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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제 포커스 - 일본화(日本化)의 공포 “장기 저성장 시대가 열렸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성장잠재능력 저하로 인한 장기 저성장, 한·미 경제 닮은꼴 노동가능인구 증가율 저하, 1990년대 초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흡사…

▎미국 경제의 상징이라 할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트레이더들이 2013년 12월 12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광판을 응시하고 있다. 양적완화 우려 속에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전날보다 104.10포인트 떨어진 1만5739.43에서 거래를 마쳤다.



2013년 10월 29일. 미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는 잠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경제활동과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증가하려면 궁극적으로 생산성이 뛰어올라야 하는데, 낮은 생산성이 이제 새로운 일상(norm)이 돼버린 것 같다.”

경제 회복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던 전망은 이번에도 보기좋게 빗나가는 분위기였고, 성장의 발목을 잡는 요소들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은 여전히 경제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웃한 국회의사당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연방정부의 운영을 중단시키고 국가부도마저 불사하겠다는 극단의 사태로 치달았다.

그리고 며칠 뒤, 미국 수도 워싱턴의 연방준비제도에 이웃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포럼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더욱 침울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미국 경제가 영구적인 불경기(secular stagnation)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가장 유력한 차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 후보로 꼽히던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의 말이었다.


“지독하게 더딘 회복세”

미국 의회예산국(CBO)이 2012년 11월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위기 이후 3년 동안 진행된 경제회복 속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기 회복기에서 나타났던 평균치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과거에는 경기침체를 겪고 난 뒤 3년 동안 미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평균 15%가량 증가했었는데, 이번 회복기에는 6% 정도밖에 늘지 않았다.(<표 1> 참조)

금융위기의 후유증이 그만큼 컸던 걸까. 그럴 만도 한 것이, 거의 모든 경제주체의 씀씀이가 과거 회복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소비자들은 줄어든 일자리와 추락한 주택가격, 턱밑까지 차오른 부채부담 때문에 지갑을 쉬 열지 않았다. 오히려 빚을 갚는 데 열중했을 뿐이다. 과거 회복기 때 늘 나타났던 주택건설 붐도 이번에는 기대할 수 없었다.

이번 금융위기가 부동산 거품의 붕괴 탓이었음을 감안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과거에는 정부의 대대적인 지출이 큰 힘이 됐지만, 역시 이번에는 달랐다. 금융위기를 막느라 엄청난 빚을 진 미국 정부의 재정정책은 이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역할로 처지가 바뀌었다. 세금은 늘어났고 지출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례적인 저성장의 배경을 분석한 미 CBO의 진단은 방점이 달랐다. 금융위기로 인해 이렇게 주저앉은 총수요는 부진한 경기 회복세를 3분의 1밖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된 원인은 ‘미국경제의 잠재능력 저하’에 있었다. 이것이 전례가 없이 더딘 경제회복세의 배경 중 3분의 2를 차지한다고 CBO는 분석했다.

경제성장은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미국의 현재 경제는 잠재능력에도 못 미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실업률은 여전히 높고 공장 가동률은 과거 평균치에 비해 매우 낮은 상태다. 하지만 노동력과 설비가 마침내 풀가동된다고 해도 미국 경제가 낼 수 있는 성장 속도는 과거에 비해 낮다는 게 CBO의 판단이다. 미국의 성장 잠재능력이 크게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성장 잠재력의 저하가 금융위기의 후유증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 역시 미국과 똑같은 경로를 밟고 있다. ‘저성장’은 이미 금융위기 이전부터 빠른 속도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잠재 성장능력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인구와 자본, 그리고 기술이다. 인구의 증가는 노동력을 늘려 경제의 생산능력을 확대시킨다. 생산설비를 의미하는 자본은 노동력과 결합해 역시 경제성장 능력을 규정한다. 그리고 기술 발전에 힘입은 생산성의 향상은 적은 노동력과 자본을 투입하고도 더 많은 산출을 이끌어낸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요소는 인구, 특히 청·장년층의 생산 노동력이다. 노동력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면 적은 비용을 들이고도 생산을 크게 늘릴 수 있기 때문에 경쟁력이 높아진다. 수요 측면에서도 인구의 증가는 매우 긴요하다. 인구가 급증하는 시기에는 식품과 의류뿐 아니라 주택, 사무실과 공장, 여가시설, 사회간접자본 등 모든 부문에 대한 수요가 팽창하기 때문이다.(<표 2> 참조)

