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김소울의 삶과 미술심리(45) 

비의 노래 | 태초의 편안함부터 우울함까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한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프레더릭 차일드 하삼(Frederick Childe Hassam)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해냈다. 계절의 온도와 습도를 오롯이 전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자.

▎프레더릭 차일드 하삼 〈비 오는 날, 뉴욕〉 1892
햇살이 따사로운 화창한 날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잔뜩 흐린 날에는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분명 감정이라는 것은 나에게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나 대인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 같은데, 왜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날씨가 달라졌다고 내 마음이 변하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면서 우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날씨는 단순히 명도와 채도가 바뀌는 벽지 같은 존재가 아니다. 날씨에는 따듯함과 서늘함이 있고, 촉촉함과 건조함이 있으며, 꽃향기와 흙 내음이 있다. 날씨에는 계곡물의 조잘거림과 새의 노래가 있으며 수박의 달콤함과 귤의 새콤함이 있다. 그렇기에 날씨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으로 느끼는 대상이다.

마음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날씨 중, 비 오는 날은 특히나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시간이다. 비 오는 날의 추억이 인상 깊고, 비 오는 날에는 특정 노래를 듣고 싶고, 비 오는 날에 생각나는 맛있는 음식이 있는 것도 날씨가 우리에게 주는 다양한 감각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빗소리가 마음을 울리는 이유


▎프레더릭 차일드 하삼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봄비〉 1885
비 오는 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채롭다. 누군가는 비가 오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더러움이 씻겨 내려가는 듯해 기분이 좋다고 한다. 빗소리, 혹은 비가 온 후의 풀과 흙 내음이 좋다는 사람도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 싫고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차가 밀린다는 등 여러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비가 너무 많이 올 때 모두가 걱정을 하고, 비가 너무 오지 않을 때도 모두가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심리상담 현장에서 비가 내리는 날의 사람을 그리게 해 스트레스를 측정하는 검사로 사용하기도 한다. 스트레스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자극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피하고 싶을 뿐이지만, 전혀 스트레스가 없는 상황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프레더릭 차일드 하삼은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로, 다양한 날씨의 도시 풍경과 사람들을 그린 작품을 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소개되지 않았으나, 미국에 인상주의를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삼의 작품 안에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작가 주변에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스치듯 등장한다. 그렇기에 작품 속에는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생동감이 담겨 있다. 날씨에서 느껴지는 온도, 축축함, 소리, 반짝임 등 다양한 감각이 살아 숨 쉬는 하삼의 작품 중 [비 오는 날, 뉴욕]은 마차에서 막 내리고 있는 여성이 비에 젖을까 드레스를 추스르고 있고, 남자는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

긴바지나 긴치마를 입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젖어버린 아랫단이 주는 축축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면 마냥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지만은 않는다. 이 둘이 한껏 멋을 내고 어딘가에 도착해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기대감과 우산을 씌워주는 남성의 배려가 따듯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비 오는 날, 뉴욕]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닥과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빗소리는 주로 일정하고 빠르게 진동하며 정확하지 않은 소리를 낸다. 그렇기에 빗소리를 들으면 대부분 차분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사실 빗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살면서 가장 편안했던 시기를 떠올려본다면 언제일까. 태어나서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일까. 생각해보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련은 시작되었다. 세상에 내던져졌고, 고통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피투된 것이다. 오롯이 편안했던 시기는 아무런 외부 자극도 없고 섭취와 배출이 자연스러웠던,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던 때뿐이다. 자궁 안에서 태아가 몇 개월간 들었던 소리는 라디오 주파수가 어긋난 듯한 소리와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바로 이 소리가 빗소리와 유사하기에 ‘빗소리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궁 안에서의 경험을 재생하려는 시도는 이 외에도 많다. 우리 몸은 몇 개월간 가장 가까이에서 느꼈던 리듬감, 바로 엄마의 심장박동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불안할 때 일정한 리듬감을 느끼면 긴장이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비트 있는 음악을 듣거나 다리를 떠는 것,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것도 일정한 리듬감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우리 몸은 자궁 안에 존재하던 웅크림도 기억한다. 그렇기에 다양한 위로의 말, 긍정적 메시지보다 나를 진심으로 꼭 안아주는 누군가의 포옹에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살과 살이 만나는 따듯한 접촉, 진심 어린 포옹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손길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피우는 설렘


▎프레더릭 차일드 하삼 〈비 내리는 자정〉 1890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나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생명들이 다시 태동한다. 마른 나무에서는 연둣빛 잎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흙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땅에서는 다시 풀들이 움튼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봄비이다.

