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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프리즘 | 정조대왕 ‘어찰’ 정신의 교훈 - 인사 대탕평은 대통령 권력 강화의 묘책 

 

김수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정조는 척신정치, 즉 비선정치 척결을 즉위 후 첫째 과제로 삼은 준비된 군주…노론 영수 심환지 등 정적까지도 끌어들이려 노력했던 초월적 정국운용에 주목해야

▎7월 10일 오전 취임 후 여야 원내지도부와 첫 회동한 박근혜 대통령. 정조의 탕평책은 폭넓은 인사정책이 대통령 리더십 강화에 도움을 준다는 교훈을 남긴다. 좌측부터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박근혜 대통령,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같은 당의 우윤근 정책위의장,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정조는 척신정치 폐해 척결을 인정하는 세력이라면 당적과 색깔을 가리지 않고 등용했다. 과거사도 묻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협애한 지배 카르텔 밖의 수많은 능력자에 주목해야 한다. 대통령 리더십의 강화, 개혁의 성패도 여기에 달렸다.

1987년 체제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의 여섯 정권을 거쳐 지금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취임 초기에는 많은 기대와 박수 속에 출범했던 이 정권들이 후기로 가면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다. 바로 측근과 비선의 문제였다. 몇몇 측근과 비선이 인의 장막을 친 결과는 극도의 편중인사로 나타났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이 원하는 사람들을 쓰면서 정권은 곧바로 레임덕에 빠졌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역설이다. 측근과 비선들로 주위를 채우고, 대통령이 원하는 사람들, 즉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통령과 소통하는 사람들로 정권의 요직을 채우는 순간, 대통령의 권한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레임덕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박근혜 정권은 정권 초기인데도 벌써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과거 정권과도 다른 점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 정조의 탕평책이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정조의 탕평책은 단순히 여러 당파를 고루 등용했다는 차원의 정책이 아니었다. 그의 탕평책은 정조가 살았던 그 시대의 여러 상황을 고려한 양보의 산물이자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겨우 1년 반 남짓한 임기를 채운 박근혜 정권에 정조의 사례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될 만하다. 선거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정조의 탕평책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조의 탕평책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이 글은 그런 오해를 풀고 정조 탕평책의 진면목을 현실과 접목해보려는 목적도 있다.


▎이길범 화백이 2004년에 그린 정조 어진(御眞). 1791년 융복(군복)을 입은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에 따라 복원했다. 정조는 생애 세 번의 어진을 그렸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노론 벽파 척리(戚里)에 둘러싸여 즉위한 정조

1776년 3월 10일 스물네 살의 청년 정조는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는데, 즉위 일성이 그 유명한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이었다. 부친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인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라는 ‘8자흉언’을 만들어 퍼뜨렸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 이산(정조)을 사도세자의 이복형으로 열 살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의 호적에 입적시켰다. 그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자란 정조가 즉위 당일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공포했으니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벽파로서는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대왕(영조)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다. 아! 전일에 나는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겠다(不貳本)’고 했으니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으니 향사(饗祀:제사)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지 태묘(太廟)와 같이 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근본을 둘로 하지 않겠다’는 것은 효장세자의 종통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둘째 ‘대부로서 제사하겠다’는 말은 사도세자를 대부의 예로 제사하겠다는 뜻이었다.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혈통에 대한 뿌리를 분명히 천명하면서도 왕권을 이용해 사도세자를 왕가의 예로 격상시키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즉위 당시 아버지를 굶겨 죽인 선왕 영조의 척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당시 정치권은 남인과 소론은 거의 배제된 채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일당 독재체제 아래 있었다. 그것도 노론 척신(왕실의 외척)들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열다섯의 나이로 예순여섯의 영조에게 시집 간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오라버니 김귀주(金龜柱)가 중심인 김씨 척신파와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이 중심인 홍씨 척신파가 주도했다.

이 두 척신 세력은 권력을 두고 서로 싸웠지만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는 함께했던 척신세력이었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하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일 수 있었던 막강한 정치세력을 적절하게 활용해야 국왕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세손시절부터 정조의 고민이었다.

즉위 당일 정조의 일성에는 그 고민의 결과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정조의 이 발언에는 두 가지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정조 자신이 직접 친부(親父)의 제사를 받들겠지만 여기에는 다른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영조와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인 사건을 ‘임오의리(壬午義理)’라고 불렀다.


1 정조 즉위 당시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 정조는 최대 정적이었던 심환지에게도 어찰을 보내는 등 정국 운영의 파트너로 그의 영향력을 활용하려 했다. 2 홍봉한의 초상. 혜경궁 홍씨의 부친이자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은 노론의 영수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다.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탕평에 걸림돌이 되는 외척 세력을 배제하는 과감한 인사정책을 폈다. 3 정조는 재위 기간 남인의 거두 채제공을 중용하는 등 탕평의 정국운영 원칙에 반하지 않는 인재라면 당파와 상관없이 두루 기용했다.



