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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윤고은의 취재파일 | ‘연중무휴’ 고정관념 깬 배짱 좋은 식당列傳 

앞치마 벗어놓고 떠나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구! 

윤고은
돈 욕심 버리고 세계여행 다니며 견문 넓히니 여유 생기고 장사 더 잘돼…휴일 지정하는 주위 상점 늘며 시장 분위기도 활기 되찾아

▎부산 안면옥의 주인 방수영 씨(왼쪽)가 단골 손님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매년 9월이면 문을 닫는 식당이 있었다. 재충전과 안식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최근 그 가게에 갔다가 올해부터는 연중무휴로 일한다는 말을 들었다.

9월 한 달을 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큼이나 그 식당의 연중무휴 영업 방침은 인상적이었다. 그 이야기를 전하자 친한 후배가 자신의 동네에 있는 가게 한 곳을 소개했다. 신 메뉴 개발과 재충전을 위해 매년 한 달을 과감히 쉬는 음식점이 있다는 것이다. 오오 정말? 정말 그런 가게가 있구나, 있어! 요즘 핫하다는 가게가 많은 연남동 부근이었으니 정말 그럴 법했다.

그러나 막상 그 음식점 주인과 연결이 되자, 그가 난색을 표했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던 것이 맞지만 그곳 역시 올해부터는 한 달의 공백 없이 가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런 현실에 내가 실망할 이유는 없지만 이상하게 흥이 깨졌다. 후배가 말했다. ‘연중무휴’라는 말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고사성어처럼 느껴진다고.

부지런함이 한국인의 장점일 수도 있지만, 글쎄, 그럴수록 나는 어쩐지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아주 긴 휴가를 덜컥 떠나는 식당을 찾고 싶어졌다. 다행히 매년 한 달의 휴가를 떠나는 가게 한 곳, 그리고 여섯 달만 일하고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긴 휴가를 즐기는 가게를 발견했다. 이런 긴 휴가 앞에서는 20∼30대 젊은 주인들이 아무래도 더 유연할 거라는 건 내 편견이었다.


▎대구의 ‘부산안면옥’은 40년째 1년의 절반만 문을 연다. 70·80대 노부부는 식당문을 닫고 매년 해외 여행을 다닌다.
대구 <부산 안면옥> 방수영·홍기량 부부 “냉면집 동면 기간 중엔 목장일, 해외여행 떠나”

“1년에 열한 달만 일하는 식당? 우리 집은 여섯 달만 일하는데 해당되는 겁니까?”

방수영(83) 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식당의 ‘1년 2모작’은 이미 4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69년에 문을 열어 올해로 46년째 영업하고 있는 안면옥은 개업 후 두 해 정도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1년에 절반만 일해왔다.

그래서 안면옥의 여름은 더 바쁘다. 1년에 절반만 일한다고는 하지만, 그 절반으로 1년을 꾸리기 위해서는 노동의 강도를 두 배로 높여야 한다. 한마디로 ‘짧고 굵게’ 가는 거다.

이 식당은 매년 4월 1일 문을 열었다가 그해 추석연휴 전에 문을 닫는다. 추석이 9월인지 10월인지에 따라 약간 차이는 나지만 대략 여섯 달 정도 일하고, 여섯 달을 쉬는 셈이다.


▎곧 휴가를 떠날 계획인 안면옥 주인 방수영 씨(가운데)가 모처럼 가게를 찾아온 40년 지기 단골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이들이 다시 만나는 건 내년 이맘때쯤일 것이다.
4월 1일이 되기 보름 전에 주인 내외는 오래 동면했던 가게로 돌아온다. 직원들은 3월 27일에 출근한다. 잠들어 있던 집기들을 모두 꺼내 씻고 정리하는 데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이 시스템에 모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꽤 큰 규모의 가게, 끊임없이 밀려드는 손님들, 열 명이 넘는 직원, 그 모두가 이미 긴 휴가에 익숙해졌다. 심지어 이곳의 식탁과 의자들도, 식기들도 말이다. 신참 직원의 안면옥 경력이 20년이면 말 다했다. 따로 당부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직원은 휴가로 계절 두어 개를 건너뛰고 새로 문을 여는 과정에 대해 베테랑이다.

