의 만남

서 회장은 “지게차와의 만남이 운명을 바꿔놓으리라고는 그때는 짐작도 못 했다”고 회고했다. 산업차량생산본부 기술개발부에서 일하던 엔지니어에게 예상치 못한 인사 발령이 떨어진 건 입사 후 2년이 지난 1979년이었다.

“갑자기 세일즈엔지니어링 팀장으로 발령이 났어요. 기계 만지는 사람이 영업이 뭔 줄 알았겠습니까. 서울 대우빌딩 20층 사무실에 나와 하릴없이 담배 피우는 시간만 늘어갔죠.”

공장에서 일 잘하던 엔지니어들을 특공대처럼 뽑아 영업부서를 신설한 건 그만큼 회사 사정이 급했던 터였다. 대우 마크가 붙은 지게차는 첫 제품 출시 후 1년에 1000대씩 팔려나갔다. 생산이 수요를 못 따라갔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사업 3년 차 들어 연 500대 판매 수준으로 급감하더니 결국 판매 부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지게차는 당시 김우중 회장의 최대 관심 사업 중 하나였다. 그룹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급기야 기계를 잘 아는 엔지니어들까지 영업 전선에 소방수로 투입하며 안간힘을 썼다.

옛이야기에 젖은 서 회장은 당시 섬유 사업이 주류였던 대우가 중공업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할 수 있었던 비사도 꺼내놓았다. 대우중공업의 전신인 한국기계공업은 일제강점기부터 잠수함을 건조할 만큼 우수한 기계 전문기업이었다. 당시 산업화에 힘쓴 박정희 정부는 국영기업인 한국기계공업의 민영화에 나섰고, 첫 제안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건넸다고 한다. 하지만 전자산업에 뜻을 둔 이 회장이 정부의 제안을 거절했고, 신생 대기업인 대우에 기회가 찾아왔다.

“섬유나 팔다가 중공업 해보라 하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김우중 회장이 워낙 공격적인 스타일이기도 했고요. 인수 초기에는 인천공장에 야전침대를 가져다놓고 숙식을 해결했다고 해요. 그때 김 회장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지게차였습니다. 선진국을 다녀보니 물류 현장 사방팔방이 온통 지게차 천지였다는 거예요. 지게차 사업부가 1년에 200대 팔겠다고 보고했더니 ‘웃기지 마라, 1000대는 팔아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날로 일본 중장비 제조사인 고마츠를 찾아가 1000대 분량의 부품을 계약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사업 개시 2년 차만 해도 김 회장의 예상과 희망은 적중한 듯 보였다. 하지만 3년 차에 드니 사정이 달라져 애를 먹었다. 애꿎은 불똥을 맞기는 서 회장, 당시 서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난데없이 영업을 뛰라 하니 사람만 만나도 가슴이 뛰고 식은땀이 나기 일쑤였다. 사표 생각이 굴뚝같다가도 6개월 파견 약속을 믿고 버텼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오기가 발동했다.

“선진국은 대체 어떻길래 지게차 천국인지 궁금했습니다. 직접 가서 보자 결심했죠. 미국, 일본, 유럽을 차례로 찾았습니다. 가보니 실제로 물류 현장에 지게차들이 바글바글하더군요. 그런데 쓰임새가 우리와 다르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관찰력이 좀 남달랐던 것 같아요.”

1970년대 국내에서 운용되던 지게차는 대부분 3.5톤 이상의 대형 차량이 주를 이뤘다. 사람의 힘으로 들지 못하는 쇳덩어리나 원목, 암석 같은 중량물을 들어 옮기는 데 지게차를 활용했다. 하지만 선진국은 달랐다. 서 회장은 특히 일본의 지게차 운용에서 큰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사람이 못 드는 물자가 아니라, 정반대로 사람이 들 수 있는 물자를 실어 나르는 데 지게차를 쓰고 있었다. 우리와는 개념 자체가 달랐다.

“20kg 박스 50개를 쌓으면 1톤이 됩니다. 그걸 파렛트에 적재해 2톤 이하 소형 지게차로 작업하는 게 일반적이었어요. 지게차 포크에는 여지없이 물자를 쌓아놓은 파렛트가 끼워져 있더군요. 물건을 쌓을 때도, 선적 때도, 하역할 때도 지게차를 쓰려면 반드시 파렛트가 있어야 했어요. 지게차와 파렛트가 바늘과 실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기계 엔지니어에서 파렛트풀 전도사로


서 회장이 예리한 관찰력으로 발견한 건 지게차가 아닌 파렛트의 가치였다. 단순한 화물 깔판이나 받침대가 아니라, 파렛트를 물류 이동의 모세혈관으로 인식한 혜안이다. 회사로 돌아와 쓴 출장 보고서 제목은 ‘지게차 시장 확대를 위한 파렛트 시스템화의 추진계획’이었다. 1980년 그가 처음 쓴 물류 전문 논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보고서에는 파렛트 시스템화, 즉 파렛트풀 시스템 조성, 이를 통한 지게차 판매 전략과 전망, 파렛트풀 산업을 조성하기 위한 정부·기관·기업의 역할, 전문 물류협회 설립을 통한 계몽활동 등이 망라돼 있었다.

