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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자기 치유의 인문학’ | 그래도 이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힘 - 당신의 분노를 응원합니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우리 삶의 ‘진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위해 분노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근면성실’, ‘준법정신’이 국민이 지켜야 할 최고 덕목으로 여기던 때가 있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한 지배계급의 ‘훈화(訓話)’다. 억압당한 자유보다 희망이 더 커 보이는 게 착시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많다. 저항보다 순종을, 비판보다 인내를 강조하는 시대에 순응한 이들은 기대만큼의 정당한 보상을 얻었을까?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세월호 사건 이후 인문학 강연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주로 ‘공부하는 방법’, ‘글 쓰는 방법’,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받게 되었지요. 그중 가장 난처한 질문은 바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은 자꾸만 사악해져 가는데, 우리도 그 악과 싸워 이기려면 강해지고 악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하게 만드는 세상이 야속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젊디젊은 청년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저도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험악해지는데, 착하게만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위선이 아닐까요? 아이들에게 ‘고분고분하게 어른들 말을 잘 들으라’고 가르친다면, ‘정말 나쁜 어른들’을 만났을 때 아이들은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우리도 이제는 속을 만큼 속아오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참고 ‘강한 자들’의 말을 잘 들으면,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장밋빛 환상에, 속을 만큼 속아오지 않았는지요.

“이제는 차라리 우리도 같이 사악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 앞에서 저는 이제 흥분하지 않고 오히려 숙연해지곤 합니다. 더 이상 당하기만 하고, 속아주기만 하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하기만 하는 데에 이골이 난 성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뭔가 아주 중대한 변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환상, 시스템이 뭔가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판이 되어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우리는 힘겹게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세상은 굴러가겠지’라는 안일한 집단 망상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최소한의 긍정적 신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아니 우선 나 자신 각자의 삶부터 바꿀 수 있는 ‘진짜 주체’가 되어야 할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사악한 세상에 발맞추어 함께 사악한 주체가 되어야 할까요? 강해진다는 것은 곧 악해진다는 것과 동의어 일까요? 강해져야만 강한 자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일까요?

악에 맞서기 위해 우리도 악해져야 하는가?

저는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대참사를 바라보면서 ‘예외적 상태가 오히려 이 사회의 진면목을 투명하게 잘 드러낸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대참사를 만날 때마다 저는 두 가지 사실의 선명한 대비효과를 보게 됩니다. 바로 집단의 사악함과 개인의 위대함입니다. 집단이 만들어내는 문명의 대참사는 날이 갈수록 참혹해집니다. 무인폭격기로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시켜 어린아이들, 부녀자 할 것 없이 무참하게 살해하는 미군의 포악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털끝 하나 안 다쳐야 하고, 적들은 민간인이든 어린아이든 상관없이 죽거나 다쳐도 무방하다’는 잔혹한 사고방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적’으로 규정되면 그들이 어떤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가졌는지, ‘왜 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도 왜 테러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뿌리에 대한 성찰은 하지 않습니다.

세월호는 말할 것도 없지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적 사악함’은 바로 ‘사람을 구하는 일보다 상부의 지시나 윗사람의 의전을 더 챙기는 체면중심의 조직’이 만들어낸 파국입니다. 어른들의 더러운 체면 경쟁이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인 것입니다. 300명 가까운 죄 없는 목숨이 속수무책으로 수장당하는 동안, 구조를 책임져야 할 세월호 관계자들과 해양경찰이 제대로 해낸 일이라고는 ‘윗사람의 명령에 따르고, 눈치를 보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윗사람들은 사고에 대해 책임지려는 생각은 커녕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최고의 가치마저도 망각해버린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보험금이 얼만지, 어떻게 책임을 회피할 것인지, ‘컨트롤타워가 우리가 아님’을 증명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죠. 그중 어느 누구도 ‘진정한 주체’가 되어,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진정한 인간’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이는 없었습니다.

승객들의 목숨을 구한 진짜 영웅은 ‘대단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순수한 개인’이었습니다. “너희들 다 구하고 나서 나도 나갈게!”라고 외치며 끝까지 아이들을 구해냈던 스물두살 승무원 고(故) 박지영씨, 커튼과 소방호스를 묶어 스무 명도 넘는 학생들과 아이들을 구한 배관공 김홍경 씨, 선장과 조타수들은 다 자기들끼리 탈출해버리고 해경들은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십 명의 승객을 끝까지 구한 화물차 운전수 김동수씨…….

이 모두가 ‘누군가의 지시’나 ‘대단한 조직의 위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진실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의 강인함은 ‘악에 맞서는 악’이 아니라 ‘악에 맞서는 선의와 용기와 실천’이었습니다.


