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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속 용광로처럼 냉철한 열정으로 

이임광의 인물다큐
정준양 포스코 회장 

글■이임광 월간중앙 객원기자 [llkhkb@yahoo.co.kr]
가장 무서운 자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포스코의 사령탑을 맡은 정준양 회장은 무섭고도 어진 사람이다.하지만 온화한 카리스마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우직함이다. 소수의 강자만 살아남을 ‘철의 전쟁’에 나선 그의 전법도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34년을 조연으로 살다 쉰이 넘어 생애 첫 ‘팬미팅’을 하며 눈물을 흘린 탤런트 이계인. 그를 늦깎이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드라마 <주몽>의 모팔모였다. 실패를 거듭하며 부러지지 않는 강철검을 만들기 위해 우직하게 담금질을 하던 그 대장장이 말이다. 고구려 건국의 무기가 강철검이었던 것처럼 현대 철강기술의 핵심도 바로 제강(製鋼)이다.

철광석을 녹인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진정한 철강으로 거듭나게 하는 제강은 품질의 90%를 결정짓는 핵심 공정이다. 포스코 7대 회장으로 취임한 정준양(61) 회장도 바로 이 제강 쪽에서 담금질된 경영자다. 1975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제강기술과장, 제강공장장, 제강부장을 거쳐 광양제철소장, 생산기술부문장(사장)에까지 올랐다.

정 회장이 모팔모와 닮은 점은 제강 전문가라는 것만이 아니다. 그 우직함도 닮은꼴이다. 그가 즐겨 쓰는 말도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우직한 사람은 조직과 동료에 대한 의리가 있다. 우직한 사람은 여유가 무엇인지 안다. 그가 회장에 오른 것도 어쩌면 의리와 여유 있는, 산을 옮길 만큼 무서운 우직함 덕분인지 모른다.

정 회장이 광양제철소 제강부장으로 있던 1994년 제강부는 ‘성과 증진 경쟁력 강화’대상을 수상하면서 포상금으로 1억 원을 받았다. 그때 정 회장은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재직 중인 직원의 자녀는 대학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지원받을 수 있어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데, 질병으로 사망한 직원의 자녀는 그런 혜택을 볼 수 없어 배움의 기회를 놓칠까 걱정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인데 우리가 아니면 누가 돕겠습니까? 포상금 1억 원의 20%를 출연해 장학기금을 만들고, 제강부 직원이 재직 중 질병으로 사망할 경우 그 유자녀에게 대학까지 전액 장학금을 지원하면 어떻겠습니까?”

정 회장은 당시 질병으로 직원이 사망했을 때 유가족을 지속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했다. 정 회장의 제안에 간부들은 박수로 동의했고, 이후 제강부 포상금의 20%, 각 공장 포상금의 10%를 출연하고 1,000명이 넘는 제강부 직원이 매달 1,000원을 회비로 걷어 재원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렇게 발족한 ‘강우회(鋼友會)’는 지난 15년 동안 재직 중 병으로 사망한 직원의 자녀 11명에게 총 1억5,40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현재도 1억5,200만 원의 기금이 있다. 가장(家長)이 사망한 후 연고를 찾아 전국 각지로 흩어진 유가족들은 이 강우회를 구심점으로 언제나 포스코 가족임을 생각하고 지금도 서로 연락한다.

