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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속 세상 | 야생마의 발굽소리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김슬기 월간중앙 기자 rookie@joongang.co.kr / 사진·지미연 월간중앙 기자
‘청춘의 동반자’ 할리데이비슨…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남자들의 날개가 되다

▎할리데이비슨 라이더들이 가을 색이 물씬한 경기도 양평의 한 지방도로를 달리고 있다. 80~100㎞의 속력으로 달릴 때 엔진소리가 가장 듣기 좋다고 라이더들은 말한다.




▎할리 라이더들은 도로에서 서로를 향해 인사를 나누거나 라이딩 대열에 합류하는 등 그들만의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도로에서 행렬을 이뤄 달리는 할리맨들.
가을비가 지나간 11월의 주말, 막바지 단풍을 즐기러 나온 차들로 교외로 나가는 도로가 꽉 막혔다. 그 사이로 ‘투타타타~앙’ 하며 중저음의 매력적인 엔진소리가 도로를 가른다. 300㎏이 넘는 매끈한 몸매의 할리데이비슨 다섯 대가 연달아 지나가자 운전자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린다. 듬직한 가죽 재킷과 풀 페이스 헬멧, 보잉 선글라스, 가죽 부츠와 해골 무늬가 그려진 스카프에 이르기까지 라이딩 기어로 한껏 멋을 낸 할리맨들의 주말 나들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상욱 씨가 서부 개척시대 카우보이를 연상시키는 복장으로 바이크에 올라탔다.
11월 10일 오전 11시. 국내 할리데이비슨 마니아들의 클럽 중 하나인 ‘코브라 라이더스’ 회원들이 경기도 양평으로 라이딩을 떠났다. ‘마초의 로망’으로 불리는 할리데이비슨을 끌고 온 이들은 복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코크(Coke)’라는 닉네임을 가진 오상욱(44) 씨는 검은색 카우보이 모자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할리맨들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형 총과 체인, 벨트 등 라이딩 기어로 자신의 개성을 한껏 표현한다.
허리에 권총까지 맨 그의 차림은 영락없는 서부 개척시대의 카우보이 룩이다. 오씨는 라이딩을 떠나기에 앞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더니 예의 권총 모양의 은색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머리에는 해골 무늬 두건을 두르고 검은색 부츠를 신은 그는 다른 라이더의 복장보다 더 화려하고 요란하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워낙 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직업도 코카콜라 코리아의 영업총괄 파트 리더를 맡고 있다. 주말에 할리데이비슨을 탈 때만큼은 일상의 온갖 상념을 잊고 오직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회원들이 모두 모이자 할리에 일제히 시동이 걸리고 아이들링을 한다. ‘다다다닥, 다다다닥, 다다다닥’. 마치 말발굽 같은 소리를 내는 할리의 엔진들이 저마다 ‘달리고 싶다’고 말하는 듯하다.

라이더들은 카뷰레터에서 만들어지는 독특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이 배기음을 “할리만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가슴속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북소리와도 같다.

바이크에 문외한인 사람들마저도 ‘아, 할리구나!’ 하고 금세 알아차리게 하는 그 소리다. 거기다 할리의 엔진으로부터 허벅지로 전해져오는 짜릿한 진동이 더해지면 심장은 더욱 세차게 뛰게 될 것이다. 할리가 미끄러져 나아가면 라이더도 할리의 일부가 된다.


▎해골문양이 인상적인 할리데이비슨 로고. 할리 라이더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춰 그 로고를 직접 제작하곤 한다.




▎기존의 할리데이비슨 바퀴를 날렵한 모양으로 개조해 멋을 낸 바이크. 라이더들은 자신의 애마는 맞춤형으로 새로 디자인하는 커스텀을 통해 개성을 입힌다.
“할리데이비슨은 말 잘 듣는 애마”

할리데이비슨의 트레이드마크랄 수 있는 특유의 굉음은 최대 1802㏄의 엔진에서 비롯된다. 할리는 속도보다는 소리를 즐기면서 느리게 달리게 만들어진 바이크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심장박동 속도와 비슷한 배기음과 엔진의 진동이 라이더의 몸을 깨운다. 지축을 울리는 듯한 할리의 이 배기음에 취해 할리의 세계에 입문한 사람도 적지 않다.

오상욱 씨도 그랬다. “마치 마약 같았어요. 할리가 ‘두두두두둥’ 하고 지나가는 걸 보았는데 그날 밤 잠자리에서도 그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거예요. 그 강렬한 잔상이 꿈에까지 나타났으니 결국 할리데이비슨을 타지 않을 수 없었죠.”