▎제우스의 금기를 깨고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는 ‘의로운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림은 다르크 판바부렌의 1623년 작<헤파이스토스에게 쇠사슬로 묶이는 프로메테우스>.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은 ‘악에 맞서 더 악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악이 밀려오는 힘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큰 사랑과 용기로 가장 단순한 선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악에 맞서 더 악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에 진정 맞설 수 있는 것은 더 강력한 악이 아니라, 악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도록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의 선의를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세상은 험악합니다. 하지만 험악한 세상에 맞서 우리도 같이 험악해진다면, 마지막 남은 희망의 씨앗들은 어느 마음밭에 뿌릴 수 있겠습니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대놓고 저항한 유일한 신이었습니다. 제우스의 독재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그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끔찍한 형벌을 받았지만, 그는 ‘선하면서도 강한 자들의 궁극적인 승리’를 예언하는 진정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대들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제우스가 나에게 고문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내 이제 그것을 밝히겠소. 제우스는 아버지의 왕좌에 앉자마자 즉시 신들에게 저마다 다른 명예와 직위를 나누어주며 자신의 통치권을 분배했으나 불쌍한 인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소. 아니 그는 인간들의 종족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다른 종족을 새로 만들려 했소. 이에 반대한 자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소.

그러나 나는 감히 반대했소. 그리하여 나는 인간들이 박살 나서 하데스의 집으로 가지 않도록 그들을 구해주었소. 그 때문에 나는 참기에 괴롭고 보기에 민망한 이런 고통에 휘어지고 말았던 것이오. 나는 인간들을 동정하다가 나 자신은 동정받을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지 못하고 무자비하게도 이런 징벌을 받고 있는 것이오”- 아이스킬로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지만지, 2012)



▎맹목적인 성실성은 지배계급의 착취대상에 불과하다. 조지 오웰(왼쪽)은 저서 <동물농장>에서 대중이 갖는 비판적 지성이 결여된 세계관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세상을 굴러가게 만드는 숨은 ‘복서’들

어린 시절에는 세상을 거대한 선박에 비유하는 것이 정당해 보였습니다. 선장이 가장 중요해 보였지요. 선장 같은 중요한 직책은 당연히 대단한 사람들이 맡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요. 우리 같은 평범한 선원들은 열심히 선장의 명령에 따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선장이 리더십과 지혜와 정의를 지휘하고, 우리는 선의와 성실함만으로도 그 거대한 배를 운행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세상을 둘러보니, 어떤 조직이든 ‘리더가 훌륭해서’ 저절로 굴러가는 곳은 전혀 없었습니다. 리더가 훌륭하지 않은 경우도 부지기수고, 리더를 비롯한 ‘윗선’이 부정부패로 찌들어 있는 경우는 더욱 많지요. 게다가 아무리 커다란 조직이라도 결국 그 조직을 ‘굴러가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선장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통솔해야 할 사람들은 ‘시스템’이나 ‘지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정작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경우를 속속 발견하게 됩니다. 요란하게 설쳐대는 사람들은 리더라 불리는 이들이지만, 실제로 조직을 ‘오늘도 무사히’ 굴러가도록 애쓰는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호텔에서도 정작 호텔을 굴러가게 만드는 최고의 힘은 매니저나 사장이 아니라 ‘청소부들’이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청소를 비롯한 하우스키핑을 제때 해주지 않으면 호텔에서는 다음 손님을 받을 수 없지요. 세상 일이 다 그렇습니다.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의 중요도만큼의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지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복서가 바로 그런 인물을 상징합니다.

<동물농장>의 복서는 남들이 하는 일보다 열 배, 스무 배를 더 일합니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내가 더 최선을 다하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조직과 좋은 시스템과 좋은 선장이 있을 때는 그러한 천진한 낙관주의가 통합니다. 그의 성실함과 진실함이 교활한 정치가들이나 중간 착취자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요. 하지만 <동물농장>은 물론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한 바람직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지요.

복서는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입니다. 그는 우리 곁의 우직하고 착한 사람들, 평생 착하게만 살아왔지만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안타깝게 스러져가는 사람들을 서럽게 대변하는 존재입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들부터 시작해서, 조직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자기 한 몸을 완전히 다 바치는 사람들, 심지어 윗사람의 잘못까지 자기가 뒤집어쓰는 사람들까지. 복서는 뜨겁게 대변합니다. 그는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 나가고, 누군가 힘들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내가 대신 일하겠다!’고 나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복서는 모든 동물이 찬탄해 마지않는 존재였다. 그는 존스 시절에도 근면한 일꾼이었지만 요즈음은 한 마리 말이 아니라 세 마리를 뭉쳐놓은 것처럼 보였다. 농장의 모든 일이 그의 굳건한 어깨에 걸려 있는 날도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는 항상 가장 어려운 곳에서 밀고 당기고 했다.

