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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⑦ - 나의 진정한 스승은 사막·우주·미래 그리고 진리 

시인 고은 

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전민규 기자
효봉 스님과의 만남으로 불법(佛法)과 깊은 인연 맺어…가능성 있으나 구현되지 않은 미지(未知)가 최고의 스승

▎고은 시인은 “스승에 대해 그럴싸한 매혹의 언어들이 많지만 자신에게 스승은 과거형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고은은 아버지가 없는 우주의 미아로서 헤매는 동안, 그가 꿈꿨던 것이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제도화·도식화된 동아시아의 스승과 제자 관계를 그는 거부하는데, 도제 양성의 보편적 시스템은 상호 모방으로 귀결돼 결국 ‘창조와 자유의 파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시인들의 위대한 샤먼’ 고은(81) 시인을 만났다. 시인은 올해 수원 광교산 자락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올 8월, 30여 년이나 정들었던 경기 안성 공도읍 대림동산 생활을 청산한 것이다. 그는 “아직 내 마음의 어느 만큼은 그곳에 있다”고 말했다.

대림동산 서재에 있는 상당수 책들을 아직 이곳으로 가져오지 못한 까닭이다. 그가 평생을 두고 아껴 읽었던 책의 부재는, 꼭 자아의 상실과도 같은 심란함을 안겨주는 모양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임에도 그는 아직 술을 끊지 않았다. 아직 지인들에게 받는 선물의 태반이 술이다. “술은 이 순간의 꽃이에요. 그걸 어떻게 끊어요? 하지만 지금은 술보다 책이 좋습니다. 서재에 앉아 있을 때야말로 모태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가장 이상적인 존재감을 느낍니다.”

그는 요즘 막걸리에 귀의했다. 여주의 한 술도가에서 만드는 막걸리에 꽂혀 있는데, 그 막걸리에는 인공의 발효제나 감미료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마셔 본 그 막걸리에는 과연 우리가 익숙해진 새콤달콤한 가미(加味)가 느껴지지 않았다. 독하고 묵직하고 진실한 맛이다. “멀리 돌고 돌아 막걸리로 다시 회귀했어요. 이 소박한 맛이 참 좋습니다.”

올해 그는 여러 대륙을 여행하며 해외 문학행사에 참가해, 시를 읊고 노래했다. 만행이라 할 만한 긴 여정이다. 지난봄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체류하면서 까포스까리 대학에서 명예 펠로십을 받았고, 5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했다. 8월에는 칭하이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중국을 방문했고, 9월에는 22일간 시베리아를 열차로 횡단하기도 하는 등 세계 시단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베네치아에 베이스캠프를 둔 분방한 나들이었는데, 시인은 놀랍게도 그 기간 고작 반년 만에 607편의 시를 써서 1016쪽에 달하는 무거운 시집을 내게 되었다. 그의 창작열은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폭발하듯 분출·압도하고 있다. 이번 시들도 광활한 시공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사유와 유장하고 분방한 언어로 이뤄져 있다. 시집의 제목은 <무제 시편>, 출간일은 11월 20일이다. 인터뷰가 13일 이뤄졌으니 2년 만의 시집이 나오기 꼭 1주일 전이었다. 스승에 대해 묻기 전에 부모를 비롯한 혈연공동체가 그의 ‘문학적 운명’에 미친 영향을 물었다.

“이따금 이런 공상을 합니다. 입선(入禪)을 끝낸 선승의 방선(放禪)의 망상이랄까요? 진화론 말입니다. 이 진화라는 것이 후대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 과거로 소급해가는 ‘역습의 진화’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5세기에 산 인간보다 퇴화된 것이 아닌가, 현재까지의 진화가 기껏해야 이른바 봉건왕조 시대의 황금기를 실현한 것은 아닌가… 그런 의구심입니다.