벽파를 두고 딜레마에 빠진 정조

이 임오의리를 둘러싸고 노론은 벽파(辟派)와 시파(時派)로 갈린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일관되게 지지한 파가 벽파(辟派)인데, 벽(辟)이란 임금이란 뜻으로 항상 임금 영조의 편에 섰다는 뜻이다. 시파(時派)란 시류에 따라 임금의 뜻이 바르지 않으면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정파였다.

벽파는 비록 아들이 즉위했어도 사도세자를 죽인 행위가 올바르며, 따라서 정조가 영조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면 당연히 자신들과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정조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벽파는 정조가 외조부인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 시파, 즉 홍씨 세력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벽파는 홍봉한이 영조의 눈밖에 날까 봐 막판에 영조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비판했다.

시파와 벽파의 가장 큰 차이는 세손 정조의 즉위를 대하는 자세였다. 두 파벌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실제로 영조 38년(1762, 임오년)에 사도세자가 역모를 꾀했다는 나경언의 고변 사건을 조작 기획한 것은 홍봉한 측이었고, 영조에게 문제의 뒤주를 갖다 바친 사람도 홍봉한이었다. 홍봉한은 이후 세손이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자세를 보이자 세손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 시파의 영수가 되었다. 그러자 벽파에서는 홍봉한은 영조의 역적이자 정조의 역적이라고 공격했다.

즉위 전부터 정조는 벽파를 두고 딜레마에 빠졌다. 자신의 생부를 죽인 세력이었고, 늘 생부를 죽인 것이 옳다는 ‘임오의리’를 천명했지만 늘 영조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벽파에 적대하는 것은 영조에 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세손은 즉위 전 벽파의 뜻에 반하는 행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세손은 즉위 전까지 철저하게 효장세자의 아들로 지내야 했다.

정조가 즉위 일성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면서도 “대부의 예로 제사하겠다”고 선포한 것은 절묘한 수였다. 이 즉위 일성은 벽파와 시파 모두에게 절반씩의 승리, 다시 말하면 절반씩의 패배를 안겨준 수였다. 정조는 사실 두 세력 모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두 세력은 모두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

무엇보다 정조는 김귀주의 벽파나 홍봉한의 시파나 모두 외척이란 사실 자체가 큰 문제였다. 정조는 영조 만년의 가장 큰 실책이 외척세력에 휘둘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 예순다섯에 열다섯짜리 부인을 맞아들이면서 조정에 두 외척세력을 존재하게 했고, 이 두 외척세력이 정권 장악에 나서면서 정상적인 정치가 실종되었고, 그 결과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비선정치가 정상정치를 압도한 결과 온갖 폐해가 다 드러났다. 그래서 정조가 척신정치, 즉 비선정치 척결을 즉위 후 첫 과제로 삼은 것 자체가 준비된 국왕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홍봉한이 시파로 돌면서 자신의 즉위를 지지한 것이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신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초 홍봉한 세력을 제거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취임 초부터 지금까지 비선정치로 일관해 비판을 받는 박근혜 정권과 다른 점이다.

비선정치의 폐해는 인사권의 굴절에서 시작된다. 박 대통령 인사정책의 가장 큰 폐해는 특정 노선에 경도된 인물만 선호한다는 점이다. 이는 박 대통령이 선거 때 말한 국민대통합을 전면 뒤집은 것은 물론 정조가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대탕평을 실시했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선왕 영조가 척신에게 휘둘리면서 탕평(蕩平)정책을 폐기했고 이것이 정치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혼란한 정국을 푸는 열쇠를 정조는 탕평이라고 생각했다. 탕평(蕩平)이란 <서경(書經)>의 ‘상서(尙書)’ 홍범편(洪範編)에 “편도 없고, 당도 없어서 왕도는 탕탕하며, 당도 없고 편도 없어서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는 데서 따온 말이다.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박세채가 탕평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래 조선 정국의 화두가 됐다.

탕평에 따르면 임금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탕평론은 성리학이 사대부의 사회 주도권을 강조하여 신권(臣權)을 왕권(王權)보다 우위에 둔 것에 반해 국왕이 국정 주도권을 가지도록 명분을 제공하는 기능이 있었다. 영조가 고대 중국의 요(堯)·순(瞬)·우(禹) 임금의 업적을 칭송하는 기록인 <서경>에서 탕평 논리를 가져온 것도 이 논리가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형식적 탕평까지 폐기했던 영조

영조 역시 노론의 지지가 없었다면 왕이 되기 어려웠던 임금이었다. 영조는 심지어 노론과 손잡고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고, 이 때문에 재위 4년(1728) 경종의 복수를 하겠다면서 ‘이인좌의 난’, 즉 ‘무신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노론은 영조를 ‘노론 임금’으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이는 막상 즉위한 영조의 생각과 달랐다. 영조는 일단 즉위한 이상 특정 당파의 임금이기보다는 만백성의 임금, 모든 당파의 임금이고 싶었다. 그래서 영조는 즉위 후 ‘쌍거호대(雙擧互對)’ 정책으로 자신의 탕평이념을 실제 정치에 적용했다.