오늘도 바쁘게 일하는 직원 박숙자 씨는 이곳에서 근무한 지 21년째다. 식당 문을 열지 않는 여섯 달을 어떻게 보내는지 물으니,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여름에만 일하고 겨울에 쉬는 사람들도 있고, 겨울에는 다른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매년 3월 27일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손님도 마찬가지다. 단골손님들의 경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45년, 46년에 달한다. 그들이 이 냉면집의 긴 휴가와 주인 내외의 여행에 대해 모를 리 없다. 이미 여러 차례 영상·활자매체에서 대표 방수영 씨의 일상과 여행을 조명해왔으니.

손님들로 북적북적한 식당 안에서 이들의 40년 전통에 놀라는 건 나뿐인 듯했다. 아무리 냉면이 여름 메뉴라고 해도, 통으로 여섯 달을 쉴 수가 있나?

방수영 씨는 겨울에는 매상이 여름의 10% 정도로 줄었다고 했다. 고민 끝에 과감히 겨울 장사를 접기로 했고, 그렇게 시작된 긴 휴가가 지금까지 함께 늙어왔다.

방수영 씨는 냉면집을 시작하기 전까지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일했다. 학교 수업 외에도 개인교습으로 바쁘던 시간들이었다. 보람도 있었지만, 조금의 쉼도 없었던 일상 때문에 교사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자 한마디로 모든 배터리가 방전 상태에 이르렀다. 그 즈음 부산에서 냉면집을 하던 외삼촌이 그에게 냉면집을 이어서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해왔고, 그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주방장을 비롯한 냉면집 식구들이 대구로 건너왔고, 그게 여기 대구에 ‘부산’이란 수식어를 달고 안면옥이 시작된 줄거리다.

“그때 그 주방장의 손이 제 손의 두 배였어요. 아주 컸죠. 그 주방장의 커다란 손이 손님들에게 호감을 산 게 아닐까요? 맛도 맛이지만 한국 음식은 푸짐해야 해요.” 방수영 씨는 식당 말고도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 목장 역시 냉면집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예전의 목장 일이란 모두 수작업이었다. 그는 외국에서 목장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고, 캐나다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가 1982년. 출국절차가 지금에 비해 훨씬 복잡했던 시기였다.

캐나다에 가기 위해 여러 절차를 거치고 드디어 출국하던 날, 그는 서류 준비를 할 때처럼 복장을 최대한 갖춰 입었다. 빳빳한 셔츠에 넥타이 차림으로 머리 위에는 단정한 모자를 쓰고, 손에는 새로 산 보스턴백을 들고 있었다. 기내에서 몇 안 되는 한국인인 그는 유독 튀었다.

옷차림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이 찢어진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걸친 모습을 보고 그는 조금 놀랐다. 목장 견학은 순조로웠다. 건초 관리까지 기계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며칠 후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기억에 남는 게 캐나다 목장들의 자동화 시스템들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또 낯선 곳을 향해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목장 견학을 갔다가 해외여행에 눈을 뜬 겁니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죠. 마침 1990년 해외여행 자율화 물결이 시작되었고, 물 만난 고기처럼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4월1일부터 추석 전까지만 영업

1990년, 그는 아내와 딸을 동반하고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첫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유로스타나 저가항공도 없던 시절이어서 그들은 영국을 여행한 후 배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프랑스에서부터 서유럽 국가들을 여행했다. 어른 세 명이 28일을 보내는 동안 들어간 경비는 모두 200만 원 정도였다. 그 당시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세 사람의 한 달 경비치고는 무척 저렴한 축이었다.