저 개인으로도 어쩌면 아버지보다 훨씬 퇴화된 운명을 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는 겁니다. 아버지는 오랜 농경 자연부락의 농부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물론 약간의 한자와 언문이야 통달한 ‘준 식자(識者)’에 속했지만요. 그럼에도 그는 늘 꿈꾸는 농부였고, ‘삶의 철인(哲人)’이었습니다.”


▎고은 시인은 하늘·땅·수중 3계를 순환하는 심청을 소재로, 원고지 1500매 분량의 장시를 쓰고 있다.
마당에 나가 춤추던 아버지의 추억

자연부락의 꿈꾸는 농민, 준 식자, 삶의 철인이었다는 시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언젠가 “나는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걷는 것으로 느낄 때가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부모를 어떤 목적의 시각으로 변형시키고 싶지 않다”고도 말한 적이 있다. 부모를 신성시하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진면목을 가로막는 비현실성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었다.

“식민지 시대 쌀이 일제에 의해 공출되면 곧 절량농가가 속출했습니다. 뒤주에 쌀이 동나면 가족들은 말이 없어집니다. 그럴 때 아버지는 ‘내일은 쌀이 온다’는 희망의 말로 가족을 위로했어요. 근거가 박약한 희망이었지만…. ‘지식인문’과는 다른 ‘자연인문’에 정통한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열이레 달이라도 좀 늦게 두둥실 떠오르면 방에 있다가도 당장 마당으로 맨발로 뛰쳐나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천부의 신명’을 보이던 분이셨죠.

아마도 이런 신명과 흥의 강렬한 정서생리가 나에게도 이입되어, 내 문학의 ‘장기지속적 진행’을 가능케 한지도 모르죠. 요컨대 제 문학에는 한국 현대문학사의 요절 유산(이상과 같은)이나 한 세기의 천재 충동이나 소재의 단일성 따위가 배제되어 있습니다. 즉 길고 긴 여정으로서의 시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서정시는 서사시의 변주였습니다. 그 유장한 호흡은 아마도 아버지의 성정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물었다. 조수미에겐 카라얀이, 장한나에겐 미샤 마이스키 같은 스승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선생의 큰 스승은 누구였느냐고. 일순 그의 표정에 낭패감이 스쳤다. ‘저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가’, 그런 표정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스승론’을 거침없이 개진했다.

“카라얀이나 미샤 마이스키 같은 스승은 제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상이 다 나의 스승이랄까, 본질로서의 천진난만함이 내 스승이랄까…. 스승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매혹의 언어들이 많이 있는데, 나의 경우 스승은 과거형이 아니고 미래적인 것입니다.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미지의 세계, 내가 이루지 못한 세계, 가능성만 있지 구현되지 않은 미지(未知)가, 그런 것들이 어쩌면 최고의 스승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특정한 스승을 향해 가는 것, 과거의 어떤 스승의 전범에 의거해서, 그 스승에 의존해서 삶을 전개하는 것은 아주, 아주, 아주, 아주(네 번 강조) 싫습니다. 술꾼에게 술이 없는 것처럼 싫습니다. 서구 고대 신화에서 아버지 죽이기 신화 있죠? 이런 것처럼, 나는 죽이기까지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없는 우주의 미아로서 헤매는 동안, 내가 꿈꾸는 것이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제도화·도식화 되어 있어요.

인도만 해도 그렇지 않은데,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에 가면 그렇게 됩니다. 도제 양성의 보편적 시스템은 상호 모방이에요. 스승이 제자를 모방하고 제자가 스승을 모방하는…. 선생님하고 똑같이 되는 것은 원숭이가 하는 짓 아닙니까? 제자들에게 못난 스승이 되지 않기 위해서 늘 제자라는 거울에 자신이 비춰지는 것 아닙니까? 이런 상호모방성은 술이 담겨지지 않은 빈잔 같아서, 저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앞에 간 사람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그렇다고 조수미가 카라얀을 스승으로 삼은 것을 폄훼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니까요. 그러나 제 운명에는 조수미에게 있어 카라얀과 같은 스승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막이 제 스승입니다. 사막과 우주와 미래가 내 스승이다, 이런 말입니다. 나 이전의 어떤 사람의 ‘모방적 계승’이나 일삼고 있다면 거기에는 나의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인류사 속 여러 갈래의 기나긴 선 속의 한 매듭이 나라는 사실은 엄연하지만, 나는 나라는 유일존재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요컨대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이며, 절대 은사와 절대 제자라는 수직적 도제행위를 거부하는 가운데, 나는 무사승(無師僧:스승이 없는 승려)의 미덕에 기울어집니다.”