쌍거호대란 노론을 판서에 임명하면 소론을 참판에 임명하는 식으로 각 당파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이었다. 남인을 배제하고 소론에서도 강경파인 준소(峻少)를 배제한 채 온건파인 완소(緩少)만을 등용시킨 완론탕평(緩論蕩平)이란 한계는 있지만 쌍거호대 정책은 각 당파의 극심한 충돌을 상당부분 완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영조가 그나마 어느 정도 정치적 실적을 거둔 때는 탕평책을 실시하던 때였다. 광해군이 일정 정도의 업적을 거둔 때도 자신을 지지한 당파인 대북(大北) 외에 남인 이원익과 서인 이항복을 정승으로 중용했던 즉위 초반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영조는 그러나 겉으론 탕평을 주창했지만 정작 속마음은 탕평보다는 노론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론 측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노론 임금의 모습을 보였고, 그때마다 정국은 요동쳤다. 급기야 영조는 재위 31년(1755년) ‘나주벽서사건’이 일어나자 형식적 탕평, 기계적 탕평까지 폐기하고 노론 일당독재 체제를 만들었다. 노론 중에서도 두 외척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결국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정조가 조선 후기 성공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비극을 개인적 차원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구조의 문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박 대통령에게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 정조는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로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정조는 노론 벽파든 시파든, 소론이든 남인이든 척신정치 폐해 척결을 인정하는 세력이라면 당적과 색깔을 가리지 않고, 또 과거사도 묻지 않고 등용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한 정조가 정한 탕평의 원칙은 비선정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런 말을 남겼다. “무릇 척리에 관계되면 이 척리건 저 척리건 막론하고 꺾어 눌러야 한다는 것이 곧 나의 고심(苦心)이다.”(<일득록> 7권)

정조의 이런 탕평책을 ‘의리(義理)탕평’ 또는 ‘준론(峻論)탕평’이라고 한다. 의리란 원칙이란 뜻이다. 원칙을 준엄하게 지키는 준론탕평으로 정조는 즉위 초 두 척 신세력을 모두 와해시켰다. 법적 할머니였던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 김귀주를 귀양 보내고, 외조부 홍봉한의 이복동생 홍인한은 사형시키고 홍봉한도 정계에서 축출했다. 아울러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것으로 새로운 척신이 되고 싶어했던 측근 중의 측근 홍국영도 조정에서 몰아냈다.


▎정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인 수원 화성(華城)을 건설했다. 사진은 화성의 서쪽 관문인 화서문. 정조는 권력 강화를 위해 화성 건설과 함께 인사 탕평책을 적극 활용했다.



준론탕평으로 왕권을 강화하다

정조의 척신배제 정치는 조선 전체 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척신들을 조정에서 배제하면서 당파를 불문하고 새로운 인재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정조는 숙종 대 이후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남인 이가환과 정약용 등을 등용했고, 이들은 정조의 준론탕평 속에서 성장했다. 또한 정조의 시선은 사회의 약자층에 가 닿았다. 정조는 재위 1년(1777)에 서얼들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하는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만들어 왕실도서관인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이덕무와 박제가와 같은 서얼을 등용했다.

이덕무, 박제가는 당대 최고 학자였지만 서얼이라는 이유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규장각 검서관은 중하위직에 불과한 자리였지만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정조를 가까이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정조가 서얼 출신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한 이유도 그들에게 개혁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덕무와 박제가에게 “오래된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 방도가 있거든 수시로 기록해서 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정조는 사회에서 소외당한 인재들의 머릿속에 진정한 개혁 플랜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의 양지만을 쫓아다니던 사람들을 중용하면서 ‘개혁’을 주문하는 박근혜 정권의 인사정책과는 사뭇 다른 기조였다.

정조는 재위 22년(1789)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를 썼다.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일컫는데, 모든 하천(萬川)을 비추는 밝은 달빛(明月) 같은 존재가 곧 군주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정조가 추진했던 준론탕평과 매우 관계가 깊은 군주론이다.