아침에는 호텔에서 나오는 조식을 먹고, 점심과 저녁엔 주로 바게트나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한 달 동안 어떤 식당에 가서 돈을 주고 밥을 사먹은 건 딱한 번뿐이었다. 베네치아의 셀프서비스 식당이었다. 뷔페 형식으로 쟁반에 각자 먹을 만큼 음식을 담아 먹는, 식당 중에서도 꽤 저렴한 곳이었다. 식사야 저렴하면 어떤가, 낯선 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일 충만하던 시간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매년 냉면집이 동면에 들어가면 가족과, 혹은 친한 벗과 함께 떠났다. 여행은 문화충격의 연속이었다. 이름(퍼스트네임)을 편하게 부르는 수평적인 인간관계도 신선한 충격 중 하나였다. 로키산맥에서 스키 강습을 받던 때,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스키강사가 그를 향해 “수! 이쪽으로!”라고 소리쳤던 것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얼떨결에 소리치는 쪽으로 스키를 타고 내려가긴 했지만, 당혹스러웠죠.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자식아, 내가 지금 몇 살인지 알아?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거예요. 그리고 편했습니다. 아버지뻘한테도 편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 문화, 누구나 친밀해지면, 혹은 친밀해지기 위해 이름을 부르는 문화가 어쩌면 저들의 장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국은 너무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니까요.”

그는 여행을 통해 배우고 또 배웠다. 한동안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을 중점적으로 다녔던 것도 한국의 반만년 역사에 비하면 훨씬 짧은 이력을 가진 그 국가들이 어째서 더 선진국으로 통하는지가 궁금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는 자연스레 그 일대의 전문가로 통하게 되었다.

“제가 가르쳤던 고등학교 제자 중에 졸업 후 미국에 건너가 간호사로 30년째 살고 있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미국 여행 중에 아내와 그 제자 집에 들렀죠. 필라델피아였는데, 제자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곧 간호사 정년이 다가오는데 미국 내에서 노년을 잘 보낼 수 있는 도시를 추천해달라고 말이죠. 미국에서 30년 거주한 사람이 미국에 여행 온 사람에게 거주지를 추천해달라니, 재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제자에게 라스베이거스를 추천해주었다. 사람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를 우선적으로 떠올리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카지노가 있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장점들도 있다. 그곳은 생활자의 입장에서 물가가 싸고, 치안이 안정되어 있다. 미국 내에서 노후를 보내기엔 더없이 좋은 도시라고.

그의 여권에 찍힌 기록들은 다 헤아려보기도 벅찰 정도다. 그는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로 이집트를 손꼽기도 하지만, 어디를 가든 그의 동반자는 아내 홍기량(76) 씨다. 이들 부부는 대한민국 배낭여행 1세대다. 베테랑 여행동반자끼리도 부부 싸움을 할까? 이들은 예외는 없다고 대답했다. 호텔의 위치라든지 일정이라든지 하는 세세한 부분들 때문에 아이처럼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는 점에서도 예외는 없다. 이 부부는 방수영 씨가 여든 살을 목전에 두고 있던 2010년, 마지막 여행을 준비했다.

“이제 다리도 아프고 더는 여행을 못하겠다, 싶기도 했지요. 그래서 피날레를 장식할 만한 여행지를 찾았습니다. 남아메리카를 가자!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행기만 열두 번을 타는 여행이었죠. 첫 여행 때처럼 공교롭게 기간도 28일이었고요. 남아메리카에 도착해서는 크루즈 여행을 했습니다.”

1990년의 첫 배낭여행에 들어갔던 경비가 한 사람당 60만원 꼴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 마지막 여행은 경비부터 확연히 달랐다. 가기 전에 여행사에 낸 돈만 두 사람 몫으로 2500만원이었고, 현지에서 쓸 돈도 적지 않게 준비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그게 정말 마지막 여행일 줄 알고 그랬지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그 다음해가 되니까 친한 벗이 또 어딘가를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또 따라갔습니다. 이번에도 11월에 난징을 가자고 해서 또 계획 중이에요. 마지막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 아니었던 거죠.”

