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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퇴장하는 도시 고가도로 애사(哀史) 

도시 흉물로 전락한 개발 시기의 상징물 

홍성태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육교·지하도·고가도로 등 도시 건축물은 사람 아닌 자동차를 위한 시설…‘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신개발주의가 아닌 탈개발주의 꾀해야

▎아현고가도로는 서울 중구 중림동에서 마포구 아현동을 잇는 서울의 첫 고가도로다. 2월 9일 철거가 시작된 뒤 중장비를 동원해 철거작업을 벌이고 있다.




▎개발주의를 대표하는 도시 건축물 중의 하나인 육교는 사람이 아닌 자동차를 위한 시설물로 꼽힌다.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육교, 지하도, 고가도로는 오랫동안 필수적인 교통시설로 여겨졌다. 한때는 이들 시설물이 사회 발전의 지표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사실이 세 가지 시설은 모두 자동차를 위한 것이다. 육교와 지하도는 사람이 자동차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며, 고가도로는 자동차가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도심을 질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운전자의 시각이 아니라 보행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육교와 지하도는 길을 건너기 어렵게 하고,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인 고가도로는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요소다. 따라서 이런 시설물이 많은 도시는 사람이 아닌 자동차를 우선시하는 도시로 결코 ‘좋은 도시’라고 볼 수 없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부 때부터 이들 시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특히 1966년 4월 1일 육군 준장 출신인 김현옥 씨가 서울시장에 취임하면서 이러한 시설이 급증했는데, 산업화 사회가 낳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이 편리하고 안전하고 쾌적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좋은 도시’에 대한 인식은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나타났다. 고성장과 민주화를 배경으로 시민의 보행권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즈음부터 녹색교통운동,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 문화연대 등 관련 시민단체도 등장했다.

시민의식의 변화로 인해 2000년대 초부터 서울 도심을 중심으로 도시의 효율성을 앞세웠던 주요 시설물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과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도시의 구성·운영과 관련해 과거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압축적 근대화’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3년 9월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완료된 뒤 청계8가 복개도로의 상판 제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고가도로에 대한 두 가지 시각

청계고가도로는 서울을 대표하는 홍보물이었다. 그것은 자동차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고가도로를 우상화하는 것과 같았다. 서울 도심의 고가도로 철거를 중심으로 도시 기능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인간보다는 자동차를 우선시하던 도시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뜻한다. 서울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좋은 도시’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서울은 유럽의 어느 도시처럼 자전거에 유모차를 매달고 안전하게 외출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을까?

2월 9일 마침내 서울 아현고가도로의 철거작업이 시작됐다. 1968년 2월 3일에 착공돼서 같은 해 9월 19일 준공됐으니 대략 46년 만에 아현고가도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서울시는 이 시설의 폐지 하루 전인 2월 8일, 아현고가도로를 시민에게 개방했다. 많은 시민이 아현고가도로를 보며 과거의 추억 속에 잠겼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아현고가도로에 대한 두 가지의 사뭇 다른 평가를 옮기고자 한다. “아현고가도로는 중구 중림동 754번지~마포구 아현동 267번지 사이 548.7m에 이르는 서울에 처음으로 시설된 고가도로로, 1968년 9월 19일 준공됐다. 폭 15m, 연장은 주로(主路)가 771m, 옹벽이 169m, 계 940m이다. 공사비는 2억8100만원이 투입됐다. 아현고가도로의 건설로 충정로와 마포가 이어지고, 서소문로와 신촌로가 이어지는 아현동고개 교차점을 고가화함으로써 교차지점에서의 신호대기가 불필요해져서 도심부의 교통지체를 크게 완화하는 효과를 거두게 됐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아현고가도로’)

“아현고가도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754번지에서 마포구 아현동 267번지를 잇는 940m의 고가차도였다. 1968년 9월 19일 서울특별시에서 최초로 건설한 고가차도이며 당시 청계고가, 서울역고가와 서울시의 근대화 상징물이었으나 이후 안전등급에서 C등급(조속한 보수가 필요함)을 배정받아 막대한 보수비용과 시대적으로 노후한 설계로 인해 사고지역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또 지역 경관 및 소통을 막는 주범으로 많은 민원이 서울시에 접수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위키백과>, ‘아현고가도로’).

아현고가도로를 두고 서울특별시사편찬위는 교통체증을 해소하는 기능을 했다고 설명한 반면, <위키백과>는 지역 경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교통 지체와 사고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설명했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적절한 설명일까? 시점에 따라 평가에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위키백과>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아현고가도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한 교통체증 문제를 초래한 나머지 1980년에 한 차례 구조 변경을 해야 했다.

1979년 9월 19일 <경향신문>은 이 시설물에 대한 서울시의 방침을 이렇게 보도했다. “아현동 고가도로는 신촌 방면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차량을 모두 서소문 쪽으로 쏟아놓아 서소문~시청 간에 심한 교통체증을 빚고 있기 때문에 서소문로에 놓인 동쪽 통로를 모두 철거하고 이를 충정로 쪽으로 옮기도록 한다.” 아현고가도로는 서울시의 교통체계 개선을 위해서도 없애야 할 시설물로 전락한 것이다.