즉 정조의 개혁정치에 동의만하면 당파·색깔·신분을 불문하고 두루 등용하겠다는 뜻이었다. 군주로서 자신은 만인을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준론탕평 인사는 자연히 정조의 군주권도 강화시켰다. 군주 앞에서는 사대부나 양민이나 서얼이나 노비나 모두 국왕의 신민일 뿐이라는 군주론이었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었던 신분제 철폐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는 명분이기도 했다. 정조는 준론탕평책과 군주론 강화를 바탕으로 성장은 하고 있었지만 제도권 안에서 차별을 받아온 서얼들과 상인, 역관 같은 중인세력을 제도권 내에 안착시키려 했다.

조선 사회의 발전에 따라 새롭게 성장한 서얼, 중인 계층들을 친 국왕파로 만드는 것이 왕권을 강화하고 특권세력의 발호를 저지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었다. 즉 정조에게는 준론탕평과 강한 왕권과 부패한 조선사회 개혁은 말만 다를 뿐이지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정조가 이처럼 미래를 지향하는 정치를 펼치자 노론 벽파세력들은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즉위 19년(1795)에 수원 화성이 준공되고 그곳에 장용외영이 설치되자 노론 벽파는 큰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정조가 화성으로 천도하면서 자신들을 전격적으로 제거하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자신들에게 사도세자를 살해한 죄를 물으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고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조에게 준론탕평은 한편으로는 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족쇄였다. 노론 척신파에게는 정조의 법적 할머니 정순왕후 김씨와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가 버젓이 살아서 버티고 있었다. 정조는 장용영으로 병권을 장악했지만 집권 후기에도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노론 척신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준론탕평으로 군주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세력을 등용할 수는 있었지만 법적 할머니나 친모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이 경우 광해군처럼 노론 척신파의 격렬한 반발을 살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정국을 파탄내지 않기 위해서 설득과 소통(疏通)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 어찰첩(1796∼1800)의 한 페이지. 당시 신하와 독대가 금지돼 있었던 상황에서 정조는 다양한 당파의 중신에게 어찰을 보내 정국 운영의 중지를 모으고 협력을 당부했다.
정적에게 어찰 보내 만든 ‘핫라인’

정조의 소통정치는 신료들에게 친필 어찰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는 즉위년(1776) 9월에 효종이 송시열에게 보냈던 어찰 모본을 열람했는데 이때 국왕과 신료가 어찰을 통해 막후에서 정국을 조정하는 전례가 있었음을 알았던 듯하다. 조선은 국왕과 신하의 독대를 금지한 까닭에 정조는 자신의 개혁정책들을 성사시키기 위해 여러 명의 신하에게 일일이 서찰을 보내 설득했다.

몇 년 전 노론벽파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들이 발표되면서 주목받은 적이 있었지만 정조가 심환지에게만 서찰을 보낸 것이 아니다.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은 물론 심환지에게 보낸 서찰에서 “서용보에게 편지를 보내 물었더니…”라는 표현이 나온 것으로 보아 여러 명에게 서찰을 보냈던 것이다.

정조는 조선의 개혁이란 그랜드 플랜을 가지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두루 사용했던 것이다. 준론탕평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확장시켰으며, 또한 정적인 심환지에게도 어찰을 보내 핫라인을 만들었다. 정조가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적까지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이런 초월적 정국운용 자세 때문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로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34일째가 되는 5월 19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비정상의 정상화 개혁을 반드시 이뤄내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끼리끼리 서로 봐주고, 눈감아 주는 민관유착의 고리를 반드시 끊어 내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공직사회를 새롭게 구성할 원칙도 밝혔다. “공무원의 임용부터 퇴직에 이르기까지 개방성과 전문성을 갖춘 공직사회로 혁신”하려고 한다면서 “이를 위해 민간 전문가들이 공직에 보다 많이 진입할 수 있도록 채용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이 담화문을 정조식으로 해석하면 박 대통령의 의리(義理)는 관행적 악습을 타파하기 위한 개혁이고, 그를 위해 공직사회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조의 말과 행동이 모두 의리에 일치했다면 박 대통령은 말과 행동이 의리에 합치되고 있다고 보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박 대통령이 취해야 할 원칙과 의리는 정조가 취했던 원칙과 의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정조가 준론탕평으로 그간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여러 인사를 등용했던 것처럼 박 대통령도 그간 사석에서 만났던 많은 측근 인물 말고, 한국 사회의 지배 카르텔 내에 들어있지 않아서 소외되어 있었지만 능력 있는 인물들을 대거 발탁해야 한다. 그것이 정조처럼 시대의 흐름에도 맞으면서 왕권도 강화할 수 있는 첩경이다. 국가개조라는 과제에 동의한다면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당파나 색깔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는 탕평인사책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까지 비밀서신을 보낸 것처럼 야당 강경파까지도 끌어안는 대범한 행보가 필요하다. 그래야 정조처럼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된다. 지금 인구에 회자되는 것처럼 협소한 비선에 의지하는 정치를 계속하다 보면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권한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개혁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정조가 혼신을 다해 실현하려 했던 대탕평의 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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