동료애로 뭉친 강철 같은 강우회 결성
후배는 선배의 발자국을 보고 배운다


정 회장의 따뜻한 인간미와 온화한 성격은 회사 안팎에서 정평이 나 있다. 항상 미소 띤 얼굴로 누구를 만나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이 친근한 성격 덕분에 사람이 모여들고, 그를 중심으로 한 상하관계는 언제나 부드럽다는 것이 지인들의 평이다. “마치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사람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현장 시찰로 출장이 잦던 그는 언제나 동행하는 직원이나 운전기사를 위해 미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해 들려주고는 했다. 그래서 그와 함께하는 여정은 아무리 길어도 지루하지 않다고 한다. 그는 윗사람에게는 친화력으로, 아랫사람은 포용력으로 대하고, 협력업체 사람들과는 상부상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광양제철소장으로 재직할 때 수천 명의 제철소 직원, 외주협력업체, 지역 주민과 원활한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 당시 한번은 인도에서 방문하는 손님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포스코 영빈관 요리사를 서울의 인도음식점에 수 차례나 보내 요리법을 배워오게 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모든 기술은 현장에서 구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2007년 포항제철소 2코크스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리더가 된 후로는 식구(食口)의 의미를 조직에 전파해 왔다. 평사원들과도 스스럼없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긴다. 식당과 메뉴는 언제나 그가 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싼 음식으로 낭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호사스러운 음식점이 분위기를 경직되게 할 수 있음을 우려해서다. 그래서 탕이나 빈대떡 등 대중음식이 있는 식당을 즐겨 찾고, 함께한 사람들에게 편안한 자리가 되도록 배려한다.

덕분에 계절과 맛에 따라 좋은 식당을 잘 선택한다고 직원들로부터 ‘소탈한 미식가’라는 평판도 얻었다. 자칫 평사원들에게는 ‘밥값을 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가 될 것 같지만, 그가 워낙 자연스럽게 유쾌한 분위기를 조성해 처음에는 함께 식사하는 것을 어려워하던 직원도 일단 한번 식사를 트면 언제 또 불러주나 기대할 정도다.

식사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씩 눈을 맞추며 애로와 의견을 듣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입담이 좋아 덤으로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어느새 좌중이 솔깃해진다. 한국역사연구회·무경칠서연구회 같은 스터디그룹도 그런 식사 후 자연스럽게 생긴 사내 모임이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정 회장도 산을 좋아한다.

제강부장 시절 한 달에 한 번은 직원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직원들과 함께 오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산행 중에 다정다감하게 대화를 이끄는 것도 그래서다. 그와 함께하는 등반은 험준한 지리산이라도 힘들지 않다. 그는 새해 첫날 직원들을 이끌고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해맞이를 하고는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2박3일 동안 종주하며 지리산 10경을 섭렵하고 반야봉 낙조를 다음 산행에 기약하는 여유로움을 보이기도 했다. 산행에서 언제나 앞장서는 그는 “후배는 선배의 발자국을 보고 배운다”며 자연과 선인의 조화를 예찬하고는 했다. 회장 취임 직후에도 광양제철소를 방문해 현장 직원들과 함께했다.

제선부 조업지원팀을 찾아 혁신활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휴일에도 현장에서 애쓰는 직원들을 격려했다. 직원들도 꽃다발과 정 회장의 모습을 담은 캐리커처를 만들어 화답했다. 이어 전기도금공장을 방문한 정 회장은 포스코의 첫 여성공장장인 오지은 공장장의 안내를 받아 제품을 살펴보고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혁신지원센터에 들러서는 기계정비산업기사 자격증시험 공부에 여념이 없는 500여 명의 직원을 격려하기도 했다.

월 5권 독파, 향토사학자 수준
참을 수 없는 지적 호기심


정 회장은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동료에게는 관대할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특히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데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하다. 최고경영자가 된 후에도 자투리 시간을 쪼개 외국어를 익힐 정도다. 자기계발에 남다른 열정이 없다면 실천하기 힘든 일이다.

그에게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고시공부 같은 것이다. 독서량이 무서울 정도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 한 달에 다섯 권 이상 독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공대를 나와 엔지니어로 수십 년을 일해온 그가 인문학자 수준의 해박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비결도 학창시절부터 몸에 밴 독서 습관에 있다.

문화·예술·역사·철학 등 인문사회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지만, 특히 역사라면 향토사학자를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준다. 사석에서 고향인 수원과 화성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정조시대로 되돌아간 착각에 빠질 정도라고 한다. 제선에서 냉연·도금까지 복잡한 공정을 거치는 제철은 신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해야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지난 3월4일, 호주의 원료 공급사인 리오틴토의 샘 월시 부회장(오른쪽)을 만나 양사 간 현안을 협의하는 정 회장.