2차 대전 이후 나타난 베이비붐 덕분에 미국의 노동가능인구(15~64세)는 한동안 급격한 증가세를 탔다. 1% 안팎 수준이던 증가율은 해마다 높아져 1970년대 초에는 3%에 육박했다. 이후 인구 증가속도는 다시 둔화되기 시작했지만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진 덕분에 경제활동인구의 급증세는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게 정점이었다. 이후로 미국의 노동력 증가속도는 눈에 띄게 꺾였다. 2000년 무렵 속도가 다시 빨라지는가 싶었지만 잠시 반짝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 들어 미국의 경제활동 인구 증가율은 기록적인 속도로 떨어져갔다. 그리고 금융위기가 터졌다. 일자리 얻기가 어려워지면서 노동시장에서 퇴장하는 사람들은 더 빨리 증가했다. 2013년 10월의 경우, 미국의 경제활동인구 수는 1년 전에 비해 0.5% 적었다.

경기 회복기에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은 전례 없는 일이다. 경기가 더 빠른 속도로 살아난다면 이들은 노동시장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미국 노동가능인구의 증가속도가 이미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경제의 잠재성장 능력을 급격히 둔화시킨 핵심 원인이다. 이 현상은 이미 10년 전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일본화(日本化)로 가는 첫걸음이다. 지금 미국의 노동가능인구 증가율은 1980년대 말~1990년 대 초 일본의 모습과 흡사하다. 일본의 초창기 침체를 의미하는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시기와 일치한다. 일본 역시 그 직전 대규모의 거품붕괴를 겪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2013년 현재 한국의 노동가능인구 증가율은 0.4%로 떨어져 있다. 미국과 대략 비슷한 수준이다. 2014년에는 0.3%대, 2016년에는 0.2%대로 증가속도가 둔화된 뒤 오는 2017년부터는 노동가능인구가 본격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하리라는 게 통계청의 전망이다. 일본의 노동가능인구는 1996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인구추세는 약 20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을 뒤쫓고 있는 셈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노년층의 육체적 능력이 향상되고 있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미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노년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이 꾸준히 높아지면서 노동력 공급 둔화추세를 완충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양적인 측면에서만 긍정적일 뿐이다. 노년층과는 정반대로 청년층의 경제활동참가율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수용할 만한 새 일자리가 부족해지자 청년들이 구직활동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 활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노년층의 비중은 날로 높아지고 있고 청년층의 비중은 급감하고 있다. 이는 노동력의 질적 저하를 불가피하게 야기한다. 노년층은 높은 노동 숙련도를 보유하고 있지만 혁신능력은 대폭 떨어지기 때문이다.


1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013년 초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2 한때 FRB 의장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로렌스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



늙어가는 인구, 사라지는 혁신능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회원국 55~65세 연령층의 언어능력은 16~24세 청년층에 비해 9%가량 낮았다. 수리능력에서도 역시 노·장년층은 청년층보다 7%가량 뒤처졌다. 따라서 노년층의 비중이 높은 경제일수록 새로운 노동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노년층의 기술 습득능력은 국가별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똑같이 노령화해가는 경제라 하더라도 경쟁력에 미치는 충격은 판이할 것임을 의미한다.

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 55~65세 연령층의 언어능력은 일본보다 11%, 미국보다는 7%, OECD 평균에는 4%나 뒤처진다. 수리능력에서도 우리나라의 노·장년층은 일본보다 15%, 미국과 OECD 평균보다는 각각 6%와 8% 미달이다.

