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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 붓으로 꾹꾹 눌러쓴 성서, 書畵로 부활하다 

 

국내 첫 국·한문 혼용 성구 서화전 여는 소원 이은순…43폭에 담긴 시편 8만 자, 성서 전체 250여 구절에 신앙고백 담아

▎서예가 소원 이은순 씨는 성경 전권을 필사한 작품들로 독특한 서화전을 연다.



갈필(葛筆·칡넝쿨로 만든 붓)로 꾹꾹 눌러쓴 세 글자에 위엄이 서려 있다. ‘여호와’.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히 기억하라고 명한 신의 이름이다. 한지를 파고든 진한 먹물이 만들어낸 거칠고 투박한 글씨에 태초의 섭리자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 녹아 있다.

기독교와 서예라! 서예가 이은순(56) 씨가 한 획씩 눌러 새긴 신앙고백이 동양미의 극치랄 수 있는 흑백의 단아함을 만나니 의미가 더욱 명료해진 듯하다. 그는 성서의 첫 장인 창세기부터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구 250여 구절을 한자와 한글로 한지에 담았다.


▎100년 전 발행된 한문 성경을 필사한 작품.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의 첫 구절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외친 기도. 검은 먹물자국은 그의 피를 의미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주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복음 15장 34절)’를 옮겨 쓴 대목은 신앙고백의 절정이다. 두 가지 판본으로 옮겼다. 벅찬 감동을 한 폭에 담기 어려웠던 것일까. 십자가 아래에 뚝뚝 떨어진 검은 먹물은 예수가 흘린 피다. 고개를 떨구듯 꺾인 나뭇가지 아래에는 붉은 꽃잎이 흩날린다. 그의 서화에서는 서양의 종교화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깊은 울림이 있다. 서체의 유려함을 뽐내는 법도 없다.

성경 전체를 필사한 첫 전시회

처음부터 성경 전체를 작품화할 생각은 아니었다. 믿음을 표현하고픈 열정을 달리 쏟을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20대 초에 입문해 그의 인생을 바꿔준 글 솜씨가 있었다. 신앙고백의 열정으로 시작한 성구 필사(筆寫)였다. 8만 자에 이르는 시편 전편은 1년에 걸쳐 필사했다. 한글과 한문이 혼용된 신을 향한 찬미가가 43폭의 세서(細書·가는 글씨체)로 생기를 얻었다. 작품이 쌓이니 그가 체험한 신의 은총을 세상과 나누고 싶어졌다. 그의 소망이 <성경 국한문 성구선집> 출간과 첫 개인전 <붓으로 펼치는 목자의 음성, 임마누엘 서화전> 개최로 이뤄졌다.

이씨는 “첫 열매를 신께 바치는 마음을 담아 첫 개인전은 나의 신앙고백으로 삼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전시 장소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으로 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공간이 트여서 성경 말씀 전체가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한가람미술관은 대관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국전(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이긴 해도 개인전 경력이 없는 ‘무명’에 가까운 그의 대관 신청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첫 신청은 3개월 만에 부결됐다. 1년을 다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작품은 더 풍성해졌다. 이 박사는 이때를 “춤추면서 작업을 했다고 할 만큼 열정이 충만해 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에 대관 신청이 드디어 받아들여졌다. 성경 구절을 소재로 한 서예전이란 독특한 콘셉트와 심혈을 기울인 작품집이 심사위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불교와 유교 경전을 필사한 서화 전시회는 많다. 그러나 기독교 경전인 성경 전체를 필사한 작품 전시회는 흔치 않다. 더구나 국한문이 혼용된 작품은 더욱 그렇다. 이 박사의 작품은 100년 전 간행된 한문 성경(1912년 상해대미국성경회 발행) 영인본이 토대가 됐다. 작품에 사용하려고 직접 옥돌을 깎아 만든 낙관만 160여 개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각 성구가 주는 감동에 따라 서체를 달리했다. ‘태초상제 창조천지(太初上帝 創造天地·창세기 1장 1절)’로 시작하는 창세기 한문 성구는 상형문자를 연상케 하는 전서체를 사용했다.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성경 구절의 의미를더욱 와 닿게 하려는 시도다. 먹이 잘 먹고 세련된 글씨가 나오는 화선지보다 거칠고 뻣뻣해 힘이 배로 드는 한지만 고집했다.

이 박사의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성균관대 송하경 명예교수는 작품집 격려사에서 “소원의 서예 세계는 미처 덜 다듬어진 듯, 덜 성숙된 듯, 미처 다 녹아 흐르지 못한 초 삼월 잔설 밑 파릇한 생명 같은 그만의 성령 의지와 빛깔로 충만하다”라고 평했다.

스승인 구당 선생 권유로 성서 세서 시작

이씨는 걸어온 길이 남다르다. 남들보다 뒤늦게 서예에 입문한 편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나와 곧바로 취직했다. 친구를 따라 간 서예학원에서 보조강사로 일하게 된 것을 계기로 서예가의 길에 발을 들였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더니 그의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결혼 후 홀시아버지를 수발하면서도 만학의 꿈을 이어갔다.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거쳐 성균관대 유교경전학과에 진학해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원 재학 때 그의 스승인 구당 여원구 선생을 만났다. 이씨는 구당의 권유로 논어 전문 1만6천 자를 써내 세서분야에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원로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구당 선생은 지난해 불교와 개신교, 유교 등 3대 종교의 성서들을 서예와 전각으로 표현한 이색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씨는 “뒤늦게 시작해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건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선린교회 김요셉 목사는 “365일 새벽예배에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순수한 신앙인격의 소유자”라고 했다. 그의 작품이 곱씹어볼수록 감동의 깊이를 더하는 이유다.

그의 첫 개인전은 3월 18일부터 27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이 또한 신의 섭리일까. 그의 전시회 기간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부활하기 전 40일 간 광야에서 겪은 고행을 기념하는 기독교 3대 절기인 사순절 기간이다.

201404호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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