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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우가 만난 예술계 파워리더(35) 김응주 교토예술대학 한국사무소 소장 

‘예술입국’의 철학을 전파하다 

정소나 기자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영역을 넘어, 사회를 반영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교토예술대학 한국사무소 김응주 소장은 한국의 재능 있는 학생들이 ‘예술입국’을 건학 이념으로 삼은 교토예술대학에서 예술로 사회를 이끄는 영향력 있는 리더로 성장하도록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정승우 이사장과 김응주 소장(왼쪽)은 한국과 일본의 예술계, 양국의 예술 교육에 대해 다양하고 심오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비행기를 타면 영화 한 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착하는 나라 일본. 가까운 거리 외에 다양한 매력을 지닌 여행지로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그중에서도 교토는 일본의 옛 수도이자 일본의 역사와 문화, 예술이 살아 숨 쉬는 고도로,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관광지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예술과 기술이 조화롭게 결합된 도시이자 명성 있는 예술대학과 학원도 많아 예술 유학을 위한 도시로도 급부상 중이다. 지난 2023년에는 일본 문화청이 수도 도쿄를 떠나 교토에 둥지를 틀며 문화예술을 활용한 지역 활성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기대되는 기회의 도시이기도 하다.

윤동주 시인의 서거 80주년인 2025년 2월, 정승우 이사장이 만난 이달의 아트 피플은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는 교토에 자리한 교토예술대학 한국사무소 김응주 소장이다. 교토예술대학은 예술로 사회를 바꾸겠다는 ‘예술입국(藝術入國)’을 건학 이념이자 철학으로 삼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예술대학 중 손에 꼽히는 취업률을 기록하며, 사회성이 강한 작품들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변화를 주도하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김 소장은 한국사무소를 통해 일본 유학을 꿈꾸는 예술 인재들에게 교토의 숨겨진 매력과 함께 교토예술대학만의 차별화된 예술교육의 장점을 알리며 일본과 한국을 잇는 민간 외교사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교토예술대학에 몸담기 전, 공간을 통해 문화의 가치를 알리는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예술대학에서 지역 디자인을 전공한 후 교토의 ‘아르파크 지역계획건축연구소’를 거쳐 오사카의 ‘건설기술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건설기술연구소는 한국의 도로공사 같은 곳인데, 그곳에서 일하며 특정 지역의 물리적인 공간 정비가 그 지역을 오랜 시간 지켜온 소수 민중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음을 실감했다. 이후 교토에 문화교류 지원 기구인 ‘주식회사 프레임아웃 쟈팡’을 설립해 사람과 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그것을 공간에 담는 법, 다른 사람과 문화를 연결하는 법을 찾고자 했다.

이곳에서 전시와 음악회 개최, 공부방 운영, 동화 구연, 인터뷰 기획, 공간 디자인, 운영위원회 활동, 전단과 홍보물 제작, 지역 물품 소개와 판매, 가이드, 학술 교류, 연구 서적 기획·공저, 번역 출판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전개했는데, 흩어진 점들 사이에 선을 긋는 작업이었다.


▎김응주 소장은 예술가를 꿈꾸는 한국 학생들이 일본의 문화도시 교토에서 더 많은 기회를 갖고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돕고 있다.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수익이 적었다. 당시 소지한 비자는 이익 창출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일본 입국관리국이 나에 대한 의심을 높여갈 때 나의 이런 활동들을 눈여겨본 교토예술대학 이사장님의 권유로 교직원이 되었다. 현재는 이 대학의 예하 기관인 한국사무소를 10년째 운영 중이다.

일본에서 프레임아웃 쟈팡의 부대표로 활동하던 당시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교수님과 함께 재일동포들을 위해 교토 마을지도를 제작했다.