지금은 아들 방문진 씨 내외가 냉면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는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꼭 가게에 나온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단골들이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도 추석이 시작되면 방수영 씨는 아내와 또 새 계절을 살게 될 것이다. 쉬는 동안 그가 여행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은 항상 어떤 화두를 던져준다.

이를테면 왜 국경을 인접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곳은 부유하고 어떤 곳은 가난한지, 한때는 번성했던 국가가 왜 지금에 와서는 힘을 잃었는지, 그런 것에 대해 끊임없이 호기심을 품는 그는 여행 이후에 더 바빠진다. 책을 찾아 읽고, 연구하고, 또 책을 쓴다.

지금까지 국정모니터 요원으로 2년씩 네 차례, 모두 8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그때 그가 제안한 것들은 그의 여행길에서 발견하고 깨달은 것도 많다. 여러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는 여행이라고 답한다. 그것이 모든 다른 일상의 출발점, 그리고 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한신·심재숙 부부는 한 달의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로 나머지 열한 달 동안 최고의 순댓국으로 손님들을 맞는다.




▎서울 아현시장의 ‘은성순대국’은 매년 여름 한 달간 문을 닫는다.
서울아현시장 ‘은성순대국’ 이한신·심재숙 부부 “ 중앙아시아의 오지 사랑이 부부 연까지 맺어줬죠”

서울 아현시장에 위치한 ‘은성순대국’. 좁고 정겨운 시장 골목을 통과해서 마침내 이 활기 넘치는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곳에서 꼭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런 약속 없이 찾아가도, 혼자 가도, 단지 순댓국 한 그릇을 먹고 나올 뿐이라고 해도(순댓국집에서 당연한 줄거리지만!) 그곳에선 외롭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런 따뜻함은 주인 부부에게서 자연스레 발화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순댓국 아저씨입니다. 이쪽은 순댓국 아줌마고요.” 밝게 인사하는 이한신(52), 심재숙(56) 부부. 그들은 매년 한 달간 식당 문을 닫고 여행을 떠난다. 편안한 여행지는 노후를 위해 미뤄두고, 지금은 좀 더 험하고 복잡한 경로의 여행지로 다니는 중이다.

은성순대국을 올해로 17년째 꾸려오는데, 개업 초부터 찾아왔던 손님들이나 이웃 상인들에게는 그 4년 전이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식당은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연중무휴’에 가깝게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설이나 추석에도 명절 당일 오전에 차례만 지낸 후 오후나 다음날 아침부터는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던 곳이 변했다. 휴일이 생긴 것이다. 2011년, 은성순대국이 여름 한 달을 쉰다는 종이를 식당 곳곳에 써 붙인 건 대사건이었다. 단골들은 물론이고, 시장 사람들도 의아해 했다. 한 번도 안 쉬던 가게가 갑자기 한 달이나 쉰다니. 미친 게 아니냐는 식의 반응들도 있었다.

“남편이 워낙 여행을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저도 궁금했어요. 이 사람 안에 들어가봐야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여행을 따라가기로 한 거죠.”


▎이한신 씨의 인생 경로가 담긴 5권의 여행기
심재숙 씨의 말이다. 남편인 이씨는 중앙아시아, 러시아 일대의 여행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최근 출간된 <파미르 하이웨이>를 비롯해서 지금까지 묶어낸 다섯 권의 책들은 그의 인생 경로나 마찬가지다. 중앙아시아, 러시아 일대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그 책은 바이블처럼 통한다. 몇 년 전, EBS <세계테마기행>을 통해 여행을 공개한 이후로는 중앙아시아 길 위에서 그를 알아보고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이도 생겨났다.

여행기 펴내 현지 ‘한글학교’ 장학금 지원도

그는 1998년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1991년에 구소련이 붕괴된 후, 그의 지인들은 대사·상사주재원·코이카 등 다양한 경로로 옛 소련 땅으로 나갔다. 그들이 의류업을 하던 이한신 씨를 초대했고, 그게 시작이었다. 그때 러시아 미녀들을 너무 많이 봐서 실명할 뻔했다며, 안경도 그때부터 쓰게 된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를 홀린 건 사실 러시아 미녀들이 아니었다. 귀국편 비행기의 타원형 창문 아래로 본 실크로드가 진짜 유혹의 실체였다.

