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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과학자 

 

페기 청은 자신의 공학 지식과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판매량을 크게 늘리며 판다 익스프레스를 중국 음식계의 맥도날드로 만들고 억만장자가 됐다.

▎누구보다 빠른 AI 도입 청은 1974년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디지털화된 흉부 X선을 스캔하여 선천성 심장질환의 징후를 찾아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청은 “이런 기술은 패턴 인식이라고 불렸다”며 “이제는 인공지능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 사진:PHOTOGRAPH BY ETHAN PINES FOR FORBES
7월 로스앤젤레스의 찌는 듯한 더위도 페기 청(75)을 지치게 하지 못했다. 판다 익스프레스를 공동 설립한 억만장자 청은 세련된 연구소 건물과 40만㎡에 달하는 시티오브호프 병원을 둘러싼 일본식 정원을 거닌다. 청은이 병원에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통합하는 1억 달러 규모의 프로그램을 후원한다. 청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서구에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이라면 알 만하다. 청은 1960년대에 홍콩에서 이주하여 1970년대에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촉망받는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금세 그만두고 자신의 수학과 과학, 공학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업계로 향했다. 미국인의 입맛에 맞는 완벽한 중국 음식 배합을 만들어내는 패스트푸드 사업이다.

서던캘리포니아 쇼핑몰에서 음식점 하나로 시작했던 사업은 40년 뒤 매장이 2400개에 달하는 대기업이 됐다. 매년 50억 달러가 넘는 양의 차우멘, 베이징 비프, 오렌지 치킨을 푸드 코트, 공항 터미널, 드라이브스루 음식점 등에 공급해 미 전역에서 제공한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중국 음식을 둘 중 한 곳에서 사먹는다. 골목에 있는 구멍가게나 판다 익스프레스다. 판다 익스프레스는 아시아 포장 음식 시장의 43%를 차지했으며, 중국 음식점 P F 창, 히바치 그릴 사쿠 저팬 등 경쟁사보다 매장이 10배는 더 많다.

그러나 판다 익스프레스의 비법은 새콤달콤한 맛이 아니라 청의 기술적인 탁월함과 방법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청은 “음식점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학교육을 받지 않는다”며 “나는 그 점에서 유리하다”고 말했다.

청은 어떻게하면 데이터를 가장 잘 정리할지, 확장 가능한 메뉴를 어떻게 개발할지, 신입 직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교육할지 등의 문제에서 구조와 체계를 생각한다. 이 방식은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청은 판매 및 분석 소프트웨어를 맞춤 구성하여 판다 익스프레스의 성장을 이끌었다. 또 공학자로서 규율을 적용하여 운영을 표준화하고 엄격한 관리 교육 과정을 마련하여 판다 익스프레스의 직원 5만 명이 체계적으로 사고하도록 교육했다.

판다 익스프레스 점장도 연수익 최대 27만 달러


판다 익스프레스는 청을 부자로 만들었다. 자산가치가 31억 달러에 달하는 청은 포브스 400대 부자의 자수성가한 여성 12명 중 한 명, 아시아 태생 여성으로서는 두 명 중 한 명이다. 청의 남편인 공동 설립자 겸 공동 CEO인 앤드루 청(76)의 자산가치도 31억 달러다.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주의 비상장회사인 로즈미드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지만 부를 헌신적으로 다른 사람과 나눈다. 판다 익스프레스 측에 따르면 이 회사의 전일제 점장 가운데 거의 절반은 지난해 10만 달러 이상을 벌었으며, 27만7000달러를 벌어들인 사람도 있다.