“보고서가 회사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지금처럼 대형이 아니라 소형 장비로 바꿔야 한다. 우리 혼자 쓰는 게 아니라 선진국처럼 파렛트풀 시스템을 조성해 보급해야 한다. 국가적 SOC로 추진해 파렛트풀이 정착되기만 하면, 1년 1000대가 아니라 1만 대, 2만 대도 팔 수 있다고 했어요. 사장님 이하 영업담당 임원들이 저를 영웅 대접하더군요. 대리밖에 안 된 저를 임원들 앞에 세우고 ‘사업은 저렇게 하는 거다’, ‘서병륜이 하라는 대로 해라’라며 난리가 났습니다. 500대 판매도 끙끙대다가 2만 대 판매를 자신하니 그럴 만도 했죠.”

사내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이리저리 뛰기를 3~4년. 하지만 사업 진척은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했다. 기존에 없던 산업을 새로 일으키는 수준이었던 데다, 물자를 내고 받는 이가 모두 동참해야 하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사이 지지와 성원을 보냈던 사장과 임원들도 자리를 떴다. 어느새 “돈만 까먹고 해외나 돌아다닌다”는 비아냥까지 들려왔다. 1984년, 처음 영업직 발령 때처럼 느닷없이 공장으로 원대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사이 공장과 기계를 사랑했던 엔지니어는 파렛트풀과 물류 혁신에 빠진 물류맨으로 정체성이 바뀌어 있었다.

“공장에 가도 파렛트풀만 아른거리더군요. 품에 사표 넣고 다니기를 몇 달, 결국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을 하며 살자고 결심했습니다. 사직서 낸 지 닷새 만인 1984년 9월 1일 한국물류연구원을 세웠어요. 로지스올의 창립기념일입니다. 내년(2024년)이면 창립 40주년을 맞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호기롭게 뛰어들었지만, 힘들고 괴롭기는 대우 근무 시절과 매한가지였다. 퇴직금으로 받은 800만원은 사무실 얻고 집기 몇 개 들이니 이내 바닥났다. 연구원 설립 초기를 돌아보던 서 회장은 “정말 죽기살기로 뛰었다”며 “물류 거지가 따로 없었다”며 웃었다. 파렛트풀은커녕 물류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서 회장은 [물류뉴스]를 제작해 기업 물류 담당자들과 언론에 배포하고, 물류대회 개최, 해외연수단 파견 등 ‘물류 계몽가’로서의 활동에 집중했다. 혼을 쏟은 노력 덕에 당시에는 생소했던 물류 분야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신문과 방송 등 매스컴도 물류 관련 뉴스를 기획하기 시작했고, 서 회장이 단골로 등장했다. 하지만 연구원의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은 여전했다. 제대로 된 사업 실적이 없으니 수익을 내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온 건 연구원 설립 2년 후인 1986년 들어서다. 당시 동양제과 담철곤 부사장이 면담을 청했는데, 2시간여의 논의 끝에 서 회장에게 동양제과의 물류 컨설팅을 의뢰했다. 당시 동양제과는 서울과 대구, 익산 등 3곳에 5개 공장을 가동 중이었다. 전국 20여 개 지점과 물류센터, 50여 개 대리점과 창고를 배치한 물류체계를 운영했다. 서 회장은 표준 파렛트에 의한 유닛 로드 시스템(Unit road System)을 구축해 상하차 등 하역 작업의 기계화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공장 구내용으로만 사용하던 파렛트를 공장과 물류센터 간에 공유해 활용하는 일관 시스템를 실현했다. 동양제과의 성공적인 컨설팅 이후 오뚜기, 삼성전자, 해태제과, 빙그레, 고려합섬, 부산파이프, 롯데칠성음료, 코오롱상사, 미원그룹 등 30여 개 기업이 서 회장을 찾았다.

“5년간 쟁쟁한 기업 30곳의 물류 컨설팅을 전담했습니다. 보통 한 기업 컨설팅에 3~6개월이 걸리는데, 1년에 5~6곳을 맡았으니 정말 초인적인 스케줄이었습니다. 일주일에 3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물류 컨설팅은 서병륜이 최고’라는 칭찬 덕에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세계 최대 플라스틱 파렛트풀 전문기업


기업 물류 컨설팅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했지만, 파렛트풀을 국내 물류 전반에 안착시키는 꿈은 여전히 요원했다. 1985년 한국파렛트풀 설립 후로도 1990년까지 5년여간 이렇다 할 계약을 한 건도 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도 국내에선 맥주, 음료, 설탕(제당) 등 물동량이 큰 규모의 일부 대기업만 파렛트 수송 시스템을 도입했을 뿐, 대부분의 기업이 여전히 하역 작업을 인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서 회장은 열악한 사업 환경을 돌파하기 위해 석유화학업계부터 뚫기로 결심했다.