정 회장이 유럽연합(EU)사무소장으로 있을 당시 그곳은 연구소 기능도 수행했기 때문에 각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엔지니어와 연구원이 함께 근무했다. EU사무소장으로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각 분야의 업무 진행 상황을 파악하는 모습을 보고 사무소 직원들은 이미 정 회장의 제철지식과 기술 동향에 대한 이해가 담당자를 능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연구서적을 탐독하며 필요한 기술을 연구하고 조사해 동향을 업데이트하고 현장에 적용해 그 결과까지 보고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지적 호기심만 강한 것이 아니다. 정 회장에게 아이디어는 생명이다. 연구소에서 탁상공론처럼 돌아다니는 이야기도 일단 귀에 들어오면 그냥 흘리는 법이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어떻게든 실험하고 실행해야 직성이 풀린다. “아이디어도 자산인데 이를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하지 않는 것은 낭비”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괜찮다 싶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현장에서 기술로 정착할 때까지 인력과 조직을 총동원해 구현시키고야 만다. 1980년대 초, 포항제철소 제강부 기술과장 시절 한 신입 연구원이 그를 찾아왔다.

신입 연구원은 고급강의 재료인 청정한 강(鋼)을 제조하는 방안을 제안했는데, 현장에서 협조가 안 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이나 하려고 털어놓은 이야기를 정 회장은 놓치지 않았다. “그런 아이디어라면 실행해 보자”며 연구원을 데리고 나갔다. 그와 함께 관련 부서를 찾아 다니며 아이디어가 실현되도록 하고, 아이디어가 적용된 후에도 현장 테스트를 직접 보면서 연구원을 격려했다.

당시 포스코의 조직문화로는 말단 연구원이 기술과장을 찾아오는 것도, 찾아와 하소연한다고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찾아주는 것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연구원은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한다.

타고난 발명가, 열정의 아이디어맨
지독하게 까다로운 도요타도 감탄


정 회장 자신도 아이디어맨이다. 2002년 광양제철소 상무 시절에는 제강공장 슬래그 야드를 순찰하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다. 슬래그란 철강을 생산하고 남은 철 찌꺼기인데, 이 슬래그를 처리하는 것이 고질적 문제였다. 냉각 후 일단 야적장에 쌓아두었다 분쇄해 쓸 만한 슬래그를 선별해 재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것이 아닌데다 버려지는 슬래그도 많아 이래저래 손실이 컸다. 야적장에 쌓여 있는 모습도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슬래그를 이렇게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고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없을까?’ 순간 정 회장은 획기적 발상을 하게 됐는데, 철 찌꺼기를 열간에서 바로 재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포스리드(POS-LEAD)’라는 잔탕 재활용 기술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기술로 청정한 슬래그 야드가 실현됐을 뿐 아니라 연간 300억 원의 원가절감까지 거두었다. ‘기술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 회장의 생각이다. 그래서 현장작업자부터 기술과 품질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한다. 현장에서 이론적으로 뒷받침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인터넷 오픈과정’을 신설해 엔지니어들이 언제 어디서나 체계적 철강지식과 품질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광양제철소가 처음 가동된 1984년 4월, 당시 전로의 노체 수명은 700~800회였다. 아무리 해도 1,200회를 달성할 수 없었다. 노체 수명은 제강공장의 원가·생산·품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다.

정 회장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전로 종점온도와 종점산소량을 획기적으로 낮추기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 결과 잔류 슬래그 코팅기술을 개발해 노체 수명을 향상시켜 1998년 기존 한계수명보다 5배가 넘는 6,500회를 웃돌아 연간 30억 원이 넘는 원가절감을 실현했다.

지난 3월11일 포항 인재개발원에서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마친 후 새내기 사원들과 함께한 정 회장.

현장에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쏟아 엔지니어들조차 생각하지 못한 발상으로 지속성장을 위한 기반기술을 구상하기도 했다. 2007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포스코의 파이넥스(FINEX) 기술도 정 회장이 완성한 것이다. 그해 여름 정 회장은 파이넥스 공장을 방문해 파이넥스 공정 중 하나인 직접환원철(철광석에서 철 성분을 분리해낸 철 덩어리) 제조공정을 개선할 방안을 찾기 위해 담당 엔지니어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회의를 마쳤는데, 돌아오는 차 속에서 정 회장은 갑자기 무릎을 쳤다. 파이넥스를 활용해 이산화탄소를 획기적으로 줄일 방안을 찾아낸 것이었다. 이때 정 회장이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한 공정은 성공적으로 상용화돼 파이넥스 비용을 크게 절감했을 뿐 아니라 미래 대체에너지를 철강공정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로 개발돼 현재 국제특허를 출원 중이다.