청은 1947년 미얀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대부분을 장저우와 홍콩에서 보냈다. 수학 영재였던 청은 미국 캔자스주의 작은 마을에 있는 소규모 학교인 베이커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몇 명 되지 않던 아시아인 학생들이 서로에게 이끌렸다. 그곳에서 청은 앤드루를 만났다. 이후 청이 장학금을 받아 오리건주립대로 편입하고 앤드루는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촌을 돕기 위해 LA로 이사했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됐다. 발명가를 꿈꿨던 청은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74년에 미주리대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청은 교수나 발명가가 되는 대신 항공우주 회사 맥도넬 더글러스에서 일하며 시스템 설계 업무를 수행하고 해군을 위한 전장 시뮬레이터 개발을 도왔다. 나중에 3M에 인수된 패서디나 소재 기업 컴탈에서 초기 안면 및 음성 인식 프로젝트 업무를 짧게 수행했다. 밤과 주말에는 앤드루가 1973년 아버지와 가족,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리고 중소기업청의 대출을 받아 개업한 패서디나의 작은 음식점 판다 인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전환점은 1982년 새해 전야였다. 다음 날 UCLA는 미국 대학 미식축구 시합에서 미시건을 상대로 맞이했다. 큰 경기를 앞두고 전설적인 UCLA 미식축구 코치 테리 도너휴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판다 인에 들렀다. 테리의 형제인 펫 도너휴는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고 돌이켰다. 도너휴 가족은 글렌데일 인근에 쇼핑몰을 짓고 있었는데 청에게 그곳에 음식점을 낼 것을 권했다. 청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 딸을 키우면서 공학자로서 전일제 근무를 하는 데 지쳤던 청은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청 가족은 그해 말 판다 익스프레스를 열고 판다 인의 음식을 빠른 카운터 서비스 형식으로 제공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줄이 문 밖까지 이어졌다.

도너휴는 “아주 훌륭한 음식점이었다”며 “중국 음식계의 맥도날드를 위한 세계적인 수준의 모델까지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청은 맥도날드의 성공을 주도한 레이 크록을 방불케하는 속도로 움직였다. 1980년대 쇼핑몰 설립 열풍을 기회로 삼아 전국 곳곳에 있는 새 쇼핑몰에 매장을 열었다. 이는 MBA 방식이 아니다. 모닝스타의 증권 애널리스트인 션 던롭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식 접근법은 온갖 곳에 매장을 여는 것이 아니라 한 지역씩 차근차근 진출을 타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은 박사의 접근법을 택했다. 대형 체인들은 당시 전산화된 현금등록기(POS)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청은 1975년부터 판다 인에서 이를 사용했다. IBM이 최초의 디지털 POS 시스템을 출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은 자체적으로 시스템을 만들어서 일일 매출을 추적하고 소고기와 돼지고기 중 무엇이 더 많이 팔리는지 분석할 수 있었다. 다른 개인 음식점들은 그런 시스템의 필요성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못 하던 시기였다.

점장들이 컴퓨터 사용을 어려워하자 청이 직접 사용법을 가르쳤다. 일부 체인에서 요리사들 간에 초우멘에 간장과 노두유 중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하는지 논쟁이 일자 청은 모든 요리사를 판다 익스프레스 본사 회의실로 불러들여 모든 음식에 대해 하나의 레시피로 통일할 때까지 토론하게 했다.

1991년 판다 익스프레스는 18개 매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푸드 코트의 간판 음식점이 되는 것만으로는 더 큰 도약이 어려웠다. 청은 “매력적인 시장이지만 독자적인 브랜드를 확립하기가 어렵다”며 “사람들이 단지 중국 음식점으로만 여길 뿐”이라고 말했다.

청은 쇼핑몰에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독립 매장을 짓기 시작했다. 현재 쇼핑몰에 입점한 매장은 2400개 미국 판다 익스프레스 음식점 가운데 156개에 불과하며 총매출의 5%를 차지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청은 외부 자금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많은 주요 체인이 외부 자금을 받으면서 주주나 사모펀드의 요구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또 청은 서브웨이나 던킨도너츠 같은 대기업이 규모를 키우는 원동력이었던 프랜차이즈 방식에도 저항했다. 즉, 위험이나 비용이 거의 없이 매출의 최소 4%, 2억 달러 이상의 로열티를 받을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음식점 경영 능력을 믿은 것이다. 앤드루 청은 “우리가 더 잘 운영할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판다의 미국 영업점 가운데 단 165개, 약 7%만 프랜차이즈이며 대부분 공항, 대학, 군사 기지 등 규정상 청 일가가 직접 경영할 수 없는 곳들이다.