그는 수탉에게 부탁하여 다른 동물들보다 아침에 삼십 분 먼저 자신을 깨우도록 했다. 그리하여 정규일과보다 먼저 자신이 필요하리라 생각되는 곳에 자발적으로 찾아 나서곤 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는 ‘내가 좀 더 열심히 해야지’ 하며 다짐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 조지 오웰 <동물농장>(안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2014)


누구를 위해 열심히 해야 하는가?

하지만 결국 복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복서는 누구보다도 빨리 일어나 열심히 일했지만, 누구보다 깊이 병들었고, 누구보다 많이 착취당했으며, 누구보다 안타깝게 죽어갑니다. 지극한 선의가 지닌 본질적 한계는 여기에 있습니다. 복서는 다른 어떤 동물들보다도 윤리적인 존재였지만, 참혹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선의와 성실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좀 더 열심히 해야지”라는 그의 좌우명에는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라는 방향성이 빠져 있습니다. 이런 맹목적인 성실성은 지배계급의 착취대상으로 찍히기에 딱 좋습니다. 복서에게는 부정적인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냉철한 지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욕망하는 존재’에게는 필연적으로 욕심과 갈등과 분노가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지 못했습니다.

복서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존재, 설사 법이 실수로 그를 감금했다 하더라도 최고의 모범수가 되어 결국엔 풀려나올 만한 존재였지만, ‘나만 잘하면 되지’라는 그의 근시안적인 세계관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분노해야 할 때 관용을 꿈꿨고, 동료들과 함께 떨쳐 일어나야 할 때 ‘조금만 더 참자’며 인내를 꿈꾸었습니다.

그의 해맑은 선의 깊숙한 곳에는 투쟁과 충돌을 피하고 싶은 현실도피의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옳지 않은 것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포기할 때, 아주 작은 목소리라도 ‘그것은 옳지 않다’고 표현하기를 주저할 때, 정의는 그만큼 더 멀어지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한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싸우기를 포기한다면, 내일 우리가 견뎌야 할 불의와 부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강자들은 생각보다 겁이 많습니다. 그들은 약자의 분노와 약자의 저항에 매우 취약합니다. 항상 ‘누구의 인내와 희생 때문에 내가 이 권력을 누리고 있는 지’를, 부지불식간에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권력의 출처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똑똑한 강자들’이고, 자신의 부와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멍청하기까지 한 악한들’이지요.

각종 추모제나 평화 시위에 대해서도 무턱대고 과잉진압부터 구상하는 권력자들은 자신이 그만큼 민중의 분노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자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강한 자들은 의외로 겁이 많고, 약한 이들은 뜻밖에 자신도 모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항하고, 절규하고, 분노할 권리. 이것이야말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힘입니다.


▎2011년 미국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탐욕적 금융자본에 맞선 시위가 전 세계로 들불처럼 번졌다. 상위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외침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고, 진보의 발걸음이었다.



거대한 낙하산을 한 땀 한 땀 꿰매는 사람들

언제부턴가 제 눈에 비친 세상은 거대한 낙하산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선장이 절대권한을 쥐고 있는 선박보다는, 낙하산의 비유가 왠지 매일매일 간신히 땅 위에 착륙하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우리의 삶에 더욱 어울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이름의 낙하산은 매일 하늘 높은 곳에서 추락합니다. 때로는 절체절명의 높이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때로는 낙하산이 너덜너덜해져 간신히 지상에 와서야 속도가 늦춰지는 위태로운 낙하산이지요.

자꾸만 이 세상이라는 낙하산에 구멍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로 낙하산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람들이지요. 자신만이 승자여야 한다고, 모두가 함께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여 타고 내려와야 하는 낙하산을 독점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이 낙하산을 내일도 무사히 쓸 수 있게 만드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소리 없이 낙하산의 찢어진 구멍을 꿰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타고 내려와야 하는 낙하산을 꿰매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공공장소를 더럽히는 사람들의 비매너에 맞서서 열심히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아무리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아도 열심히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선생님들이기도 하고, 환자의 치료보다 병원의 경영 효율성이 더 중요하다는 세상에 맞서 한 사람이라도 더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치료하는 의사이기도 하고, 세월호를 둘러싼 온 나라의 갑론을박을 뒤로 하고 그저 묵묵히 한 사람 한 사람을 구해내려 저 시커먼 바다 속 깊이 온몸을 던져 내려갔던 민간 잠수사들이기도 합니다.