정 회장은 친환경 혁신 제철공법인 파이넥스 공법을 조기에 정착시킨 공로로 금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정 회장은 고급 자동차강판의 국산화 개발도 주도했다. 지난해 말 포스코는 일본 이외 철강사로는 처음으로 도요타 일본공장에 자동차강판 납품을 시작했다. 도요타는 30㎞가 넘는 강판을 확대경으로 살펴 티끌만 한 흠집도 하나 없어야 납품받을 정도로 까다롭다.

도요타 납품은 포스코의 자동차강판이 품질과 경제성에서 세계 최고가 됐음을 뜻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염화칼슘에 부식되는 저급판밖에 생산하지 못했던 포스코가 지금은 도요타를 비롯해 닛산·혼다·폴크스바겐 등 세계 최고 자동차회사에 납품하고 있다. 포스코가 짧은 자동차강판 생산 역사에도 이런 성과를 거둔 데는 광양제철소장이던 정 회장의 공이 크다.

평사원 때부터 리더의 통찰력 길렀다
부문 최적화가 아니라 전사 최적화 지향


정 회장은 평사원 시절부터 늘 윗사람 시각으로 보았다. 자신이 맡은 부문만 보는 부문 최적화가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전사 최적화를 늘 지향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업무 범위도 넓어지고, 그러면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 회장은 달랐다. 실무자가 사전에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보고할 때도 그 분야의 전문가를 놀라게 했다.

지적 호기심이 많아 평소에 스쳐 지나가는 것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담아두었다 갑작스러운 보고에도 단편적인 사항을 연결해 전체적이고 전문가적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토론할 때면 전문가 입장, 실제로 도입해 운영하는 당사자 입장 등 여러 측면을 모두 고려해 총체적으로 본다. 그래서 언제나 처방은 정확하고 신속하다.

정 회장의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단 목표를 정하면 반드시 관철하고야 만다. 따라서 판단과 결정이 빠르다. 우유부단하거나 차일피일 미루는 식의 무책임한 업무 태도를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다. 지난해 초 포항제철소에 새로운 도금라인을 신설하는 방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신기술을 도입할 것인지, 아니면 현재 가동 중인 검증된 방식의 설비를 놓을 것인지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아직 연구 단계이며 품질도 검증되지 않은 설비에 막대한 투자비를 쏟아 붓는 것은 위험이 크다는 주장과, 미래 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해야 기술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마라톤회의는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났다. 그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정 회장은 평소의 온화함을 찾아볼 수 없이 진노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양쪽을 호되게 질책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도 모른 채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독선적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은 아무런 발전이 없다.”

정 회장은 투자비가 다소 늘어나더라도 신기술을 도입해 설비를 구축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정하고, 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기존 방식으로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채택하는 절충안을 제시해 밀어붙였다. 늘 윗사람의 시각과 생각으로 전체를 내려다본 덕분에 정작 자신이 윗사람이 됐을 때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준비된 통찰력이었다.

2004년 포스코가 창의적 문제 해결 기법인 ‘트리즈(TRIZ)’를 도입하기 위해 전문가를 양성할 때도 정 회장의 혜안은 제대로 통했다. 당시 트리즈를 도입하자는 의견에 적잖은 임원이 “트리즈를 기존 6시그마와 같이 추진하면 선택과 집중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트리즈는 보류됐다.

그런데 정 회장은 6시그마가 통계적 기법을 이용한 최적 조건을 도출하기는 하지만,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결국 2006년 근원적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 회장은 “6시그마와 상충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면서 트리즈를 적용하라”고 지시했다.