화려한 교토의 뒤편에는 1920년경부터 사회에서 소외된 재일동포와 부락민이 일군 마을이 있다. ‘히가시구죠’라 불린다. 내가 경험한 그들은 의식 높은 민중운동가였다. 1980년대부터 ‘다문화공생’이라는 이념을 표방하며 ‘마당’ 등 지역 축제나 활발한 연구 활동 등을 펼치며 지역 발전을 도모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긴 세월 힘든 삶으로 녹여낸 독특한 풍경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을 대외에 알려 부흥을 꾀하고자 했다. 그중 하나가 마을지도 제작이었다. 주민들과 ‘에리어 매니지먼트’를 조직하고 거리로 나가사사로운 발견들을 기록해갔다. 초안이 만들어지고 주민들이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의미를 더했다. 아픔과 변화, 희망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마을지도는 일본어판만 기획되었다. 시 행정의 지원이 거기까지였다. 일본인에겐 무관심한 곳이라 그 효과가 의심되었다. 교토는 미국의 권위 있는 잡지 ‘콘데 나스트 트래블러’가 선정한 세계 제1의 관광도시였다. 다국어판 제작이 효과를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해 주민들을 설득하는 한편 또 다른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경덕 교수가 후원하겠다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중국 서북대학의 옌옌저우(Yanyan Zhou) 준교수, 호주의 이민 컨설턴트 케이트 세경 염(KATE SE KYUNG YEOM) 대표가 대가 없이 중국어와 영어 번역을 도왔다. 2015년 한글판, 일본어판을 포함한 4개국어 지도가 완성되었고, 만족도가 높아 추가 제작을 한다는 후문을 들었다. 마을지도에 관여한 모두가 주인공이 된 사례였다.


▎재일동포들의 역사와 흔적을 대외에 알려 부흥을 꾀하고자 제작한 교토의 마을지도.
교토예술대학 출신이다.

석박사를 졸업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로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방황하던 시절이라 준비 없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실적도 없는 신생 대학이었지만, 일본의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하겠다는 다소 거창한 포부에 마음이 끌렸다.

학생들은 광장과 같은 넓은 연구실을 함께 사용했다. 전공을 초월한 횡단적 연구가 필요한 시대이므로 벽을 없앴다고 했다. 수업, 세미나, 연구 발표도 전공과 상관없이 모두 함께 듣는 방식이었다. 교수님들의 거침없는 비평과 입담이 학생들을 힘들게 했는데, 만나면 종일 토론했다. 늘 가까운 곳에 교수님들이 있었다.

교토예술대학의 건학 이념이 ‘예술입국’이다. 예술로 사회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 네 글자에는 재단 설립자 ‘도쿠야마 쇼쵸쿠’의 인생이 녹아 있다. 그는 젊은 시절 6.25전쟁을 반대하며 반전 운동에 참가한 경력을 가졌다. 지금의 리더들이 사회를 이끌지 못함을 개탄하며 오직 예술만이 살길이라 여겼다. 창작 과정과 예술적 사고로 세상을 바로 바라보는 힘을 기르고, 예술 작품에 사회를 반영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변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학생들에게는 인간적 소양을 키워 거침없이 사회에 진출할 것을 요구했다.

교토예술대학은 건립 40년 만에 일본 최대 규모의 예술대학으로 성장했다. 지금도 지원자는 늘고 있으며, 예술대학 중에는 톱 클래스의 취업률을 자랑하게 되었다. 업계가 신뢰하는 대학, 고등학생이 뽑은 가장 개성 있는 대학이 되었다.

교토예술대학은 윤동주 시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들었다.

윤동주 시인도 일본 유학생이었다.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1943년 여름, 교토의 시모가모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기가 막힐 일이다. 당시 시인은 ‘타케다 아파트’에서 하숙을 했는데, 이곳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세월이 흘러 타게다 아파트가 있던 곳이 교토예술대학 학사가 되었다. 조선통신사 연구의 대가인 나카오 히로시 교수님이 이를 발견했고 이사장님의 지시로 ‘유혼지비’를 세웠다. 건립 30주년이었던 2006년의 일이었다. 나카오 교수님과 이사장님은 “밥은 챙겨 먹고 다니냐”며 유독 한국 학생들을 살뜰히 챙겼던 분들인데 지금은 모두 작고하셨다.

유혼지비는 한국의 영주석과 교토의 안마석으로 맞물려졌다. 제막식에는 시인의 여동생인 윤혜원님이 호주에서 달려오셨고, 한국과 일본의 많은 인사와 시민들이 참석했다. 행사 준비와 진행은 대학 교직원과 한국 유학생이 맡았다. 이사장님과 윤혜원님이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이었다. 시인은 한일 간의 갈등을 넘어 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대학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되었고 또 다른 시민들의 활동으로 번져갔다.