그나마 16~24세 연령의 청년층에서는 우리나라의 언어 및 수리능력이 미국이나 OECD 평균에 비해 월등히 높아 일본과 비슷한 ‘최고’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청년들이 일자리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데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령층은 전체 인구의 12.3%를 차지한다. 14% 수준인 미국과 비슷하다. 통계청 추계에 따르면, 10년쯤 뒤에는 노령 인구의 비중이 5분의 1로 높아질 것이며, 20년쯤 뒤에는 지금의 일본과 비슷하게 4분의 1이 될 전망이다.(<표 3> 참조)

2009년 3분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기회복기 동안 기업들의 설비투자는 큰 몫을 해냈다. 4년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10% 증가하는 동안 설비투자는 무려 21%나 급증했다. 외형상으로는 기업 투자가 주도한 경기회복세였다. 그러나 이는 착시에 불과하다.(<표 4> 참조)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1분기부터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난이 절정이던 2009년 4분기까지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미국의 설비투자는 무려 20%나 급감했다. 이후 기업들의 투자가 반등했지만, 2013년 3분기 미국 설비투자의 실질규모는 여전히 6년 전인 2007년 말 수준에도 못 미친다.

지난 6년간의 극심한 투자부진은 미국 노동인구 증가세의 급격한 둔화와 마찬가지의 충격을 미국경제에 가했다. 미국의 현재 생산설비는 6년 전인 2007년 말의 투자규모를 그대로 유지하기만 했을 때 비해 4조 달러나 덜 축적됐기 때문이다. CBO는 “금융위기 이후 경제활동인구 증가속도의 둔화와 기업들의 설비투자 부진이 각각 미국 경제 잠재성장 능력 저하 원인의 3분의 1 이상씩을 각각 차지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미국 기업들의 투자부진은 금융위기 이후에만 나타난 특이 현상이 아니다. 1980년대 초부터 기조적으로 진행돼왔다. 지난 1981년 4분기 국내총생산의 14%에 달했던 미국 기업들의 투자 비중은 이후 꾸준히 하락해 현재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투자가 부진해지면서 일자리 창출 속도도 크게 둔화됐다. 기업의 투자가 자동화·효율화에 집중되면서 고용 없는 성장은 더욱 심화됐다.

기업들은 왜 투자를 하지 않을까? 세계화에 따른 해외로 생산설비 이전이 큰 영향을 미친 가운데, 분배구조 악화 역시 작지 않은 부메랑 효과를 낳았다. 생산활동의 결과로 생긴 소득이 노동자에게는 더 적게, 기업에는 더 많이 분배되는 추세가 지난 30년 동안 지속되면서 미국 가계의 소비능력이 저하됐다. 그리고 이는 기업이 투자확대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을 떨어뜨렸다.(<표 5> 참조)

불임 경제… 기업은 왜 투자하지 않나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 1980년에만 해도 임금 등 노동자 보상으로 배분된 미국의 국내총소득(GDI)이 58%에 달했으나 2012년에는 53%밖에 되지 않았다. 지난 1950년 이후 60여 년간 노동자에게 분배된 소득이 이렇게 낮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면 기업이익으로 배분된 몫은 1980년 20% 수준이었으나 2012년에는 25%로 높아졌다. 미국의 기업들에 이렇게 많은 이익이 돌아간 것은 지난 1960년대 중반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이다. 이에 따라 지난 20년간 미국 기업들의 순자산이 3.8배 불어난 반면, 미국 가계의 순자산은 3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미국의 분배구조 악화에는 여러 가지 구조적 배경이 거론되고 있다. 노동인구 증가속도의 둔화, 인터넷 혁명에 따른 생산성 향상으로 나타난 고용률의 급격한 하락, 금융위기 이후의 고실업, 노동조합 가입률 하락에 따른 임금교섭 능력 악화, 고도화된 주식시장이 기업 경영자에게 가하는 이윤압박의 심화 등이다.

투자를 하지 않는 문제는 우리나라도 심각하다. 2013년 2분기 현재 우리나라의 총 고정자본 형성은 전체 국민 처분가능소득의 26.3%에 불과했다. 국민소득 가운데 세금 등을 내고 남은 돈의 4분의 1 정도만을 공장이나 사무실, 생산설비, 도로, 항만, 주택 등에 투자한 것이다. 지난 1977년 이후로 한국의 고정자본 투자율이 이렇게 낮았던 적은 없었다.