이처럼 정 회장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는 과정에서도 선언적 구호가 아닌 혁신에 대한 흔들림 없이 확고한 철학과 소신을 보여주었다. 트리즈를 확산하기 위해 연구소, 포항과 광양의 제철소에서 ‘트리즈 컨퍼런스’를 주재하며 그 활용을 강조했다. 그 결과 여러 건의 지적재산권을 확보했고, 2년간 60개가 넘는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창의적 문화를 위한 혁신을 솔선수범한 결과다. EU사무소 시절에도 사안이 긴박하면 해당 연구기관과 제작사를 직접 방문해 확인하고는 했는데, 비행기 대신 회사 차량을 이용했다. 경비 문제도 있지만 유럽은 국가 간 지리적 특성으로 항공편을 이용하면 시간이 더 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과 실기(失機)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 누구를 만나든 친구처럼
언어·풍습·역사… 빈틈없이 예습


정 회장은 EU사무소장 재직시절 각국의 철강전문가와 CEO를 만나 국제 비즈니스 감각을 쌓았다. 세계 철강기술이 어느 방향으로 진보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철강산업의 지속성장을 위한 신기술 아이디어와 다른 분야 첨단 기술의 접목도 시도했다. 또 세계 철강기술학회 세미나 등에도 전문가를 파견해 결과를 직접 보고받았다.

EU사무소는 주변의 여러 나라를 방문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첫 만남부터 딱딱한 주제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 회장은 어느 나라에 가든, 아무리 높은 고위직 인사를 만나든 항상 놀라울 정도로 대화를 주도했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분위기를 밝게 하는 기술을 타고났다는 것이 당시 함께 근무했던 부하직원들의 말이다.

이는 평소 유럽의 문화를 이해하고 유럽인들과 소통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빈틈없이 준비하고 감각을 익혔기 때문이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틈틈이 유럽사(史)와 유럽 각국의 풍습·음식·경제와 사회 이슈가 되는 뉴스까지 공부했다. 여기에 식사 중에 마실 수 있는 위스키·맥주·와인 제조법과 그 역사까지 꿰뚫을 정도였다.

직원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현지 언어를 배우거나 스키·춤, 박물관 관람 등 현지 문화를 익히는 데도 열심이었다. 직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자는 취지로 무엇이든 경험한 후에는 감상문이나 방문기를 반드시 남기도록 했다. 정 회장은 글로벌 연구개발(R&D) 네트워크를 구축해 해외 선진 철강사들과 다양한 기술교류를 주도해 왔다.

회장 취임 이후 철광석 산지인 인도에는 상(上)공정 투자를 하고,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베트남·멕시코 등지에는 최종 제품 생산설비를 건설하기로 한 글로벌 전략도 일찍부터 그런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철강산업 트렌드를 읽은 데서 나온 것이다. 쇳물을 만드는 제강은 원료가 있는 광산 근처에서, 제품 생산은 시장 근처에서 하겠다는 전략이다.

정 회장은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오세아니아 순방에 동행했을 때도 호주에 머무르면서 원료 공급업체인 리오틴토와 BHP빌리튼을 방문해 협력 증진 방안을 모색했다. 정 회장은 한·호(濠)경제협력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이기도 하다.

열린·창조·환경의 세 가지 경영철학
쇳물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담금질


포스코는 지난해 30조6,424억 원의 매출과 4조4,469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어려운 경영 여건에서도 포스코가 이처럼 양호한 경영 성과를 올린 것은 생산부문에서 매년 1조 원 안팎의 원가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올해 정 회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가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감한 원가절감 목표를 잡았다.

급박한 시황 변화에 대비해 경제적 조업으로 패턴을 전환할 생각이다. 특히 철강기술분야 최고 전문가답게 포항·광양 신제강공장, 광양 후판공장 등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를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간다는 전략이다. 정 회장에게 2009년은 오히려 포스코의 새로운 도약을 여는 해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

“지금 이 순간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암울한 경제현실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부지불식간에 파고들 수 있는 두려움 그 자체다.” 그는 포스코의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열린경영’ ‘창조경영’ ‘환경경영’의 세 가지를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제시했다. 열린경영은 이해관계자와 상생 협력, 그리고 개방적 조직문화를 통해 소통과 신뢰를 확대해 나아가는 것이다.

