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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법정일기’ - ‘잘살아보겠다’는 희망이 덫이 돼버린 사회 

 

문유석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현실에서는 시지프스 운명처럼 파산자가 속출…가족·이웃과 함께 누리는 소소한 행복이 존중되는 사회 만들어야



예전에 파산부 근무 시절, 숱하게 많은 파산자의 절절한 사연을 만났다. 이들은 한결같이 발버둥치고 열심히 살아보려 해도 마치 그물에 걸린 듯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시원하게 제대로 돈 한번 써보지 못하고 빚으로 빚을 막고 카드로 카드를 막으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에 쫓기는 처지가 되곤 했다. 이들이 현대판 ‘시지프스의 운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잔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필자가 발견한 파산의 기원은 바로 ‘희망’이었다. 잘살아보고 싶은 희망,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희망, 번듯하게 살아보고 싶은 희망 말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대학교육을 받는 한국 사회에서는, 누구나 화이트칼라 중산층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자식들도 좋은 대학을 나와 화이트칼라의 삶을 잇기를 바란다.

사농공상의 유교적 관념 때문일까. 아무리 박봉이라도 ‘넥타이 매고 펜대 굴리는’ 직장에 대한 집착이 어느 나라 국민보다 강하다.

‘잘살겠다’는 욕망이 가족 전체를 파산으로 내몰기도

그런데 한국경제에는 사실 그렇게까지 많은 화이트칼라가 필요하지 않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는 살벌한 입시경쟁의 최종 승리자들만이 번듯한 직장의 문턱을 넘게 되고, 그나마 시간이 갈수록 좋은 집안과 배경의 후광을 입어야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는 사회가 되었다.

그 외 대다수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영업직, 보험모집, 노무직에 근접하는 단순사무직 등 무늬만 화이트칼라인 일터에서 일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저축하기도 힘든 빡빡한 삶이며, 그 ‘알량한’직업을 유지하려고 수도권의 비싼 주거비와 교통비, 물가를 감수해야 하니 지나친 고비용 구조의 삶이다.

화이트칼라는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최소한 육체노동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선택하는 것은 치킨집 등 서비스업을 자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영세서비스업은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높은 이윤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낮은 이윤을 바라고 발버둥치는, 실상은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 투입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 정도를 얻는 일의 반복이다. 그나마 여러 가지 변수를 만나 사업을 그르치기도 쉽다. 지속적 투자를 할 자본이 없으니 비슷한 이들끼리 제 살 깎아먹기 경쟁에서도 탈락하는 자가 속출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되지 않고 현상유지를 하기도 버거운 삶에 지쳐가다가 합리적 판단을 못한 채 불나방처럼 승산 없는 게임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돈을 빌려 주식투자를 하거나 기획부동산, 다단계의 유혹에 빠져드는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같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전장은 게임의 규칙을 지배하는 극소수의 승자가 독식하는 피비린내 나는 곳이다. 결코 ‘어리버리한’ 양민들이 감히 들어와서 푼돈이라도 건져 살아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여기서부터 불길이 우리나라 특유의 끈끈한 가족주의라는 도화선을 따라 가족, 친족 공동체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한 파산자 가정의 일화를 소개한다. 뼈대 있는 집안 장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 밑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자란 장녀의 이야기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작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며 알토란 같은 적금을 들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시청에 취직한 고등학교 동창이 남 몰래 알려준 비밀 정보라는 시 개발사업 예정부지 매입사업에 뛰어든다.

자기만 믿으라는 기획부동산업자가 요구하는 자금은 눈덩이처럼 불어가고, 쥐꼬리만한 퇴직금·전세보증금은 물론 장녀의 적금에다 일가친척에게 사정사정해서 연대보증 세워 빌린 사채까지 쏟아부어도 태부족이다.

게다가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는 말을 수백 번 듣고 또 들어도 공공사업계획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미친’ 희망 때문에 단돈 500만 더, 300만 더 넣으면 다 해결된다면서 그나마 직장을 다니던 장녀에게 신용카드 현금서비스까지 받아올 것을 요구한다. 카드 하나로 한계가 있으니 다시 돌려막기와 카드깡의 길로까지 발을 내딛게 된다.

그 결과는 뻔하다. 밑 빠진 독은 깨지고, 남은 건 빚쟁이의 독촉뿐이다. 엄마는 파출부 나가다가 감당이 안 되니 옆집 아줌마 속삭임에 무슨 모임 한번 다녀오더니 자석요를 잔뜩 사들고 친정 식구, 동네 아줌마들에게 전화를 돌리느라 날이 샌다. 장녀는 온갖 카드를 돌려막다가 급기야 노래방 도우미에 나가 선불금을 당겨쓰다가 결국 술집 아가씨로 나서지만 참 이상하게도 오히려 빚만 늘어나고 몸만 축난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옛말은 틀림이 없다. 스토리가 이쯤 되면 꼭 등장하는 것이 가족 중 한 명이 병으로 쓰러진다. 가망도 없는데 치료비·간병비로 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돈이 들어간다.

필자는 정선 카지노에 가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영화에서만 보던 화려하고 우아한 세계는 없었다. 슬롯머신에 눈이 퀭해진 채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지폐를 끝도 없이 쑤셔 넣고 레버를 당기고 있는 사람들은 초라한 행색의 노인·아줌마·아저씨들이었다. 화장실에서는 고리대금업자(꽁지)들이 100만원 단위의 돈 묶음을 이런 이들에게 빌려주고, 바깥 동네에는 전당포가 성업 중이다.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영화 같은 느낌의 영상이 떠올랐다. 부자의 저금통에 초라한 빈민들이 줄을 길게 서서 자발적으로 돈을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끝도 없이. 부자는 자기 저금통에 대신 저금해주는 바보들의 행렬을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흐뭇해 한다. 이들의 죄는, 감히 절대 승산이 없는 싸움에서 이겨 부자가, 승자가 될 수 있다고 희망한 죄다. 처음부터 패배하게끔 게임의 규칙이 짜인 판에서 50대 50의 승률 게임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획일화된 물질적 희망 대신 소박한 행복 꿈꿔야

희망이 무슨 죄냐, 희망과 꿈이 없이 어떻게 삶과 행복이 있겠느냐며 물을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희망이 획일화되어 있고, 물질적이며, 한탕주의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더욱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편리한 유혹도 곁에 있다. 신용카드, 소비자금융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뭐 하러 아둥바둥 근검절약하며 꿀꿀하게 사니? 카드 긁어서 사고싶은 명품 짝퉁이라도 사고, 술집도 가고, 여행도 가라. 너 고생할 만큼 했잖아. 인생을 즐겨, 즐기라구.” 이게 다 이미 30년 전에 세계적인 소비자금융자본들이 인간의 나약한 심리와 보편적인 욕망을 심리학적으로 치밀하게 연구해서 만들어낸 마케팅 기법의 되풀이임을 알고 있는가?

파산법 전문가인 하버드 로스쿨의 엘리자베스 워렌 교수의 <맞벌이의 함정>이라는 책에 이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워렌 교수가 씨티그룹 중역들 앞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신용카드 남발과 소비자신용 과다가 평범한 미국 중산층을 파산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높은 중역이 말을 가로막고 한마디한다. “교수님,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 그룹의 이윤 대부분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먼 훗날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자가 되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며 행복하겠다는 희망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선 바로 이 자리에서 소박하나마 가족·이웃과 함께 누리는 소소한 행복이 누구에게도 폄하되지 않고 존중되는 그런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201312호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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