오씨는 2003년, 중고 바이크를 사서 할리데이비슨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2009년에는 출퇴근용으로 다른 중고 할리데이비슨 모델을 구입한 데 이어 2년 전에 지금의 ‘로드킹’ 모델을 구입했다. 할리의 매력이 뭐냐고 묻자 “내 말을 아주 잘 듣는, 입 안의 혀 같은 애인이죠”라고 대답이 돌아왔다. 국내에서 할리데이비슨을 즐기는 국내 할리족들의 평균 나이는 43세. 직업은 기업체 임원·변호사·의사 등 전문직이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청년 라이더와 여성 라이더의 수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할리데이비슨이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된 것은 1999년. 그 뒤로 할리 라이더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는 할리 클럽만 해도 200개에 이른다. 국내에는 3500여 대의 할리데이비슨이 있다. 할리 라이더들은 ‘할리 오너스 그룹(Harley Owners Group)’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동호회 호그(H.O.G.)에 가입해 라이딩을 즐긴다.

세계적으로 130개국에서 1470개의 동호회가 조직돼, 100만 명이 넘는 회원이 활동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99년 H.O.G. 코리아가 결성되어 14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라이더들은 할리데이비슨을 매개체로 모여 라이딩을 즐기고 삶을 공유한다.


할리데이비슨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903년 윌리엄 S. 할리(William S. Harley)와 아서 데이비슨(Arther Davidson)에 의해 만들어진 배기량 439㏄의 모터사이클 ‘시리얼 넘버 원’이 할리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1909년 배기량 811㏄의 V형 2기통 엔진을 탑재한 ‘5-D’가 탄생했고, 1910년에는 할리데이비슨을 상징하는 엠블럼인 ‘바 앤드 실드(Bar&Shield)’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할리데이비슨이 일반인에게 히피문화와 저항, 도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건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면서부터다. <대탈주>(1963), <이지 라이더>(1969)에 등장한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남성들의 질주 본능을 자극했다. 영화 <이지 라이더>에서 두 남자 주인공이 록 음악을 배경으로 할리를 타고 달리는 장면은 할리를 단순한 모터사이클이 아닌 청춘의 동반자로 바꿔놓았다.

이후 검은색 선글라스와 가죽 재킷, 부츠가 할리 라이더들의 표본으로 자리 잡았다. 남성들이 꿈꾸는 매력적인 일탈과 로망이 할리 문화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할리우드의 반항아’로 불리는 배우 제임스 딘이 청바지에 라이더 재킷을 입고 할리데이비슨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여성들마저도 할리에 매료되게 했고, 할리는 ‘마초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미국의 마초도 아니고 평범한 우리나라 40~60대 배나온 중년 남성들이 할리데이비슨에 쉽게 빠져드는 이유는 뭘까?





▎할리데이비슨을 탄 라이더가 굉음을 내며 낙엽이 쌓인 도로를 달리고 있다.
중년의 사내들, 바이크에 몸을 싣다

H.O.G. 명예회장인 정원기(64) 씨는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수천 명의 할리 라이더가 떼지어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할리의 매력에 빠졌다고 말했다. 영화를 통해 종종 봤던 할리 라이더들의 랠리 행렬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는 라이더들의 남성답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푹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할리데이비슨을 미국의 자존심이라 여기는 미국 라이더들의 모습이 부럽기조차 했다. 정씨는 벼르고 벼르다 1993년에 할리데이비슨 중고 헤리티지 모델을 구입해 할리의 세계로 왔다.

“1990년대 초반에만 해도 바이크는 혼다가 제일 유명하던 때였어요. 혼다는 스피드용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데 반해 할리데이비슨은 오히려 묵직하고 남성스러운 이미지가 강했죠. 오랜 선망의 대상이었기에 주저없이 구매했죠.”

오상욱 씨는 어릴 적에 접했던 미국 문화의 영향을 꼽았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서부영화, 드라마의 카우보이와 건맨들에 푹 빠져 살았어요. 그게 지금도 제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라이딩을 하고 나면 바이크와 옷에 먼지가 많이 묻는데, 바이크에 내려 장갑을 벗어 툭툭 털 때면 서부 영화에서처럼 말을 타고 내린 뒤 양 날개로 젖혀지는 주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이 들거든요.”

할리맨들 중에는 유독 자기표현이 강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코스튬과 각종 액세서리 등 라이딩 기어로 개성을 한껏 드러내려 한다. 개중에서는 온 몸에 타투를 한 회원도 있다. 성형외과 의사 정지혁 씨는 “할리는 여름에는 흰 티에 청바지, 겨울에는 가죽잠바와 가죽장갑, 부츠로 무장해야 제일 잘 어울린다. 가죽이 가장 마초스러운 소재라고 할 수 있는데, 마초 패션으로 무장하고 할리를 타는 게 큰 재미다”라고 말했다.

라이더들은 복장 외에도 할리데이비슨 커스텀(맞춤형으로 디자인을 새로 하는 것)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3000만원을 호가하는 할리데이비슨에 새로 맞춤형 디자인을 하고 색을 입혀 개성을 한껏 드러내는 것이다. 국내에 있는 할리 가운데 공장에서 나온 그대로의 순정 할리는 드물다고 한다. 대부분이 라이더의 성향에 따라 튜닝과 손질을 통해 거듭나는 것이다.

