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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 ‘절대 침묵’의 고흐와 ‘절대 만족’의 고갱, 두 사람의 불가사의한 동행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고흐는 고갱이 가진 반역성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 의욕에 매료돼…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파괴를 통한 창조를 갈구

▎고흐가 그린 아를의 다리. 다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로 해석된다. 그러나 고흐의 다리는 중간이 들려진, 서로 오갈 수 없는 끊어진 다리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동쪽의 올리브 언덕은 성지순례의 필수 코스다. 예수의 고행과 어머니인 마리아의 그림자가 곳곳에 서려 있다. 최후의 기도를 끝낸 예수가 배신자 유다에 의해 죽음의 키스를 받은 뒤, 유대교 수비병에 넘겨진 곳도 올리브 언덕 내의 겟세마네다. 당시 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수비병 말고(Malchus)의 오른쪽 귀를 벤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복음 26장 52절) 베드로의 칼부림을 보면서 예수가 던진 말이다. 예수는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었다고 한다. 예수가 보여준 기적 중 하나다. 예수를 믿고 끝까지 보호하려던 베드로는 이후 무려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한다.

어두컴컴한 새벽녘에 벌어진 예수 체포에 관한 얘기는 로마군과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그린 것이다.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를 체포한 인물은 로마 군인이 아니라, 유대교 대제사장의 직속 수비병이다. 예수를 로마군에 넘기고,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넣은 것은 바로 유대인이다.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때문에 혼동하기 쉬운데, 사실 지난 2천여 년 동안 유럽에서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바로 그 같은 ‘원죄(原罪)’에서 비롯된 것이다.

올리브 동산의 역사를 재음미하면서 관심 있게 와 닿은 것은 말고의 ‘귀’에 관한 부분이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르고, 예수가 다시 붙여줬다는 얘기가 뭔가 상징적이다. 코·팔·다리를 베거나 눈·얼굴·가슴을 찌른 게 아니라 귀를 베었다는 것, 그리고 떨어져 나간 귀를 곧바로 복원한 기적이 예수 체포가 이뤄지던 날 일어났다. 뭔가 큰 의미를 갖고 있는 듯 느껴진다. 왜 귀일까? 왜 다른 부위가 아닌 귀가 예수 체포 때 벌어진 살벌한 분위기의 상징물으로 자리 잡고 있을까?


▎고흐 자해 이후 3일 뒤에 발간된 파리의 신문기사. 창녀에게 피 묻은 귀를 전해줬다는 엽기적인 스토리가 실려 있다.
기독교 신자들은 ‘바이블=인간의 손을 빌린 신의 생각’으로 믿고 있다. 다른 종교의 성전(聖典)이 모두 그러하듯, 바이블에 등장하는 단어와 비유 하나에도 특별한 의미가 드리워져 있다. 가령 베드로가 말고의 ‘팔’을 칼로 찔러 피가 흘러 넘쳤다고 가정해보자. 예수가 팔을 다시 붙여주면서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고 말하는 것이 뭔가 어색하게 와 닿지 않을까? ‘왜 귀일까?’에 대한 답은 신학적 차원에서 다뤄질, 형이상학적 영역의 문제일지 모르겠다. 굳이 원론적으로 풀이하자면, ‘말하기 전에 귀로 듣고, 흘려듣는(Hear) 것이 아닌 머리로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들어야(Listen) 한다’는 메시지가 포함돼 있을지 모르겠다.

1888년 12월 23일 ‘프로방스 엽기 사건’

말고의 귀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전혀 다른 시대의 또 다른 인물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19세기 말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다. 귀가 잘려진 인물이다. 고흐 자신이 그린 자화상에서 보듯, 잘려진 왼쪽 귀 부분이 붕대로 감겨져 있다.


▎고흐의 자화상. 그는 자화상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칼에 의해 귀가 잘려진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인물’은 말고와 고흐 두 사람에 그치지 않을까 싶다. 전쟁을 통해 귀를 잃은 사람, 사고로 귀에 상처를 입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은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을 포함해 잘린 귀 자체로 세상에 알려진 캐릭터는 전무하다. 흥미롭지 않은가? 반 고흐의 귀와, 2천여 년 전 예수 체포 당시 보여준 기적의 대상으로서의 귀가 갖는 공통분모가 신비롭지 않은가?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1888년 12월 23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아를(Arles) 마틴(2 Rue de la Martine)에 있는, 방 두 개짜리 공간이다. 론강(Le Rhone)에서 100m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벽이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에 ‘옐로 하우스(Yellow House)’로 불렸다. 지금은 박물관이 들어서 있지만, 고흐가 남긴 유화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월세는 15프랑. 19세기 말 파리 일용직 근로자의 하루 급여가 5프랑 정도였다. 옐로 하우스는 주인인 고흐와 손님으로 온 폴 고갱이 머물고 있었다.

“여기를 떠날 생각인가?” 고갱에게 고흐가 물었다. “그렇다. 지금은 여기에 있지만, 때가 되면 언제든 떠날 생각이다.” 고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신문 지면에 실린 작은 기사를 하나 찢어 고갱에게 건넸다. ‘살인자가 탈출했다’란 제목을 단 뉴스다. 고갱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곧바로 일어났다.