그는 문학, 또는 문자와 친해지는 과정에서 최치원의 글과 시에 영향받은 바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최치원뿐이겠는가. 고은이 갖고 있는 광활한 세계의 특징은 소박한 민족서정의 세계 속에서 흐느적거리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는 오히려 평생 매우 강렬한 주지주의를 견지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담론의 흐름에 그처럼 해박한 문인도 드물 것이다.

사르트르에서 자크 데리다 등을 거쳐,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슬라보예 지젝까지…. 인터뷰가 끝나고 막걸리를 마시면서도 그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소박한 언어로는 결코 퇴행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의 주지주의적 성향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그에게 어떤 존재인가?

최치원은 우리 문학사의 귀중한 척도 될 것

“최치원은 내게 하나의 전설적인 근거지라고 볼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 자신이 부모의 ‘계급 소외’(6두품)를 환경으로 삼아 조국보다 세계(중국)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자아단련의 청춘’을 살았습니다. 6두품의 첫째 아들은 진작 소년 승려로 산중에 가고, 둘째 아들인 어린 최치원은 아버지에 의해 거의 강제로 ‘1인 이민’의 절차를 밟아 당나라에 보내진 것이죠. 당시 신라에 대한 당나라 숙위제의 볼모정책도 느슨해져서 신라는 왕족이나 귀족 대신 유능한 재능의 청소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최치원의 유학도 그런 기회를 탄 것입니다. 당나라에서 큰 성공을 했어요. 북쪽 발해인이 당나라 빈공과 급제를 두 번이나 해서 남쪽 신라의 사기가 저하되었을 때, 10대 소년 최치원의 빈공과 장원급제야말로 신라 전체의 경사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중국 현지에서도 끝내 소외되었고, 국내에 들어와서도 토착 귀족사회의 냉대와 시기의 대상이 되어 산중처사의 여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야산 신선이라는, 사회적·문화적 실종자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 이름에 익숙했습니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우리 고향에서 최치원을 낳았다는 조선 후기 기록을 통해서였죠. 최치원이 남긴 많지 않은 문학세계를 1960년대 한 번, 90년대에 한 번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시도 쓰고 몇 차례 산문도 남겼지요. 한국문학에서 고대나 중세시가의 궁핍을 우리가 메워야 한다면, 최치원의 위상이야말로 언젠가 우리 문학사의 귀중한 척도가 될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청년 시절 고은 시인의 삶을 자석처럼 이끌었던 인물은 효봉 스님(속명 이찬형, 1888∼1966)이다. 26세에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후 법조계에 투신하여 서울·함흥의 지방법원과 평양 고등법원에서 법관을 지냈다. 그는 일제시대 최초의 한국인 법관이었다.

1923년 범죄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는데 사형집행 후에 진범이 나타났다. 그가 부인과 두 자녀를 버리고 불문에 들어가게 된 계기다. 효봉은 불교수행은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밤에도 눕지 않고 앉은 채 좌선하였으며,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여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은 시인이 스님을 만난 것은 하나의 계시와 같은 것이었다.