“1990년부터 3년간 국내 대표 석유화학 업체 12곳과 파렛트풀 공동 이용 제도 계약을 추진했습니다. 3년여간 지난한 설득 끝에 11개 회사 대표이사의 인감이 찍힌 계약서를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규모가 제일 큰 회사가 참여를 거부했어요. 수많은 회의와 설득 끝에 대형사 12곳, 원료 사용 도착 업체 1만5000곳과 계약을 맺기 직전이었어요. 결국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죠. 충격과 허탈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파렛트풀 시스템 참여를 거절한 기업의 이유는 명확했다. 분실이나 파손 시 고객사에 변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3년간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될 절체절명의 순간, 서 회장은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이른바 ‘계약서 없는 사업’이다. 서 회장은 석유화학업계 실수요업체 1만5000개 사에 파렛트 분실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회수 책임은 한국파렛트풀이 부담할 테니, 대신 12개 업체 모두가 나서 고객사에 파렛트 회수 협조 문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법적인 책임 소재가 사라지니 마지막까지 버텼던 대형사도 흔쾌히 참여를 결정했다. 서 회장은 당시 12개사 대표이사의 날인이 찍힌 ‘석유화학업계 파렛트 공동이용제도 안내문’을 꺼내 보여주며 회상에 잠겼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파렛트 회수를 위한 처절한 생존 경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초기엔 파렛트 이동 경로가 확인되지도 않았고, 회수에 협조하지 않는 거래처도 많았어요. 그야말로 악전고투였죠.”

회수되지 않거나 분실, 파손된 파렛트는 온전히 한국파렛트풀의 손실이 됐다. 하지만 파렛트가 없으면 인력밖에 답이 없다는 부담은 기업들 스스로 파렛트 회수 관리에 참여하는 문화로 바뀌어 갔다. 현재 로지스올은 전국에 구축한 150여 개 수배송망 덕분에 파렛트 회수율이 99%를 넘어섰다.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수준이다. 로봇 자동 선별 및 자동 세척·건조 시스템도 도입해 최적의 파렛트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무모해 보였던 ‘계약서 없는 사업’은 석유화학업계를 기점으로 점차 거의 모든 산업 영역으로 퍼져나갔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로지스올은 플라스틱 파렛트풀 기준 글로벌 톱 기업으로 성장했다. 표준 파렛트 2700만 매와 표준 컨테이너 5000만 매, 보유 지게차 1만5000대, 풀링 시스템 고객사 30만 개가서 회장이 일궈낸 로지스올의 현재다.

“계약서 없이 사업에 나설 만큼 절실한 순간이었어요. 선진국이라면 아예 불가능한 도전이었을 겁니다. 뭐든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면 안 되니까요. 중국 같은 곳에서도 어려운 모델이에요. 회수는커녕 도난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니까요. 돌이켜보면 정으로 통하는 따뜻한 민족성이 사업 안착의 바탕이 됐다고 봅니다. 지금은 고객사들이 알아서 변상도 해줍니다. 파렛트풀이 없으면 모든 물류가 멈춰 선다는 데 공감하기 때문이죠.”

책 속에 물류가, 창조가 있다


▎세계 최초 접이식 컨테이너인 ‘폴드콘(FOLDCON)’ 모형을 든 서병륜 회장. 빈 컨테이너의 부피를 4분의 1로 줄인 혁신 제품이다.
서 회장은 서울 마포구 로지스올 사옥에 물류 전문 도서관을 구축해 운영 중이다. 그가 평생 동안 읽은 물류 전문 서적 5500권과 기타 경제·경영 서적 2000여 권을 모아놓았다. 물류 서적은 대부분 구미 지역과 일본에서 사들인 책들이다. 농기계 전공 엔지니어가 물류 전문가로 거듭난 45년의 노력이 오롯이 그의 책들에 담겨 있다.

“사업을 해보니 제일 중요한 게 창조입니다. 남의 것을 베끼면 성공한 기업가가 될 수 없어요. 애플이 왜 스마트폰 시장을 압도합니까. 없던 생태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물류 생태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길은 독서밖에 없었어요. 필요한 자료는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 읽어야 합니다. 내게는 그게 물류 책이었어요.”

서 회장은 “물류의 길을 알려준 일생의 스승을 만난 것도 책을 통해서였다”고 돌아봤다.