“창 아래 그 길을 내려다보면서 결심했습니다. 언젠가 꼭 저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겠노라고. 그 다음 번 러시아에 갈 때는 정말 배낭을 메고 그 길을 따라 이동했어요.”

이후 1년에 두 차례씩 옛소련 땅을 여행하게 됐고, 이씨의 인생도 바뀌게 되었다. 중앙아시아포럼 회장으로 중앙아시아와 한국의 거리를 좁히는 데 애쓰게 되었고, 자연스레 그 일대의 지인들이 한국에 찾아오는 일도 많아졌다. 아내와 처음 만나던 순간도 비슷한 경로로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친구와 함께 순댓국에 소주 한잔을 하려고 식당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곳이 은성순대국이었다.

“그때 제가 앉았던 자리가 바로 이 자리였어요. 물론 그날은 순댓국만 먹고 갔지만, 그 뒤로 단골이 되었죠.” 그들은 결국 부부가 되었다. 이한신 씨의 명함 앞면에는 은성순대국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그의 여행가로서의 활동이 적혀 있다. 두 삶의 조화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순댓국이 가장 중요해요. 순댓국이 제가 여행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또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요. 모든 것은 순댓국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거기로 귀환되죠.”


▎올해도 어김없이 가게에는 한 달간의 여름휴가 일정을 미리 고지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쉬는 것에 인색했던 여자, 심재숙 씨가 마침내 남편을 따라 여행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굳히자, 이씨는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그 여행을 준비했다. 그게 2011년에 떠난 실크로드 여행이었다. 2012년에는 제1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제2시베리아 횡단열차, 곧 바이칼 아무르 철도를 따라 움직였다. 그 2만2791㎞의 기록은 책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리고 바이칼 아무르 철도>로 출간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책 위에도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찍혀 있다.

올해도 이들 부부는 또 한 번 쉽지 않은 여행을 계획했다. 목적지는 아제르바이잔 남쪽, 이란 북쪽, 그리고 터키의 동남쪽 부근에 위치한 ‘나고르노 카라바흐’다. 카프카스 일대 국경 사이에 숨어 있는 이곳은 유엔으로부터 국가 인정을 받지 못한 10여 곳 중의 하나다. 세계에서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나라로 인정하는 국가는 단 두 곳, 아르메니아와 베네수엘라 뿐이다.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네 개의 국가를 거쳐야만 나고르노 카라바흐 옆에 있는 국가로 들어갈 수 있다.

그들 부부는 지금까지 몇 차례의 여행을 통해 규칙을 만들었다. 그건 함께 여행하는 동안 최대한 남편이 현지의 지인들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의 넓은 인맥은 때로 아내에게 그곳이 여행이라는 낯선 기운을 무디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내에겐 불편하더라도 최대한 날것 그대로의 여행을 할 각오가 되어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특별한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 지인이라기보다는 만나서 응원해주고 싶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순댓국집 벽면에는 이한신 씨가 그동안 써온 책 다섯 권이 꽂혀 있는데 책의 판매수익금 일부는 세종한글학교의 학생들을 돕는 데 쓰인다. 그 첫 장학금을 받은 두 명의 학생들을 이번 여행길에 만나기로 한 것이다. 고려인 한 명, 러시아인 한 명이다. 그들을 만나는 일정 외에는 오로지 부부만의 시간이다.

아현시장 상인들에게 번진 행복 바이러스

“이번에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라고? 여보, 한번 말해봐.” 지명이 입에 붙지 않아 심씨는 웃음을 터뜨린다. 한 사람을 알기 위해 시작된 여정, 험난한 여행길. 그러나 몇 년간 아내는 때로 남편이 전혀 상상 못했던 에너지로 여행을 즐길 만큼 여유로워졌다. 두 사람은 점점 닮아갔다. 그들 부부의 여행에 동행하길 바라는 매체들이 적지 않은데, 최근에는 ‘순댓국아저씨 말고 순댓국아줌마’ 얘기를 더 듣고 싶다는 일도 있었다.