“효봉 스님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죠. 6·25 당시 나는 무수한 죽음을 목도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잔학한가를 10대의 농촌 소년의 순정으로 체험했던 것이죠. 그 죽음이 내 심신에 달라붙어 자살 미수를 반복했던 것이겠죠. 종전 후 어느 날 한 스님을 길에서 만나 그를 뒤따라갔어요. 거의 무조건적인 이끌림이었는데, 다도해 건너 통영 미륵사에까지 따라가서 보니 거기에 효봉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내게 문자를 버리라 하시고 선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전쟁 때 입은 정신의 외상이 선 수행으로 어느 만큼은 치유되었던 같아요. 하지만 효봉은 문자와 언어를 떠난 세계의 빛이었고, 끝내 나는 문자와 언어의 어둠 속에서 내 천직을 지속해야 했던 운명이죠. 이렇게 스승과의 결별이란, 그 스승이 누구이든 불가피한 것입니다.”


▎1. 청년 시절 고은 시인의 삶을 자석처럼 이끌었던 효봉 스님.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여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을 얻었다. 2. 젊은 시절 고은 시인이 한때 심취했던 실존주의의 대표적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효봉 스님, “내가 도둑놈을 키웠다”며 통곡

효봉은 출가한지 5년이 지나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1930년 늦은 봄에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방을 짓고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밖에 나오지 않을 결심으로 토굴 안에 들어갔다. 1931년 44세의 나이로 신계사 법기암의 토굴에서 하루 한끼만 먹고 1년 반 동안 용맹정진하여 큰 깨달음(見性)을 얻었다고 한다. 큰스님이 된 뒤에도 그는 상좌를 몇 두지 않고 토굴에서 수행을 계속했다. 상좌들은 토굴생활의 모진 고행을 감내해야 했는데 고은도 예외는 아니었다.

“효봉 가문을 ‘토굴 가문’이라고 해요. 다른 큰 스님들은 상좌가 수백 명이라 큰 절을 차고 앉아야 하는데 효봉가는 상좌도 몇 명 되지 않아요. 법정도 내가 중 만들었는데… 다 토굴 취향이죠. 언젠가 쌀을 일다가 몇 톨을 흘려보낸 것을 스님이 보시고 통곡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도둑놈을 키웠다’ 하시며…. 그분은 ‘흐르는 물도 아껴 써야 한다’고 하셨는데, 거기엔 아주 깊은 생명존중 사상이 깃들어 있어요. 그분 가르침이 하나의 수칙이 되어 지금도 밥 먹을 때 밥그릇에 풀기 하나 남지 않아요. 밥도 술도 남기는 법이 없습니다.

절에서 좀처럼 사용하진 않는데, 출세간의 사주법을 만들어 은밀하게 전수하는 게 있어요. 출가한 사람이 사주나 보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우스워지니까 아주 비밀로 하죠. 거기에는 중노릇을 오래할까 안 할까를 보는 운명론 같은 것이 있어요. ‘영가상법’이라고 하는데 관상과 사주를 같이 넣어서 봐요. 다른 상좌는 안 보시는데 효봉 스님이 어느 날 나를 이렇게 보더니 ‘너는 아무래도 여기 오래 있을 거 같지 않다’, 이러시는 겁니다.

나에겐 청천벽력이었죠. 그 말을 듣고 법당 뒤에 가서 엉엉 울었습니다. 너 곧 죽는다는 얘기나 똑 같아요. 평생 승려로 죽겠다는 결심으로 하루 한끼만 먹고 고행을 했는데…. 법당 뒤에서 통곡을 했습니다. 스님이 내 등을 두드리며 하시는 말씀이 ‘너는 약사여래 집안이다.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약을 많이 지어서 중생의 병을 낫게 할 사람이다’, 이러시는 겁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더군요.”

토굴에서의 선 수행은 지독한 검약이 병행되었다. 변을 보고 밑을 씻을 때는 대나무 조각을 사용했다. 사용 후 흐르는 물에 씻은 후 잘 말려 다시 사용했다. 산에서 채취한 고운 모래로 양치질을 했던 시절이다. 그러니 ‘럭키치약’을 처음 쓸 때의 문화적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스무 살 청춘의 욕구도 욕구려니와 도대체 득도의 순간은 언제 찾아온단 말인가.