서경덕 교수도 동참했다. 시인이 전하는 화합의 메시지를 강익중 작가의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했다. 2013년 2월, 전 세계 50개국 어린이가 자신의 꿈을 표현한 그림 460장을 배경으로 목판에 시인의 ‘서시’를 한 글자씩 새겨 넣은 작품이 학교에 기증되었다. 지금은 매년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에 헌화식을 거행한다.

야노베 켄지, 코헤이 나와, 츠바키 노보루 등 스타 작가들이 교수진으로 포진해 있는데.

설명이 필요 없는 아티스트들이다. 대학 내에서는 주로 파인아트 분야의 학생들을 지도한다. 참고로 교토예술대학 교수진은 모두 현역 크리에이터다. 사회에서 활약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다.

야노베 교수의 작품은 거대하고, 만화와 우주여행을 연상하게 한다. 이를 통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담는다. ‘빅 캣 뱅(Big Cat Bang)’, ‘선 차일드(Sun Child)’, ‘십스 캣(Ship’s Cat)’ 등이 유명하고, 많은 작품이 캐릭터 굿즈로 만들어져 판매된다. 코헤이 교수의 작품은 철학적이고 해부적이다. 생명과 우주, 테크놀로지의 관계를 담는다. 그의 흔적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 리움미술관은 ‘픽셀-디어(PixCell-Deer)’를 소장 중이고, 천안 현대백화점 앞에는 높이 13m의 ‘매니폴드(Manifold)’가 설치되어 있다. 2020년 문을 연 ‘호텔 안테룸 서울’은 그가 아트 디렉션을 담당했다.

두 교수는 대학 내에 설치된 ‘울트라 팩토리’의 수장이다. 소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든다는 ‘꿈의 공방’이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나기 힘든 세계적 아티스트의 지도를 받아 고도의 조형 기술을 습득하며 대규모 아트 프로젝트에 참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세계로 수출되고, 학생들은 커리어를 쌓으며 사회로 진출한다.


▎윤동주 시인이 전하는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강익중 작가의 기증 작품 ‘윤동주의 꿈’.
츠바키 교수는 ‘베짱이’, ‘맘마리안’ 등 거대한 풍선 작품을 통해 미술과 사회의 관계를 되묻는다. 그는 지역재생 프로젝트의 아트 디텍터로서도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작가 제조기’로도 유명하다. 그는 학생들의 졸업작품전을 아트페어 형식으로 바꾸었다. 사전에 국내외 갤러리나 박물관, 평론가를 초청하여 품평회를 여는데, 젊은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유중아트센터와도 인연이 있다. 2023년 졸업작품전에서는 총 272점, 약 2억원의 작품이 판매되었다. 당시 파인아트 분야 학생이 150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실적이다. 많은 학생이 재학 중에 작가로 데뷔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교토예술대학은 서울, 타이베이, 상하이에 해외 사무소가 있다. 사무소별 역할과 차이점이 있을까.

해외, 특히 아시아에 사무소를 둔 일본 대학은 드물다. 여기서 아시아의 예술적 역할을 강조하는 설립자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2012년 국립 타이베이예술대학, 한국예술종합학교 등과 함께 아시아 예술교육기관 연맹인 ‘ALIA’를 결성하기도 했다.

해외 사무소는 각국 출신의 졸업생들로 구성된다. 대학의 철학에 공감하는 졸업생들이 이를 홍보하며 ‘동지(同志) 관계’를 형성하라는 것이다. 주로 각국 교육기관과의 학술 교류와 이를 위한 협정, 워크숍·심포지엄 개최에 대한 판단과 진행에 관여한다. 올해는 세계의 졸업생들을 연결하는 ‘교류 스테이션’을 설치할 예정이다.

각국 인재들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이다. 이 부분은 각국의 사정에 맞게 진행된다. 한국에서는 대학 입시에 중점을 두고 대학의 이념을 전하는 설명회나 워크숍을 개최한다. 타이베이에서는 문화 교류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을 소개하는 교육 행사에 참가한다. 대만 학생들은 먼저 병설교인 교토문화일본어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일본을 접한다. 상하이에서는 상호 이해와 예술 교류를 우선시한다. 중국 내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의 전시·심포지엄 개최, 우수 예술학교의 교토예술대학 방문 체험 등을 주도한다.