이 같은 투자부진 현상은 금융위기 이후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정자본 투자율은 지난 2008년 초까지만해도 30%에 육박하는 수준을 유지했으나, 그 뒤로는 급격한 하락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소비를 많이 하는 바람에 투자할 돈이 부족해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민 처분가능소득에서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국민 소비성향)은 2000년 이후 줄곧 70%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오히려 국민 총저축률이 30%를 웃도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저축에도 불구하고 투자비중을 빠르게 줄이다 보니 경상수지 흑자가 최근 들어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흑자경제는 소비와 투자가 실종된 어두운 현실의 반영에 불과하다.




“영구적인 불경기(secular stagnation)”

미국 연방정부 운영 중단 사태와 국가부도 위협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2013년 11월 8일. 미국 국회의사당 인근의 IMF본부에서는 미국의 내로라하는 경제정책 전문가와 학자들이 모여 경제 현황을 논의하는 포럼이 열렸다.

벤 버냉키 FRB 의장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최근까지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스탠리 피셔 박사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피셔 박사는 과거 MIT대학에서 버냉키 의장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가르쳤으며,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공격적 화폐 발행 정책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행한 로렌스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의 강연은 큰 파장을 일으키며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미국의 경제가 일본처럼 ‘영구적인 불경기(secular stagnation)’에 빠져있을 수 있다.” 서머스 전 장관 역시 MIT 학부생 시절 피셔 박사로부터 경제학을 배웠다.

서머스 전 장관은 금융위기를 극복한 뒤 지난 4년 동안 경제회복이 이뤄졌지만 미국경제의 잠재 성장능력은 과거의 추세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경제회복의 속도 역시 지나치게 더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경제에서는 이미 금융위기 이전인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이상한 문제’가 발견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주택경기가 맹렬하게 팽창하던 와중에도 설비가동률이 대폭 높아지거나, 실업률이 대폭 하락하거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의 불균형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금융위기를 야기할 정도의 심각한 거품경제 속에서도 “미국의 총수요는 불충분했다”는 게 서머스의 주장이었다.

서머스는 이런 문제를 이자율을 통해 설명했다. 미국의 ‘실질 균형금리’가 이미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마이너스 2~3%로 떨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실질 균형금리란 불황이나 경기과열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적정 이자율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개념이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은 그래서 ‘양적완화(QE)’ 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끌어 올리는 정책을 취해왔다. 물가상승률을 2~3%로 높이면 명목 기준금리를 0%에서 더 내리지 않더라도 실질금리는 마이너스 2~3%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준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2013년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현상을 보여왔다. 실질금리가 오히려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에서 목격된, 제로금리와 디플레이션이 야기한 유동성 함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빚을 내서 소비하거나 투자할 사람은 늘어나지 않는다. 경제주체들이 체감하는 실질 이자율이 ‘균형’ 수준에 비해 더 높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연준은 양적완화 정책마저 줄여 없애나가기로 방향을 잡았다. 양적완화로 인해 온갖 자산시장에서 거품이 발생하고, 시장에 풀린 통화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서머스 전 장관은 “명목 제로금리가 만성적이고 체계적으로 경제성장을 방해해 우리 경제를 잠재 수준 아래로 끌어잡는 이 상황을 앞으로 우리가 수년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금융위기 이후를 지배하고 있는 정책 어젠다에 대해 “걱정거리”라고 비판했다. 과거에 비해 적은 통화부양책, 과거에 비해 적은 재정부양책, 과거에 비해 적은 부채, 과거에 비해 적은 자산시장 거품 등 오늘날의 정책 어젠다들이 미국 경제를 영구적인 불경기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균형금리는 인구증가율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증가율이 낮아지면 균형금리 수준도 하락하게 된다. 집과 일터와 사회간접자본을 짓는 데 필요한 자본이 과거에 비해 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구 고령화는 균형금리를 더욱 떨어뜨린다. 고령인구들은 청년들에 비해 부채를 덜 필요로 하고 오히려 축적된 잉여자본의 공급을 늘리기 때문이다.