“어느 아지랑이 피는 봄날 스님하고 앉아서 좌선을 하는데 춘기(春氣)가 발동을 했는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어요. 다도해 통영 미륵도에 봄 아지랑이가 어른어른 하는 그 봄날에 제가 미쳐버린 거예요. ‘스님 부처가 되어서 무엇 합니까’ 하면서 온돌 구들장을 하나 깨서 문을 열고 던져버렸어요. 혼날 줄 알았는데, 스님은 태연했습니다.

‘아, 그래! 부처가 되어 무엇 하겠나’ 하시면서 뒤로 벌렁 눕더니 ‘야, 우리 낮잠이나 자자’ 하시는 겁니다. 역으로 가책이 심해져서 엉엉 울었어요. 그래서 참회의 절을 아홉 번 하고 용서를 빌었더니 스님은 ‘그래? 그러면 또 앉아볼까나?’ 하시며 다시 앉아요. 절대로 강압하는 법이 없고…. 절대로 이렇게 하라, 저렇게 마라 잔소리가 없어요. 그러면서 당신은 정진, 또 정진하시는 거죠.”

효봉은 1930년 금강산 안거에 들어갈 때 그곳 승려들에게, “저는 늦게 입산하였으므로 한가하게 정진할 수가 없습니다. 묵언을 하면서 입선과 방선 경행을 하지 않고 계속 앉아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라고 양해를 구했다. 일반적으로 선 수행스님들은 1시간 동안 정진하면 10분 포행(布行:졸음과 피곤을 풀기 위해 천천히 걷는 것)하게 하는데 효봉은 시간이 아까워 그것도 하지 않았다. 안거를 해제하면 걸망을 메고 통상 만행(萬行)을 떠나는데 효봉은 해제 결제도 하지 않고 계속 정진했다고 한다.

“스님은 제 음력 생일날 꼭 떡을 해줬어요. 그때는 떡이 정말 귀했습니다. 떡 하면 중이 웃는다 해서 승소(僧笑)요, 국수 하는 날도 중이 빙그레 웃으니 역시 승소, 1년에 한두 번 두부 하는 날도 침을 흘리면서 승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삼소라고 했습니다. 스님이 떡을 해주시니까 그건 기가 막힌 잔치지요.

떡을 해주시면서 오늘이 무슨 날이냐 묻습니다. 선방에서 흔히 하는 말대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죽은 대답을 한다던가, 또는 ‘오늘 어떤 중생이 죽고, 한 부처가 태어난 날이지요’, 이렇게 헛소리를 한다던가 하면 ‘이놈의 새끼야, 오늘 네 놈의 생일이다’ 일갈하시는 거예요. ‘아이쿠야!’ 하고 스님에게 감사드리게 되지요. 그렇게 자상하게 해주신 스님에게 왜 고마움을 느끼지 않겠어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승의 경지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개척해서 만나는 것, 그것이 참된 스승과 제자의 경계로 보는 겁니다. 그럴 때 스승과 진리는 동의어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안 그러면 스승은 단지 인간의 굴레 속 높은 자리를 차지한 존재에 불과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운명이 있어야 합니다. 스승이 아니라 스승 할애비라도 초월하는 자신만의 운명을 지고 나아가야죠.”

“이놈의 새끼야, 오늘 네 놈의 생일이다”

그는 어떤 운명을 짊어지고 문자의 세계, 문학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그 운명을 촉발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실 그의 거대한 예술 세계를 조망할 때 이 같은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연기의 순환 속에서 그의 예술은 성숙되었을 것이다. 그 가뭇한 원형질의 정체에 대해서는 시인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1947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 이육사의 시 ‘광야’를 처음 읽었습니다. 시라는 것과의 처음 해후였지요. 그 전엔 이육사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에는 다른 시 세계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어요. 화자로 ‘나’를 내세우지도 않고, 김소월이나 한용운 같이 ‘님’도 노래하지 않습니다. ‘광야’라는 무한개념의 공간이 내세워진 겁니다. 또 닭이나 닭 울음도 생기기 이전의, 천년만년 이전의 거대한 시간이 나옵니다. 그것은 어제와 내일 따위의 시간 개념을 초월하는 시간이죠.