배진명(56) 씨의 애마는 밝은 주황색이다. 할리 모델 중에 주황색 모델은 없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로 커스텀을 했다. 검은색 할리데이비슨들 사이로 그의 할리데이비슨이 유독 상큼하게 톡톡 튀는 이유다. ‘배트맨’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어 좌석 안쪽에 박쥐 문양도 넣었다.

오상욱 씨는 3개월의 시간을 들여 완전히 새로운 할리데이비슨을 만들었고, 그만의 개성을 할리에 마음껏 새겨 넣었다. 오씨는 “커스텀 하는데 할리데이비슨 구매에 버금가는 돈이 들었지만 바이크 하나만 봐도 ‘오상욱’인 게 티가 나야 직성이 풀린다”라고 말했다.

흔히 할리족들은 할리를 타는 것을 ‘자유를 탄다’고 표현한다. 라이딩을 ‘나를 찾기 위해 달린다’고도 말한다. 가장 미국적인 가치에 해당하는 ‘자유’를 추구한다.

손영배(53) 씨는 “머플러(엔진) 소리만큼이나 자기애가 강한 이들이 할리 라이더”라며 “라이더들 누구에게서나 도전정신과 의리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히피문화가 한국인에게 그대로 전이되지는 않을지라도, 사회에 대한 관심과 도전정신이 투철한 이들이 할리 라이더라는 설명이다.

라이더들의 모임인 레전드할리코리아의 회장인 그는 “할리 라이더들은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랠리에도 적극적”이라고 했다. 실제 할리데이비슨 코리아 동호회(H.O.G.)는 올 6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평화행진 이벤트에 참여하는가하면 독도지킴이연합회와 연계해 할리데이비슨에 독도사랑 깃발을 꽂고 다니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는 할리맨들 사이에서 여성 라이더는 존재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다. 라이딩 출발 전 최제니 씨가 바이크에 올라타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받아 60여 대의 할리데이비슨 랠리를 펼치기도 했다. 이렇게 사회성 짙은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할리데이비슨의 저항정신과 자유정신이 표출된다는 것이 손씨의 생각이다.

할리 라이더들은 스포츠를 즐기고 해외에 나가 다른 라이더들과 라이딩을 즐기는 데도 적극적이다. 올해 처음 할리데이비슨에 입문했다는 ‘홍일점’ 라이더 최제니(44) 씨는 스쿠버다이빙과 승마, 요트를 두루 즐길 정도로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

경기도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며 손님이 드문 낮 시간에 틈틈이 할리데이비슨을 탄다는 그는 “내년에는 해외로 랠리를 떠나고 싶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다. 최씨가 속한 ‘코브라 라이더스 클럽’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50일간 1만6000㎞를 달리며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가 하면, 한국과 일본의 라이더들이 모여 랠리를 하는 등 해외 라이딩을 자주 떠나곤 한다.

할리 라이더, 그들은 “자유를 탄다”

해외에서 할리 라이더들을 만나는 것은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사업가인 손영배 씨는 “미국의 할리데이비슨 카페에 가보았는데 그곳에서 만난 라이더들과 할리데이비슨이라는 공통된 소재 하나만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며 “라이더들만이 느끼는 동질감, 형제애(Brotherhood)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안승환 씨는 백발의 미국 라이더들이 워싱턴 DC 참전비에 헌화하던 장면을 지금도 잊지 못 한다고 했다. 그는 “바이크를 타면서도 ‘저렇게 멋지게 탈 수 있구나’를 새삼 깨달았다”며 “우리나라에서 할리 라이더들을 부유층, 고급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로 인식하지만, 라이더들이 세상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한다면 정말 ‘멋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도 양평에서 시작된 라이딩은 미군 카페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걸로 마무리됐다. 성조기가 휘날리는 미군 카페에 라이더들이 할리데이비슨을 세우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금방 그들에게 쏠렸다. 한 남성이 다가와 “아유, 멋지십니다. 저도 10년 후에 타는 게 꿈입니다”라고 말을 건네자 라이더 배진명(56) 씨가 “지금 타셔도 되겠는걸요. 이미 외모에서 할리 라이더로서의 모양새가 풍겨나옵니다”라며 인사를 나눴다.

휴식을 취한 라이더들은 노을이 지기 전의 가을정취를 한껏 느끼기 위해 다시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그들이 도로를 가르자 다른 할리 라이더들이 합류해 대열을 이뤘다. V자 형태로 대열을 이뤄 같이 달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만의 연대감이 느껴진다. 할리데이비슨의 벅찬 심장소리가 늦가을의 한적한 도로를 흔들었다. 이쯤 되면, 목적지 없이 나를 찾으러 떠난다는 할리맨들의 라이딩 대열에 한 번 끼어보고 싶지 않은가.

201312호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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