▎세계적 아티스트의 지도를 받아 고도의 조형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울트라 팩토리’.
한국과 일본의 예술대학을 비교한다면.

어려운 질문이다. 인구 감소와 급변하는 사회 정세 속에서 양국의 대학들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다만 시간과 방법, 결과물이 다를 뿐이다. 일본은 20~30년 전부터 교육계 전반에 걸쳐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티칭’을 떠나 개개인의 가능성을 찾고 견인하는 ‘코칭’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입시제도나 커리큘럼이 바뀌고 교수가 학생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2021년에는 한국의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센터시험’을 ‘공통 테스트’로 바꾸는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미래 예측이 어려운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지식만이 아닌,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사고력, 표현력, 실전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이로써 모든 시험의 문항은 지식의 정도를 평가하기보다 ‘지식을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가’를 묻게 되었다.

한편 예술대학에 지원하는 학생이 꾸준히 늘고 있다. 하나의 답을 찾기보다는 주어진 과제에 어떻게 대처해갈 것인가를 탐구하는 과정이 이러한 분위기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예술대학은 흔히 상상력과 창조력을 양성하는 곳이라 말한다. 상상력은 ‘세상을 바라보는 힘’, 창조력은 ‘생각을 표현하는 힘’으로 풀어낸다. 예술대학이 사회에 통용되는 힘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부상했다.

그 와중에 독특한 입시제도가 추가되었다. 대학을 방문해서 수일 동안 여러 학과의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해결하며 그 과정을 평가받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숨겨진 적성과 개성을 찾고 다른 학과나 대학을 평가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토예술대학에서는 유학생에게도 동등하게 이러한 시험을 시행 중이다.

또 프로젝트 타입의 수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직접 창작과 디자인의 프로세스를 완수해봄으로써 실전력을 기르자는 것이다. 교토예술대학의 경우 행정기관이나 기업이 제공한 프로젝트에 학생들이 직접 참가한다. 프로와 동일한 조건이다. 때론 타 학과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다른 팀과 경쟁한다. 이와 병행하여 직업 체험이나 실무 경험의 기회도 늘어났다. 대학들은 오픈 캠퍼스에서 자신의 레벨을 어필하기보다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설명하게 되었다.


▎교토예술대학 내에 세워진 윤동주 시인의 유혼지비. 시인은 한일 간 갈등을 넘어 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조기유학에 대한 소장님의 의견이 궁금하다.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조기유학에 대한 결정권은 부모에게 있다. 하지만 유학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의 주체는 어린 학생이다. 한국 부모의 자식 사랑은 남다르지만, 남의 성공담에 이끌려 무리한 선택을 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교토예술대학 교수 겸 교육자인 ‘혼마 마사토’씨는, “한 농부가 어린 벼가 빨리 자라도록 볏대를 잡아당겼더니 뿌리가 떠서 죽었다”는 ‘조장(助長)’이란 단어의 어원을 빌려 부모의 ‘과잉 간섭’을 경계한다. 또한 ‘지시’가 아닌 ‘코칭’을 강조한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질문을 던져 생각이나 속내를 알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가능성을 판단하는 방법을 권유한다.

최근 학부모들로부터 “유명 학원이 있는 근처로 주소지를 이전하겠다, 학교를 퇴학하고 유학 준비를 하겠다,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함께 비자를 받고 싶다, 대학의 교육 과정을 단축하여 졸업하고 싶다” 등 상담 요청이 많다. 무엇보다 자녀 입장에서 충분히 판단한 후에 선택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일본 예술대학 진학을 고려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조언을 해달라.

한국 수험생들은 당연히 합격을 목표로 매진할 것이다. 이때 미스 매치가 발생한다. 수험생들은 합격할 방법을 찾지만, 대학은 졸업할 학생을 찾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선구적인 대학들은 학업을 마친 후 사회에서 활약할 수 있는 학생들을 선호하기에 개개인이 가진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궁금해한다.

입학 준비생들은 과거의 합격 사례들을 답습하고 이에 맞춰 기술과 지식을 쌓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맹목적인 추구는 점점 자신다움을 사라지게 하고 모두가 비슷한 답안을 보여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떠한 형태가 되든 결국에는 남과 다른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 줘야 할 것이다.

- 정리=정소나 기자 jung.sona@joongang.co.kr _ 사진 박정훈 객원기자

202502호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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