또 거기에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초인이 등장합니다.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인지, 또는 인도의 성인 오쇼 라즈니쉬의 ‘초인’인지는 알 바 없으나, 일단 너와 나 따위의 인간을 초월한 대인간이 제시됩니다. 그렇게 짧은 몇 행의 시 안에 대공간·대시간·대인간이 등장하고 있어요. 시가 무서웠습니다. 감히 내가 시인이 될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1949년 어느 날 나는 한하운 시인의 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화가 지망생으로 미술부에서 방과 후 그림을 그리고 1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해가 진 어스름 속에서 길가에 놓인 책 한 권을 발견했던 겁니다. 누군가 신간을 사가지고 가다 분실한 것이었죠. 그 책이 바로 <한하운 시초>였습니다. 나는 그 시집을 들고 집으로 가서 밤 깊도록 읽었습니다. 중학교 4학년 1학기의 학생, 오늘의 고교 1학년 1학기 때였죠.”

고은은 그 시집의 감동으로 엉엉 울면서 시인이 되기를 맹세하기에 이르렀다. 그도 한하운 시인처럼 문학이란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몇 달 뒤 6·25가 터지면서, 그리고 좌우익 간의 무서운 살육전을 목격하게 되면서, 그에게는 시인이나 화가 따위의 꿈은 산산조각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오로지 죽음과 허무만이 그에게 마지막 남은 이데아가 되었다. 그 허무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동양의 무(無) 사상과도, 19세기 서구의 니힐리즘과도 무관한 나 자신의 ‘전후 의식’이었습니다. 결국 25세에 시인이 되었지만 한하운은 그 뒤로 다시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그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 5천년 전의 ‘길가메시 서사(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빌로니아의 서사시)’나 3천년 전의 그리스 시들을 지금도 이따금 펼쳐봅니다.

생애 전반은 책 없는 삶이었어요. 어렸을 때는 주변에 아예 책이 없었고, 젊었을 때는 언어와 문자를 부정하는 산중생활을 했습니다. 시인이 된지 얼마 뒤 내 문학에 대한 회의 때문에 두 권의 시집과 소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모든 책을 불살라버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인생의 후반기는 책과의 동거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책을 읽죠. 쓰고 읽고, 읽고 쓰는 삶입니다. 실로 수많은 세계의 명저와 문제작과 만납니다.

그러므로 몇몇 작가나 작품을 내 문학의 수원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만났던 괴테의 작품, 버트란드 러셀의 책이 기억 속에 많이 남아 있지만 당대의 주요 담론들이나 각별한 지적 탐구의 결과물은 거의 다 만나고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태풍으로 뒤집어진 격렬한 바다의 파도 소리에도 매혹됩니다. 그 순간 범신론의 황홀경을 맛보는 거죠.”

우리 인문학의 척박한 상황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척박하기는커녕, 그 창달의 발랄함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다고 평가했다.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의 인문이 죽어간다고 하지만 문자로 이뤄진 인문의 창달 양상은 놀라울 정도로 현란해요. 서점에 가면 좋은 인문 양서들이 쌓이고 쌓였습니다. 과거엔 문학전집 정도가 인문학 서적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재야 인문학의 축적된 성과가 방대하지요.

국문학 박사가 밥을 굶는 것, 철학이 무용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 등 강단을 기준으로 얘기하면 인문학은 죽었죠. 그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선 강단 인문학이 반성을 해야합니다. 자기들이 그동안 그것을 잘 간수하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와서 권력이나 정부나 경제계나 시장에 대고 돈이나 타서 뭔가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은 올바른 타개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인문학이 외부세력의 노예가 되는 과정일 겁니다. 재야의 인문학에 기대를 걸지만 이것도 자치단체에서 뭐 인문학 강의를 한다, 이런 거는 하나의 유행에 불과하고, 인문학을 기계화하고 도식화하는 겁니다. 지금 이 단계를 지나 지금 자라나고 있는 대가들이 이룩할 엄청난 성취가 기대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이것을 ‘자생의 인문학’이라고 불러요.