서울시에 처음으로 준공된 것은 아현고가도로였지만, 가장 먼저 착공된 것은 ‘삼일고가도로’(나중에 ‘청계고가도로’로 이름이 바뀜)였다. 이들 고가도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울역 고가도로와 함께 근대화를 대표하는 시설물로 꼽히던 시절이 있다. 물론 이들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은 청계고가도로였다. 규모 면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청계고가도로는 전체 길이가 5㎞를 넘었고, 서울의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시설물이었다. 청계고가도로에 대한 평가도 아현고가도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청계고가도로는 성동구 마장동~남산 1호 터널 간을 잇는 도로시설물로서, 주로 청계천 위에 시설됐는데 1976년 8월 준공됐다. …청계고가도로의 건설로 서울의 도심에서 동부서울로의 자동차의 진입과 분산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청계천 1가에서 마장동에 이르는 10개의 교차점을 신호대기없이 일거에 통과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서울지명사전>, ‘청계고가도로’)


“중구 광교에서 동대문구 용두동에 이르는 길이 5~6㎞,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는 1967년 8월 15일에 착공하고, 1971년 8월 15일 완공했다. 이 고가도로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 고가도로였다. 청계고가도로 아래의 도로는 청계천로라고 불려, 교통을 분산되게 하는 데도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는 양복이나 전기부품의 도매상가가 많아, 상하차 작업을 하는 주차 차량이 청계천로에 넘치고, 심각한 교통 정체를 일으키는 것이 된다.”(<위키백과>, ‘청계고가도로’)

<위키백과>는 <서울지명사전>에 비해 청계고가도로의 교통정체 해소 효과에 대해 제한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이 고가도로가 철거되기 전, 청계천로의 교통정체는 특히나 악명 높았다. 청계천로와 청계고가도로의 교통 정체가 커지면서 서울시는 결국 철거를 결정한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설명을 살펴보면, 청계고가의 완공 시기에 대한 설명에도 차이가 난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청계고가는 1971년 8월 15일 완공됐고, 1976년 8월 태평로까지 연장된 것이 맞다.(아래 <매일경제>에 보도된 그림 참조)


▎1970년 4월 8일 새벽에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난 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우연한 사고가 아닌 비리와 부실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개발주의의 그림자

서울시를 대표하는 두 고가도로의 철거는 시민의 편의보다는 도시의 효율성을 앞세우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와도 같다. 하지만 1960~70년대 서울시의 개발정책 담당자로 일했던 도시학자 손정목은 아현고가도로와 청계고가도로가 애당초 건설할 필요가 없는 교통시설이었다는 주장을 내놔 눈길을 끈다. 그는 청계고가도로 건설과 관련해 당시 서울에는 차량이 별로 없어 굳이 고가도로를 만들지 않아도 교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지적했다(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5>, 한울, 2003, 194쪽).

그런데도 박정희 정부는 왜 고가도로 건설을 강행했을까?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인 정당성에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급속한 개발을 이뤄냄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필요성이 있지 않았을까. 이런 과시적인 행정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대부분의 정치 권력은 도시를 건설하거나 개조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고 물리적인 시설이 집중된 도시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도시의 숙명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러한 숙명이 낳은 결과는 사뭇 달랐다. 정치 권력이 ‘좋은 도시’를 위한 올바른 개발을 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울의 경우는 그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청계고가도로의 사례를 보자. 1960년대, 고가도로가 들어 서기 직전의 청계천은 몹시 더러웠고, 주변에는 판잣집들이 몰려 있었다. 도심 한복판이 더러운 하수와 남루한 빈민의 공간이 차지했으니 박정희 정부로서는 극적인 변화를 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청계천 판잣집에서 살던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청계천을 복개해 그 위에 당시 발전의 상징물로 제시됐던 고가도로 건설을 꾀한 계획한 것이다.

이러한 도시개발 모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도쿄 도심에 행했던 것을 고스란히 모방한 것이기도 했다. 도쿄와 서울의 도심에 고가도로를 건설한 것은 이 도시들의 소중한 역사를 훼손·파괴한 과오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서울시는 도시 빈민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반인권적인 방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더욱 잘못이 컸다.

서울 개발을 진행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그때까지 부산시장으로 큰 ‘성과’를 낸 김현옥을 서울시장에 임명했다. 김 시장은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각종 도시개발를 신속하게 추진하는 ‘군사적인 개발주의(military developmentalism)’ 방식으로 급속한(부실한) 서울 개발을 추진했다.