하삼의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봄비]는 제목을 보는 이들이 설렘을 느끼게 하겠다는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미국인이었던 작가가 추구하는 미술사조는 인상주의였고, 인상주의는 파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움직임이었다. 작가에게는 선망의 장소이자 낭만의 도시라는 별칭을 가진 파리, 그중에서도 샹젤리제 거리를 담았다. 샹젤리제 거리는 프랑스 파리 동쪽의 콩코르드 광장 오벨리스크에서 서쪽의 샤를 드골 광장 에투알 개선문까지 이어지는 2㎞ 길이 도로의 명칭이다. 샹젤리제란 이름은 엘리시온 들판이라는 의미인데, 이 들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행복한 영혼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 믿어왔던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에 봄비가 내리고 있다.

같은 하늘에서 내리는 같은 비지만, 어느 날의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 것이 아니라 추적추적 내린다. 그리고 세상이 물에 젖어 꺼져가는 듯 공기도 무겁게만 느껴진다. 저기압 영향도 있겠지만, 그날의 나는 분명 지쳐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어떤 대상에게 덮어씌우는 것을 정신 분석학에서는 ‘투사’라는 방어기제로 설명한다. 같은 새가 지저귀고 있어도 어떤 날은 새가 노래를 하고, 어떤 날은 새가 우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마치 누군가의 눈물처럼 느껴지는 날, 이 비에 모든 것이 잠식되어 숨이 막힐 듯한 날. 나는 소진되었고, 지친 마음은 비에 투사되었다.

[비 내리는 자정]에서 하삼이 쓴 색은 어두운 파란색이다. 파란색은 마치 비처럼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밝은 파란색은 희망이나 마법적 힘을 상징한다. 그래서 종교적 존재가 등장하는 이미지에 하늘색이 많이 사용된다. 천주교인들이 하늘에서 비롯된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일반적으로 코발트블루는 신뢰의 색이라 불린다. 많은 은행과 SNS의 로고에 파란색이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어두운 파란색은 우울감과 연결되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영어에서도 ‘I am blue’가 우울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비 내리는 자정] 속 파란색도 가라앉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차분함이 힐링과 명상, 생각을 정리하는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지만, 에너지 수준이 낮은 사람들과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차분함이란 땅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심연과도 같다. 비 오는 날에는 해가 많이 가려지고, 이 때문에 햇살을 쬐었을 때 만들어지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감소하게 된다. 세로토닌은 행복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며, 부족할 경우 우울해지거나 충동적이 된다. 비가 오면 몸에 통증이 있던 사람은 더 욱신거린다는 느낌을 받고, 졸음을 관장하는 멜라토닌의 분비가 줄어들면서 몸이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합쳐지면 비 오는 날은 더는 설렘도 힐링도 아닌, 피하고 싶기만 한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날씨의 흐름을 이용하기


▎프레더릭 차일드 하삼 〈여름 오후〉 1886
장마철처럼 오랜 기간 비가 오는 경우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비가 오는 날이 있다면 화창한 날도 함께 존재하는 나라이다. 만약 비 오는날 우울감을 많이 느낀다면, 가을이나 겨울에 계절을 탈 확률도 높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일조량이 부족해 세로토닌이 줄어들고 멜라토닌이 늘어나는 계절성 우울증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계절성 우울증 치료를 위해 약 30분간 빛에 노출하는 광선요법을 실시하는데, 결국 자신이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을 늘린다면 우울감도 줄어들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최근 우울감을 느낀다고 생각된다면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일부러 햇빛을 쬐는 시간을 늘릴 수 있다. 실외 활동이 부담된다면 실내에 있더라도 창가에 앉거나,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며 바깥 공기를 쐬는 것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돈이나 큰 노력 없이 제공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 될 수 있다.

비를 맞는 것은 싫지만 빗소리를 듣는 것, 비 오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창이 큰 카페, 비내리는 풍경이 보이는 식당이나 술집은 이런 감성을 채워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비가 오면 귀찮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이동을 꺼리는 경우가 더 많다. 나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전환해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귀찮음은 잠시 내려놓고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우산을 펴는 것 역시 나를 아끼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김소울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미술치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국제임상미술치료학회 회장이며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미술치료전공 겸임교수이자 가천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객원교수이다. 플로리다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유미술관』 외 12권의 저역서가 있다.

202311호 (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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