주기설은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 자체에 주기성이 있어요. 역사의 종말론이나 후천개벽 사상 같은 것은 믿지 않습니다. 모든 현상은, 특히 문화 현상은 사계가 있어요. 말라 죽죠,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주기를 시작하죠.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이거 나는 발로 걷어차고 싶어요. 근대 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가라타니 고진, 이 친구의 주장 역시 헛소리입니다.”


전태일의 죽음과 불면증의 치유

1989년 논문 <역사의 종언>을 발표한 미국의 우파 정치학자인 후쿠야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함으로써 대항하는 이데올로기가 소멸하였다고 보았다. 이것에 의해 냉전 후의 인류의 스토리는 전혀 새로운 관점 없이는 쓸 수 없게 되었고, 지금까지의 역사는 종언되었다고 선언했다. 시인의 눈에 이 같은 결정론은 분명 단견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인문학계의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역사·건축·철학 등의 전방위 문예평론가로, 한국 젊은 인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근대문학은 과연 죽었는가? 고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단지 과거 문학이 누렸던 엄청난 임팩트와 권력적 지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은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금 문학은 쇠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문학의 도래, 문학 부흥의 새로운 계기는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란 생각이다.

“종말론적인 사상 일반을 저는 우습게 생각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늘 자기가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 만나는 공기는 새로 마시는 공기죠. 누가 마셨다가 내버린 마지막 공기가 아니잖아요. 내 코에 들어온 것은 초야성이 있어요. 신부와 신랑이죠. 종말의 시대가 아니라 시작의 시대다…. 사람들에게 역설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진실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6·25 때 목격한 죽음은 그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는 1960년대 내내, 그러니까 무려 10년이나 지독한 불면증을 앓았는데, 그 불면증에는 역시 죽음의 트라우마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내가 목격한 죽음으로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인간을 믿지 않는 심연이 있는 거요. 시체를 치우는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인육이 부패한 냄새는 다른 짐승이 부패한 냄새와는 또 다릅디다. 그때는 빨래비누밖에 없던 시절인데 비누로 아무리 문대도 그 냄새가 없어지질 않아요. 보름을 가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냄새를 맡고 인간이 얼마나 독을 많이 품고 있는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어요.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독성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내게 인간의 의미는 다 깨졌어요. 엊그제까지 아저씨, 형님 하던 사이들이었어요. 죽이고 죽고 했던 사람들이…. 무식한 이데올로기가 무식한 삶의 존재 속에 들어와서 우익도 좌익도 모두 홉즈가 말한 야만의 상태에 처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수차례 자살미수에, 불면의 10년….

1960년대의 그 독한 막소주를 아무리 마셔도 처음엔 마비되지만 금세 잠이 깹니다. 전태일의 죽음을 접하고 내가 거리에 나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불면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그 이전엔 난 광장에 나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이상한 축복이었습니다. 붙들려 엄청난 고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마당에서 저는 오랫동안 놀게 되었습니다.”

존재가 앞서고 본질이 뒤따라오게 하라

수원으로 이사온 후 그는 새로운 전작시를 쓰고 있다. 원고지 1500장짜리 장시다. 소재는 심청, 제목은 <처녀>로 이미 출판사 측과 계약을 마친 상태다. 출판을 해서 팔 목적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쓰는 것’이란 설명이다. 그러나 구상은 거대하고, 진척속도는 놀랄 만큼 빠르다. <만인보>가 그랬듯이 고은의 경이로움은 엄청난 다작 속에서도 작품의 질이나 긴장감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새로 쓰는 장시에 임하는 시인의 태도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이태리 베네치아에서 오래 머무는 동안 단테와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그에게 매혹되었습니다. 그가 쓴 <신곡>도 과거엔 여러 고전 중의 하나로만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요. 아무튼 단테에 대해서는 몇 시간이고 강의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곡>에 천국과 연옥, 지옥이 설정돼 있는데, <처녀> 역시 천계와 지상계와 바닷속으로 나눠 심청이 경험한 각각의 세계를 시로 형상화하는 작업입니다.