정 회장은 “열린경영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가 모든 임직원에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취임 후 첫 근무지로 포스코센터 29층의 넓은 회장실 대신 용접봉의 뜨거운 불꽃 사이로 땀냄새가 풍기는 울산의 현대중공업 LNG선 건조현장을 향한 것도 그래서다. 고객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포스코는 그 동안 국내 철강시장에서 독보적 지배력을 바탕으로 고객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정 회장은 취임 직후 “그 동안의 성과에 자만하지 않고 고객과 주주, 외주 협력업체에 겸손한 자세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취임사에서도 그런 각오가 담겨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스스로 잘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이해관계자들은 다르게 평가하거나 우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면도 있다. 이제라도 그들과 상생하고 협력하는 개방적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고객부터 챙기자며 취임하자마자 고객사를 가장 먼저 방문한 것도 그래서다. 취임 후 첫 출근한 지난 3월2일 아침 헬기로 울산으로 내려가 최길선 현대중공업 사장을 면담하고 생산현장을 둘러봤다. 이어 거제로 이동해 삼성중공업 배석용 사장을 면담하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창조경영은 기술 모방과 추격의 한계를 뛰어넘어 포스코 고유의 기술을 창조해 나아가는 것이다.

정 회장이 말하는 창조경영은 기존의 ‘World First, World Best’ 전략으로 기술 개발을 하고 창의적 사고로 가장 많이 판매할 수 있는 ‘World Most’ 제품을 확보하는 것이다. 세계 최초와 최고로 최대를 실현하겠다는 야심이다. 정 회장은 ‘에너지 다소비, 이산화탄소(CO2) 다량 배출’이라는 철강산업의 한계를 극복하겠다고 역설했다.

현재 개발 중인 새로운 철강 제조 프로세스로 ‘저탄소 녹색성장’의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철강산업이 택해야 할 윤리라는 것이다. 정 회장은 “철강산업의 윤리경영은 CO2 배출을 줄이는 환경경영”이라며 “환경경영에 투입하는 돈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연결해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장 직속인 미래성장전략실과 녹색성장추진사무국을 글로벌 미래전략을 담당하는 핵심 부서로 승격시킨 것도 그런 취지에서다.

러키 세븐, 난세의 영웅 될까?
생존만으로는 안 돼, 생존 이후 대비


정 회장은 세계 철강산업의 구조조정을 글로벌 성장의 기회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현재 철강회사와 원료회사에 대한 인수합병·합작·지분참여 같은 다양한 투자를 모색하고 있다. 멕시코 자동차강판공장, 베트남 냉연공장, 미국 API강관공장을 준공하고 중국·태국·인도 등에 7개의 가공센터를 신설해 고객에게 높은 품질의 서비스를 빠르게 제공할 수 있는 글로벌 마케팅 네트워크도 강화할 계획이다.

중국·인도 같은 전략시장을 중심으로 해외 생산 능력을 확대해 국내외 전체 생산 규모를 5,000만 t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을 비롯해 포스코의 역대 회장들은 철강 불모지에서 연간 조강 생산 능력 3,300만t의 세계적 철강사를 일구어냈다. 그 바통을 이어받아 정 회장은 3년간 포스코를 이끌어가게 된다.

‘러키 세븐’. 포스코의 7대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이 무한한 영광이라며 자축한 표현이다. 개인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겠지만, 사상 최악의 불황을 극복해야 하는 시점에 중책을 맡게 됐다는 점에서는 부담일 수 있다. 철강경기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5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 철강시장이 지금은 1년 단위, 심지어 수개월 단위로 상황이 급변한다.

신일본제철이 50%에 이르는 감산에 나선 것도 그래서다. 과거에는 품질이나 가격 가운데 어느 하나만 충족시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으나 지금은 두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감산하더라도 수익은 내야 하는 과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정 회장 역시 철강시장 전망이 밝지 않음을 너무 잘 안다.