그 첫 번째의 사업이 1966년 4월 19일 착공돼 같은 해 9월 30일 자못 화려하게 개통된 ‘광화문지하도’ 공사였다. 하지만 이 지하도는 불행하게도 개통식이 열리고 1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천장에 균열이 생겨 물이 쏟아졌으며 바닥도 주저앉는 망신을 당했다. ‘불도저 시장’으로 이름 붙여진 김현옥이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도 터졌다. 1970년 4월 8일 새벽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33명이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김 시장은 1966년 지하도와 육교 건설을 강행한 데 이어 취임 2년째인 1967년 서울 개발을 더욱 강화해나갔다. “1967년, 김현옥 시장은 이 해를 ‘돌진의 해’로 정하고 그야말로 돌격적인 건설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도로, 교량 건설에 주력하였는데, 삼각지 입체교차로, 3·1고가도로, 강변 1로 등이 속속 건설됐다.”(<서울, 20세기-100년의 사진기록> 235쪽)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는 ‘일제 식민지 근대화’와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에 의해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전통과 생활을 뒷전에 둔 채 서구의 근대에 이뤄진 변화를 강력히 이식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서구의 도시처럼 강력하고 체계적인 관리에 의해 이뤄진 개발이 아니라 그저 서구와 비슷한 외양을 빠르게 추구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한국의 도시들은 예외 없이 고층 건물들이 난립하고 도로들이 종횡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한다. 도시들은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의 전시장이 되었고, 어느 도시나 자동차가 사람에 우선하는 반인간적인 회색 도시의 얼굴을 갖게 된 것이다.

유럽의 도시를 보면, 보들레르가 말한 만보객이 잘 보여주 듯 사람들이 거리를 천천히 편하게 걸어 다니면서 거리·건물·상품·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개발됐다. 그 결과 도시 전체가 잘 조성되고 관리되는 하나의 멋진 ‘볼거리’가 됐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은 사람들이 천천히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신화적 설명에 따르면 기원전 800년 무렵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세웠다고 한다. 로마라는 이름은 바로 로물루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는 한 도시에서 마침내 거대 제국으로까지 변모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무려 600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1 프랑스 파리는 ‘같은 높이와 같은 간선도로, 같은 외관’의 도시계획에 따라 세계적인 명품도시가 됐다. 2 조선시대의 한양은 도시 골격을 제대로 갖추기까지 30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서울 북악산 아래에 자리한 청와대, 경복궁, 광화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시간은 로마라는 도시가 ‘영원한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2년에 나라를 세우고 2년 뒤인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한양이 도시의 면모를 갖춘 것은 그로부터 28년 뒤의 일이었다. 한양의 2대 토목시설인 한양도성과 청계천은 각각 숙종(1661~1720)과 영조(1694~1776)에 의해 개축·완성됐다. 한양이 도시로서 그 면목을 완비하는 데도 대략 300년의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사람 위한 도시의 첫걸음

오늘날의 ‘신도시’는 예전보다 더욱 빠르게 건설된다. 트럭·굴삭기·기중기들이 1~2년 바쁘게 움직이면 어느새 뚝딱하고 도시가 만들어진다. 이런 신‘ 도시’에 비춰보면, 로마와 한양의 건설과정이 오히려 더 이상하고 한심하게 비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건설로 도시의 형성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는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각종 건물이나 시설은 도시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많은 사람이 편리하고 안전하고 쾌적하게 모여 살 수 있는 것이 도시의 목적이다. ‘사람을 위한 도시’가 도시의 본래적인 목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아가면서 도시의 형태와 특색이 형성되고, 또한 변화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도시’를 추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과연 어떤 도시가 ‘좋은 도시’일까? 이제 도시는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생태위기’의 강력한 진원지라는 점에서도 ‘좋은 도시’를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오래전부터 다양한 견해가 제시돼왔다.

서구에서의 논의는 1898년 영국의 에버니저 하워드가 제안한 ‘전원도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의 대도시와 관련된 논의는 1933년에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가 제안한 ‘빛나는 도시’와 1961년 미국의 제인 제이콥스가 발표한 ‘생활 도시’(필자의 명명)로 대별될 수 있다. 전자는 초고층 건물들과 고가도로들의 도시이고, 후자는 주민과 보행을 중시하는 도시다. 이는 오늘날 ‘좋은 도시’의 필수조건이 됐다. ‘감응의 건축가’ 정기용은 이런 ‘생활 도시’를 ‘기본이 바로선 도시’라고 표현했다.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을 위한 도시라는 목표를 명확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육교·지하도·고가도로 등의 교통시설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원활한 교통에 별 도움이 안 되기도 하지만 사람을 위해서는 당연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한 세대 전, 우리의 도시는 거꾸로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쪽으로 건설돼왔다. 사람을 위하지 않는 도시는 후진적인 도시일 뿐이다. 1927년에 프리츠 랑 감독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도시의 고층 건물들과 고가도로가 발전의 상징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반인권과 불평등의 문제가 강력히 도사리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자동차를 위한 도시 시설을 없애거나 점차 줄여나가는 것은 사람을 위한 도시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신개발주의는 구개발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또 다른 얼굴을 한 개발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사람을 위한 도시가 제대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탈(脫)개발주의를 적극 추구해야 한다.

탈개발주의는 반개발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투명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연과 사람을 존중하는 필수적인 개발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구개발주의의 문제에 대한 인식은 계속 커지고 있으나 아직 탈개발주의의 추구는 미약하다. 사람을 위한 도시에서는 삭막한 고가도로나 화려한 건물보다는 잘 자란 한 그루의 나무와 사람들이 따뜻하게 어울리는 동네가 필요하다.

201404호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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