“1979년 대우에 근무할 때였어요. 엔지니어가 지게차 마케팅을 뭘 알았겠습니까. 변변한 물류 책 한 권 없던 시절이라, 을지로 일대 헌책방을 돌며 외국 서적과 자료들을 닥치는대로 뒤졌어요. 그때 만난 [하역과 기계(荷役と機械)]라는 일본 물류 전문지가 오늘날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일본하역연구소 히라하라 스나오 소장이 펴낸 잡지였다. 서 회장은 히라하라 소장을 “일본의 하역 기계화를 부르짖은 물류 혁명가”라고 소개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병참 하역 현장에서 수많은 인부가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본 히라하라 소장은 전쟁이 끝난 후 ‘인간을 중노동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신념으로 하역 기계화를 주창했다. 그 핵심이 바로 지게차와 파렛트 시스템이었다. 서 회장이 일본과 구미에서 눈으로 확인한 파렛트풀 시스템이 잡지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히라하라 소장을 직접 만나러 일본에 갔습니다. 한국에서 찾아온 연유를 밝히니 눈물을 흘리며 반겨주시더군요.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4살 때 한국에 건너와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평양에서 사신 분이었습니다. 평소 ‘내 뼈는 일본이지만 살은 어머니의 나라, 조선’이라고 하시며 조총련계를 알게 모르게 돕기도 하셨죠. 당시 이미 구순이 넘으셨는데, 자택에서 저를 앉혀놓고 3~4시간씩 글로벌 물류 현황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를 위해 따로 만들어주신 교재를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히라하라 소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일본상공회의소가 1976년 펴낸『물류 시스템화 입문(物流システム化の手引)』은 서 회장이 꼽은 두 번째 인생작이다. 이 책은 당시 일본 정부가 산업계의 물류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추진할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서 회장은 “이 책 두 권이 오늘날 로지스올의 파렛트풀 시스템을 있게 한 주춧돌”이라며 “현재 한국파렛트풀(KPP)은 일본 JPP의 규모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스승인 히라하라 소장의 평생 꿈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완벽히 실현된 셈이다.

책을 통해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창조한다는 생각은 창업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서 회장의 철칙이다. 한국에서 성공한 사업 모델을 글로벌로 확대하는 것은 그 시작이다. 현재 로지스올은 16개 나라에서 19개 해외 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지난 2005년 중국 정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시작한 ‘차이나 파렛트풀(CPP)’이 시작이었다. 이후 미국과 멕시코 등 북미, 베트남,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의 물류 혁신에 앞장서고 있다.

모두가 잘 사는 공존공영을 향해

서 회장은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글로벌 파렛트풀인 RRPP(Recycled Reusable Plastic Pallet)를 새로 도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수출입 물류에 사용하는 친환경 재생 플라스틱 파렛트로, RFID(Radio-Frequency IDentification) 태그를 장착해 화물의 이동 이력 추적이 가능한 첨단 제품이다. 자원순환이 가능한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글로벌 파렛트풀 1위인 호주 CHEP사가 여전히 목재 파렛트 중심인 데 비해, RRPP로 한국의 성공 모델을 글로벌로 이식하겠다는 비전이다.

접이식 컨테이너인 ‘폴드콘(FOLDCON)’ 개발도 글로벌 시장 확대를 위한 독창적 사업 모델이다. 폴드콘은 세계 유일의 접이식 컨테이너다. 일반 컨테이너와 규격은 동일하지만 접으면 부피가 4분의 1로 줄어드는 설계를 적용했다. 현재 기술적 설계와 제작이 마무리됐고, 포스코와 협업해 2024년부터 본격적으로 양산할 예정이다. 서 회장은 “해상용 컨테이너의 가장 큰 문제가 돌아올 때 60% 이상 빈 컨테이너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컨테이너를 접어 부피를 25% 줄이면 운임과 배송 속도 역시 그만큼 획기적으로 단축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전 세계 항만에 빈 컨테이너가 꽉꽉 들어차 있습니다. 폴드콘을 쓰면 항만 캐파가 4배로 늘어납니다. 전 세계 해상 물류에 또 한 번의 혁명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서 회장은 물류 불모지에서 시작해 오늘날 한국 물류의 혈관을 그려내기까지 45년 세월을 ‘공존공영(共存共榮)’이라는 네 글자로 압축했다. 그의 집무실과 사내 곳곳에서 공존공영을 내건 액자를 흔히 볼 수 있다.

40년 전 물류연구원을 세울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협회에 함께해준 초기 멤버들, 회원사들, 파렛트풀 시스템을 받아준 고객사들이 모두 뜻을 공감하고 함께했기에 이뤄낸 성과들이죠. 현장에서 신경 써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는 시스템이 바로 파렛트풀입니다. 로지스올의 ALL도 얼라이언스(Alliance)를 뜻합니다. 직원, 회사, 고객,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게 기업가로서 마지막 꿈입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311호 (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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