그는 “3월에도 감산체제로 갈 것으로 본다”며 1~3월 감산 규모가 70만~80만t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심지어 “상반기까지 위기가 지속된다면 200만t가량 감산하고, 2~3년 위기가 지속된다면 1,000만t까지 감산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정 회장은 훨씬 더 멀리 내다보고 있다. 임원회의 때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지만, 더 큰 과제는 위기가 지나간 이후 소수의 강자만 살아남았을 때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다. 극한의 원가절감과 기술개발로 ‘소수의 강자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최대 30%까지 감산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경영환경이 악화하고 있으나 2018년 창립 40주년까지는 매출 100조 원의 글로벌 톱3의 철강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정 회장의 비전이다. 위기일수록 미래성장산업 개척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 회장의 생각이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고객의 요구와 미래시장에 부합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기술은 포스코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중국과 차별화하고 일본을 넘어설 최선의 길이므로 당장의 이익과 관계없이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생존 이후의 경쟁력을 갖추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투자야말로 미래에 대한 보험이라는 말이다.

“현재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체력을 비축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올해 연결기준 매출액 41조 원 달성을 목표로 내놓았다. 올해 투자계획도 수정 없이 밀고 나가기로 했다. 올해 국내 투자 6조 원과 해외투자 1조 원을 합쳐 7조 원을 집행하기로 했다. 축소할 생각은 전혀 없다. 현재 진행 중인 해외 일관제철소 건설은 인도의 경우 중단 없이 추진할 계획이며 베트남도 새로운 부지를 물색 중이다.

버리고 채우는 지혜를 깨닫다
기본과 원칙이 성장보다 더 중요한 가치


정 회장이 신규 인력 채용 규모를 예정보다 늘린 것도 단순히 일자리를 나누는 차원이 아니라 앞을 내다본 경영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포스코와 계열사는 올해 어려운 경영 여건에도 신입사원 채용 규모를 지난해와 비슷한 2,000명 수준으로 정했다. 관계사와 함께 총 1,600명의 인턴사원도 채용하기로 했다.

인턴사원 채용으로 추가 부담하게 될 100억 원이 넘는 인건비는 전 임원이 10%씩 반납한 보수와 직원 초임 삭감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는 “어려운 때일수록 우수 인재 확보가 중요하다”며 “신입사원과 인턴 채용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위기를 타개할 것으로 점쳐진다.

해법은 200만t을 감산하더라도 흑자를 낼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대우조선 인수에 실패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됐다. 정 회장은 현재로서는 대우조선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우조선이 중요한 고객이고, 해양구조물산업이 새로운 철강 수요를 창출하는 분야여서 상황이 변하면 적절히 검토할 생각이다.

요즘 정 회장이 주창하는 혁신 캠페인은 바로 ‘VP(Visual Planning)’다. VP는 ‘버리고 채우는’, 일하는 방식의 혁신이다. 비효율적 업무 방식과 불필요한 지시·보고·회의 같은 낭비 요인을 버리고, 가치 있는 업무로 채우자는 것이다. VP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미에루카’는 도요타 생산현장에서 탄생한 용어로 ‘문제점을 보이게 하라’는 의미다.

문제를 숨김없이 드러내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 혁신 기법으로 포스코는 지난해 7,400억 원의 원가절감을 실현했다. 버리고 채우는 것이 어디 일하는 방식에만 적용되는 것이겠는가? ‘상생’과 ‘보전’을 실천해 존경받는 기업으로 거듭나려는 리더의 철학으로도 값진 것 아닐까? 정 회장은 취임 당시 이런 말을 했다.

“훗날 후배들에게 포스코를 기본과 원칙에 충실하게 새로운 성장의 길로 이끈 경영자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기본과 원칙이 성장의 전제가 된다는 뜻이기를 바란다.

이임광
미 경영전문지 <포브스(Forbes)> 한국판 기자로 근무했다. 이후 국내 그룹사와 경영인을 주로 탐구하며 프리랜서 기업전문기자 및 CEO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정몽구 회장을 분석한 <변화를 향한 질주>와 라응찬 신한금융 회장을 분석한 <신한파워> <열정은 詩보다 아름답다> 등이 있다.


200904호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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