고객이 충분히 찾아오기만 한다면 수익성 높은 전략이다. 실제로 고객이 많이 왔다. 판다 익스프레스는 지난해 매장당 약 240만 달러 매출을 올리며 미국 음식점 체인 상위 50개 중 12위를 차지했다. 지난 10년 동안 판다 익스프레스의 매장은 800개가 늘었고 매출은 2014년 22억 달러에서 50억 달러 이상으로 늘었다. 목표는 계속해서 미국에 연간 100개 이상의 새 매장을 열고 2028년까지 매출을 두 배 증가한 100억 달러로 높이는 것이다.

음식 서비스 컨설팅 업체 테크노믹의 산업 연구 이사 케빈 심프는 “판다 익스프레스는 아시아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존재”라며 “유일하게 전국적인 규모의 업체”라고 말했다.

물론 판다 익스프레스 아메리카에서 지원할 수 있는 매장 수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청은 해외 매장 105곳을 열었으며, 여기서는 일부 통제권을 넘겨주고 공급망과 현지 시장 조건 때문에 현지 운영 주체 없이는 영업이 힘든 경우 프랜차이즈로 돌렸다. 심지어 성장을 위해 다른 체인의 프랜차이즈 운영도 시작했다. 투자은행 스티븐스에서 음식점을 담당하는 조슈아 롱은 “아주 독특하다”며 “그러면서도 영리하다. 이렇게 하면 다양한 성장 방식을 탐색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판다 레스토랑그룹 모기업은 캘리포니아에서 일본식 치크케이크 회사 엉클테츠의 독점 미국 프랜차이즈 업체로서 매장 12곳을 운영한다. 또 청은 알래스카, 하와이, 괌에서 레이징 케인스 프라이드 치킨 매장 총 13곳을 운영한다.

청은 “기회는 여전히 많다”며 “지난 50년보다 향후 50년 동안 더 많이 성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옛날 음식


▎ 사진:GETTY IMAGES
IBIS월드에 따르면 미국 패스트푸드 업계는 지난해 3620억 달러어치의 음식을 판매했다. 10년 전보다 40% 증가한 수치다. 그러나 대중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전 세계 어디서든 돈을 벌기에 좋은 사업이었다. 인류 역사에 남아 있는 포장 음식 네 가지를 소개한다.

79년: 노동자 계급 로마인들은 고대의 버거킹이라고 할 수 있는 테르모폴리아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테르모폴리아는 제국 곳곳에서 따뜻한 고기와 치즈를 제공했다. 폼페이 영업점 89개가 발견됐다.

1300년: 중세 영국 콜체스터에는 부엌이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장인, 노동자, 농부는 노점에서 판매하는 비둘기 파이, 보리 팬케이크, 아몬드 페이스트리로 배를 채웠다.

1902년: 필라델피아 사람 두 명이 최초의 ‘오토맷’(자동 음식점)을 열었다. 공장 노동자가 유리 상자에 동전(오늘날의 1.8달러 가치)을 넣으면 레몬머랭파이나 맥앤치즈, 크림시금치 등을 받을 수 있다.

1921년: 미국 최초의 버거 체인 화이트 캐슬이 캔자스주 위치토에서 문을 열었다. 조립 라인과 같은 효율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햄버거를 빠르게 만들어냈다. 가격은 하나당 5센트, 현재 80센트 가치다.

※ HOW TO PLAY IT


▎사진: PATRICK WELSH FOR FORBES
혁신적인 디지털 프로세스는 비즈니스 운영 방식을 바꾼다. 이번 세대의 투자 테마다. 판다 익스프레스 설립자처럼 공학박사 학위가 없다면 이 트렌드를 활용할 영리한 선택지는 액센추어다. 액센추어는 대단히 저평가된 아일랜드 소재 글로벌 컨설팅 기업이다. 직원은 73만2000명이며 데이터 분석, 공급망 프로세스, 운영 소프트웨어, 최고 경영자 전략 등을 통해 전 세계 9000개 고객사가 더 성장하고 생산성을 높이도록 지원한다. 주가는 2009년부터 2022년까지 1500% 올랐다가 급격히 하락했다. 주가가 충분히 낮기 때문에 향후 18개월 동안 현재보다 27% 높은 수준인 400달러까지 랠리할 수 있다.

Jon D Markman은 마크먼 캐피털 인사이트의 사장이자 패스트 포워드 인베스팅의 편집자다.

- CHASE PETERSON-WITHORN 포브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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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호 (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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