‘불경기’의 원인을 과잉공급보다는 수요부진 탓으로 보는 학자들은 서머스 전 장관처럼 근인(根因)을 실질금리에서 찾는 경향을 보인다. 현재 시장에 형성된 실질금리가 균형수준보다 높은 경우에 경제주체들은 현재의 소비보다는 미래를 위한 저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빚을 내서 신규 수요를 창출하기보다는 빚을 갚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요부족 상태가 지속되면 경제는 영구적인 불경기에 빠진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그래서 폴 크루그먼 교수 같은 학자는 재정정책이 주도하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주장한다. 적자재정을 통해 정부지출을 대폭 늘리면 부족한 총수요를 보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이 높아지면서 실질금리도 균형수준 아래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민간 경제주체들의 생각도 바뀌어 저축보다는 소비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100달러짜리 배터리를 교체(재정 부양책)하는 것만으로 3만 달러짜리 자동차(미국 경제)를 다시 굴러가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재정정책을 적극적인 부양으로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다. 미국의 정부부채가 이미 우려할 수준으로 불어나 있으며, 오는 2017년 무렵부터는 베이비붐 세대 고령화에 따른 복지부담이 본격적으로 증가해 정부 빚 문제가 더 심화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 속에서 미국 의회에서는 재정 건전화 방안을 둘러싼 여야간의 극한 대립이 수년째 이어지는 중이다. 공화당은 복지를 줄이자고 주장하고 민주당은 세금을 늘리자고 요구하지만 적자지출을 대폭 늘리자는 목소리를 낼 분위기는 전혀 아니다.

차기 연준 의장 “인플레이션 끌어올리겠다”

결국 경기부양의 임무는 계속해서 중앙은행으로 집중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새해 2월부터 연준을 지휘하게 될 재닛 옐런 의장 지명자는 “보다 적극적인 중앙은행의 역할”을 예고했다. 그는 미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미국의 경제가 잠재능력에도 못 미치는 더딘 회복세를 보이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러한 잠재능력조차도 금융위기로 인해 상당부분 상실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보다 강력한 회복을 위한 통화정책 수단을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옐런 지명자의 통화정책 방향은 ‘더 낮게 더 오래(lower for longer) 금리정책’으로 요약된다. 현재 제로(0) 수준인 미국의 기준금리를 시장이 기대하고 있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제공하며, 그 뒤에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다 하더라도 금리의 절대수준은 시장이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낮게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2012년 11월, 옐런 지명자는 심각한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가를 일시적으로 희생하는 “균형 잡힌 접근법”을 강조한 바 있다. 이는 1980년대 초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고용을 일시적으로 희생시킨 것과 같은 맥락 또는 정반대의 논리다.

이런 가운데 새해 11월에 예정된 미국의 중간선거 결과는 미국 경제의 전개방향에 이정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민주당이 표를 많이 얻어 하원의 여소야대 구도가 해소된다면 적자지출을 활용한 적극적인 재정부양책이 도입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는 옐런 의장 체제하에서 연준이 제공할 ‘더 낮고 더 오랜 기간’의 초저금리 정책과 맞물려 미국경제의 성장속도와 인플레이션을 동시에 끌어올릴 것이다.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은 외견상 부양정책의 후퇴로 비치고 있지만, 미국 주류의 움직임은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일본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는 데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새로운 거품을 일으켜서라도 인플레이션을 높일 수만 있다면 미국 정부의 부채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플레이션이 생기면 재정수입이 크게 증가하고 부채의 실질부담은 크게 낮아질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갑오년 새해는 그런 의미에서 인플레이션 경제로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작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미국의 저금리-인플레이션 정책은 우리나라의 상대적 고금리-저물가를 야기하게 되며 이는 달러에 대한 원화의 가치를 더욱 빠른 속도로 절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엔저-인플레이션 정책과 맞물려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우리경제에 작지 않은 충격을 줄 위험이 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좋든 싫든 우리 역시 저금리 인플레이션 정책을 공조해야 할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201401호 (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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