난치병에 걸린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매일매일 기도하는 부모들이기도 하고, 이토록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오늘도 ‘팔리는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믿음 하나로 책의 한 면 한 면을 정성스레 다듬고 있는 편집자들이기도 하고, 방송이나 언론이 ‘국가의 끄나풀’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팔리는 언론’이 아니라 ‘올바른 언론’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기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대단한 권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세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낙하산을 꿰매고 또 꿰맵니다. 다음 날 사악한 독재자들과 불한당들이 이 소중한 낙하산에 또 거대한 구멍을 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세상이라 불리는 이 너덜너덜한 낙하산을 꿰매고 또 꿰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매일매일 나락으로 추락하는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분노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의 불의를 향하여 분노하는 것은 세상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낙하산을 꿰매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분노를 가로막는 것은 예부터 ‘자신은 분노하고 남은 분노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의 획책이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걸작 <뤼시스트라테>는 ‘남성들만의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되었던 그리스 사회의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를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남자들이 무슨 일을 하던 그저 꾹 참기만 했던 아테네의 여인들은 민회에서 매번 최악의 결정을 내리는 남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또 전쟁이라니, 이번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까. 이런 걱정을 품으면서도 아테네의 여인들은 살갑게 남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오늘 민회에서 휴전조약과 관련하여 무엇을 써넣기로 결정하셨나요?”

그러면 남편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오?” “닥치지 못해, 이 여편네가!” 시간이 흐른 후, 남편들이 예전보다 더 나쁜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들은 또 살갑게 묻습니다. “여보, 왜 자꾸 그런 어리석은 정책을 고집하세요?” 그러면 남편들은 아내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요. “실이나 짜, 이 마누라야! 머리통을 얻어맞아서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고 싶지 않으면! 전쟁은 남자들의 소관이야!”

세상을 바꾸는 힘 ‘공적인 분노’

하지만 참고 또 참던 아테네의 여인들은 마침내 폭발하고 맙니다. 이 분노한 여성들의 리더인 뤼시스트라테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여성들의 집단파업’을 외치지요. 여성들이 개인적으로, 그것도 혼자만 표출하던 ‘사적인 불평’을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 전쟁을 일삼는 남편들에게 대항하는 ‘공적인 분노’로 전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뤼시스트라테는 매우 혁신적인, 게다가 유머가 넘치는 분노의 해결법을 제안합니다.

바로 남성들의 최고의 아킬레스건인 섹스에 대한 보이콧이었습니다. 아테네 사상 초유의 ‘집단 섹스파업’으로 인해 남성들은 집단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항상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맞춰주었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집에도 돌아오지 않고, 살림도 아이들도 내팽개치고, 키스도 포옹도 해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약자들의 뜻밖의 분노에 기절초풍한 남자들은 제 분에 못 이겨 ‘여자들을 다 불태워 죽이자’는 말도 안 되는 전략을 내놓지만, 결국 ‘사랑’에 지고 맙니다. 그들은 단지 성관계의 상대로서 아내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라, 아내들이 없으면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 자체가 와르르 무너진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분노는 허약하거나 무력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격분의 표출이 아닌, 이성과 비판과 용기의 합체로서 ‘공적인 분노’가 시민의 성숙한 인식 속에서 조직될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변할 것입니다. 쉬지 않고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마침내 거대한 암반을 뚫고야 말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적들의 포악함에 맞서서 함께 포악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마저 그렇게 타락해버린다면, 세상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낙하산은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버려 다시는 지상에 착륙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적들의 사악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성과 윤리와 철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용기와 실천과 사랑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약자의 사적인 불평을 집단의 공적인 분노로 조직하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좋습니다. 아주 사소한 용기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가슴 설레며 저항을 준비하는 만큼, 미래는 밝아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당신의 분노를 응원합니다. 당신의 분노는 ‘풀어야 할 개인적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폭탄주를 마시거나, 접시를 깨거나, 온라인게임을 해서 풀어질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당신의 분노는 정의의 표현이며 불의에 대한 저항이며 더 큰 진보의 발걸음을 향한 서러움의 모닥불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미국 헌법 사본 한 부를 가지고 다니며, 미국 대법원을 포함한 여러 법정에서 사용했다. 미국 헌법에 명시된 권리장전은 칼도 되고 방패도 된다. 사람들은 권리장전을 통해 판사에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판사는 우리 대신 정부 관리가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 요컨대, 권리장전을 통해 인종이나 성별·나이·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정부와의 협정서 뿐 아니라 공존을 위한 합의문을 집행할 수 있다.” - 존 커크 보이드 <왜 분노하지 않는가>(중앙북스, 2011)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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