워커홀릭에 가까웠던 이 식당에는 언제부턴가 ‘매주 월요일은 쉽니다’란 안내문도 나붙었다. 지금 이 식당은 매주 월요일마다, 그리고 매년 여름 한 달씩을 꼬박 쉰다. 처음엔 의아해 하던 시장 상인들도 이제 이들 부부의 휴가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재미있는 건 그들이 월요일에 쉬는 문화를 아현시장 일대에 전염시키고 있다는 것. 시장에서 가장 큰 식당 중의 하나가 매주 월요일 휴업을 선언했다. 슈퍼마켓 한 곳도 매주 월요일에 쉬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휴일이 따로 없던 가게들이었다. 이런 유행은 즐겁다.

부부가 같이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삶을 몹시 긴 열차 위에 나란히 올려두었다. 그건 낭만적인 일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무척 현실적인 일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그건 몹시 특별한, 쉽게 결심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시베리아횡단열차에 한번 오르면 며칠씩은 타게 되는데, 열차 내에 샤워할 곳이 마땅치 않아요. 제가 아내와 3등칸에 머물렀는데, 3층 침대 형식으로 두 줄, 모두 여섯 개의 침대가 있는 곳이에요. 첫날 자고 일어나니까 머리가 삐죽삐죽 솟아나 있는데, 서로 보기가 민망하더라고요. 그런데 아주 극에 달하는 것은 이튿날이에요. 아주 수치스러울 정도죠. 창문이 활짝 열리지 않아서 열차 안이 무덥고, 한국인들은 그런 더위에 적어도 하루 한 번은 샤워를 해야 하는데 말이죠.

사흘째가 되면 어떤 줄 아세요? 거의 포기상태가 됩니다. 체면을 포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희한하게 나흘째부턴 정말 편해져요. 아가씨며 할머니며 할아버지며 청년이며 다 똑같은 인간일 뿐이죠. 너나 나나 별다를 것 있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머리에 쉰내가 나든, 땟물 닦은 손으로 빵을 찢어 먹든, 아주 편하다니까요.”

혹시나 이 글을 보고 은성순대국집 이야기가 궁금해지더라도, 8월 12일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 달 전에 이런 안내문이 붙었기 때문이다. ‘7월 13일부터 8월 12일까지’ 쉰다는 내용이다. 매년 여행 출발 한 달 전에 식당 벽 여기저기에 이런 안내문을 붙여둔다. 손님과 마주칠 때마다 입과 귀가 닳도록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거 보셨죠? 저희 휴가 갑니다. 그 기간에는 이 일대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 손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부럽다고도 하고, 올 때 맛있는 술을 사오라고도 한다. 그 한 달의 여행길, 그들 부부의 말처럼 이 일대에는 얼씬도 하지 마시기를.

배짱 좋은 가게들을 찾아나선 것이 7월 초. 내 수첩 속에 있던 또 다른 가게 중 한 곳은 전화벨이 한두 번 울리자마자 미리 녹음해둔 음성이 흘러나왔다.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휴가기간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벌써 긴 여름휴가를 떠난 것이다. 한 발 늦었네, 싶으면서도 뭔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식당에 가본 적도 없지만, 소문처럼 정말 그들이 올해도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이 내게 기분 좋은 포만감을 남겼다.

취재를 한 식당들은 긴 휴가도 휴가지만, 맛으로도 이미 유명한 집들이라 한 달 혹은 여섯 달을 쉬면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그들의 여행경비에는 식당을 ‘일시정지’시킨 대가도 추가되는 셈이다. 그러나 두 식당의 주인들은 이구동성처럼 이런 말을 했다. 휴가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더 많은 것을 얻고 온다고. 그분들의 패기를 응원한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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