하늘, 땅, 수중... 그 세 개의 세계를 순환하는 존재로서의 심청을 그리는 시도죠. 단테의 ‘심청버전’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지옥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향한 공갈입니다. 천국도 수상한 웃음거리죠. 내 마음속에 천국과 지옥이 있는 거예요. 죽어서 가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심청은 용궁에서 용왕 만나 결혼해서 연꽃으로 살아나죠. 그 과정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용궁세계를 제대로 그려보려고 합니다. 심청은 아무리 용왕하고 살아도 처녀성은 훼손되지 않는 인물로 그립니다. 그래서 제목이 <처녀>이지요.”

광고지 같이 한 번 사용된 종이의 이면에 시를 쓴다. 무엇이든 아끼는 습관은 이미 언급했지만 아마도 효봉 스님에게 배운 것이리라. 세상은 한때 시인 고은을 일컬어 ‘허무주의의 맹장’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우주 삼라만상을 두루 섭렵하는 대시인으로 우뚝 섰다. 그가 한때 심취했던 실존주의의 대명제,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의 의미를 물었다.

“실존주의는 다른 사람들이 다 하고 지나간 다음에 깊이 들여다봤죠. 전 이렇게 뭐든 늦어요. 시인이 된 것도 늦었고 결혼도 나이 오십에 했으니 많이 늦었죠. 구조주의가 나왔을 때 난 실존주의를 더듬었어요. ‘존재가 본질에 우선한다’는 사르트르의 선언은 플라톤을 최초로 극복한 언어로서, 인간 사유의 혁명적인 전환을 선언한 하나의 ‘사태’였다고 봅니다.

그전에는 본질에 의해서 현상을 설명했잖아요. 아니다, 본질 같은 것은 필요없으니 존재가 앞서고 차라리 본질이 뒤따라오게 하라…. 막말로 해서 저는 ‘오든지 말든지’입니다. 사르트르는 물론 그렇게 심하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히려 본질이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입장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의 선언 같은 것은 충분히 전위성이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것을 또 극복하는 방향으로 사유를 전개했는가?”라고 다시 물었을 때 그는 아니라고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에요. 구조주의·해체주의 다 사라지고 있잖아요? 사상이란,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사유의 끊임없는 명멸은, 옷 갈아 입는 것과 같은 것으로 결코 사멸하는 것이 아니지요.”

최근 해마다 10월이면 온 국민이 ‘노벨문학상’ 후유증을 앓는다. 세상이 민망할 정도로 호들갑스러운 시간, 정작 그는 집에 들지 못한다. 해마다 한 번씩 홀로 잠적해야 하는 고은의 노년에는 불가의 수도자, 작가, 민주투사로 살아야 했던 삶 못지않은 파란만장함이 보태진다. 세상의 과도한 관심사는 고은에겐 싸울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고 항변할 수도 없는 외로움으로 다가온다.

인간 존재, 그 심연의 수수께끼와 정면으로 맞서고, 독재의 칼날도 막아섰던 그조차 상패 하나로 고은문학을 논하는 세상사람의 저급함에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탓이다. 그래서 고은은 잠시 우리 곁을 떠났다 홀연히 돌아오기를 거듭한다. 노벨상 이야기를 꺼내니 손을 내젓는다. 그 질문 하는 기자는 “때려서 내쫓았다”는 것이다. 역시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뒷풀이로 자택 인근 토속식당에서 막걸리 두 병을 시켜 나눠 마셨다. 아스파탐과 인공발효제가 들어가지 않은 여주 막걸리다. 막걸리를 마시며 그는 “친구 중에 제일 좋은 친구는 술친구”라는 지론을 말했다. 그게 바로 “존재가 본질에 앞서는 좋은 사례가 아니겠느냐”고 했더니, 시인은 웃으며 그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201312호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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