식사 후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저녁 8시쯤이다. 고흐는 그대로 집에 머물렀다. 고갱이 밖으로 나가 강변으로 올라서려던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흐였다. 가까이 다가서자 고흐는 도망치듯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고흐는 오른손에 날카로운 면도용 칼을 쥐고 있었다. 고갱은 산보를 마친 뒤 고흐집 근처의 호텔로 갔다.

밤 10시 방안에 있던 고흐는 비명을 참으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도려냈다. 고흐는 이미 1년여 전부터 환각 증세에 빠져 있었다. 쉽게 말해 미친 상태다. 뭔가에 쫓기듯, 예리한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냈다. 비명과 함께, 방 안 전체가 피범벅이 된다.

떨어져 나간 귀를 신문지에 싸서 밖으로 갖고 나갔다. 출혈이 이어지는 귀 부분을 손으로 감싼 채 10분여 강변 쪽으로 걸어가다 평소 지나치던 사창가를 발견한다. 10대 소녀 레이첼(Rachel)이 문밖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고흐는 레이첼을 본 순간 자신이 들고 있던, 피에 젖은 신문지를 넘긴다. “이 물건을 아주 조심스럽게 보관해라!” 내용물이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고흐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고통에 못이긴 고흐는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진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고갱은 호텔에서 일어나 고흐의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집밖에 몰려 있고, 경찰이 오가는 것을 목격한다. 고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직감한다. 방안으로 들어가자 피투성이인 고흐가 침대 위에 쓰러져 있다. 경찰은 고흐가 숨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고갱이 귀를 기울여 고흐의 약한 숨소리를 찾아낸다. 경찰에게 병원으로 옮길 것을 부탁한다. 나중에 눈을 뜨면 자신은 파리로 돌아갔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경찰에게 남긴다.

126년 전인 1888년 12월 23일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 10시쯤까지 벌어진 상황을, 당시 아를 경찰의 신문조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해봤다. 고흐의 자해(自害) 사건은 아를의 주말신문인 <레푸부리칸 포럼(Le Forum Repubulicain)>에 실린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가 자신의 귀를 잘랐다’라는 식의 ‘엽기적’ 사건보도다. 신문에 실리는 즉시 화젯거리가 된 것은 물론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전날+화가+네덜란드+면도칼을 통한 자해’는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속의 일부처럼 와 닿는다.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한 엽기 스토리는 사건 발생 3일 뒤인 12월 26일, 파리의 일간지<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도 게재된다. 사건 관련보도 지면의 4분의 1 정도가 할애됐다. 지방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이지만,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파리까지 날아가 ‘대서특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100여 점의 그림 중 단 한 편만 팔려

당시 신문 기사를 읽어보면, 면도칼과 신문에 쌓여진 잘려진 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와 사창가 소녀 등의 흥미진진한 요소가 배합돼 있다. 추측컨대 당시 아를 발(發) 기사를 읽은 파리지앵(Parisien)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을 듯하다.

먼저 사창가가 즐비하고 집시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의 변경, 프로방스 지역에 대한 편견이다. 16세기 이래, 유럽 전역을 떠돌며 화가로 연명해온 가난한 네덜란드인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무식한 곳에서 벌어진, 가난한 사이비 화가의 광분’ 정도가 도시민 파리지앵의 일반적 반응이었을 듯하다.

고흐는 생전에 무려 860여 점에 이르는 유화를 남겼다. 데생까지 포함할 경우 대략 2100점의 작품이 남아 있다. 습작으로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서른 살이 되면서부터다. 고흐는 3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따라서 2100점의 그림 대부분은 7년간 이뤄진 작품이다. 산술적으로 볼 때 마지막 인생 7년간, 대략 하루 평균 1점의 그림을 그린 것이다.

어마어마한 노력이 뒷받침된 엄청난 양의 그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고흐가 판 그림은 단 한 점의 유화에 그친다. 그나마 친구가 사준 것이다. 고흐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예술가로서가 아니다. 동생 테오(Theo)가 형의 예술성이 곧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고 수없이 격려했지만, 고흐가 만난 세상과의 첫 만남은 ‘광인(狂人)’이란, 거의 범죄자 수준의 캐릭터에서 출발한다.

고흐와 고갱은 예술사에 나타난 보기 드문 멘토·멘티의 관계라 볼 수 있다. 우열이 없는, 서로에게 멘토이자 멘티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고흐가 멘티, 고갱이 멘토다. 두 사람의 첫만남은 1887년 파리의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흐가 34세, 고갱이 39세다. 머리가 굳어지기 쉬운 나이지만, 대화와 그림을 통해 서로의 장점과 시각을 배우고 흡수한다.

세기말의 두 사람은 인생을 통틀어 실패를 거듭해온, 이른바 사회에서의 ‘루저(Loser)’에 해당된다. 원래 목사를 지망한 고흐는 교회에서 쫓겨나 갈 곳을 잃게 된다. 파리에서 그림중개상을 하던 동생과 함께 일할 생각이었지만, 현실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28세가 되던 1881년, 고흐는 인생을 그림에 걸기로 작정한다.

테오의 격려와 지원 약속이 가장 큰 힘이 된다. 1886년 봄, 아예 거처를 파리로 옮겨 새로운 예술세계를 체험한다. 몽마르트르에 가서 유럽에서 모인 화가들을 만나 그들의 예술세계를 피부로 느낀다. 그러나, 담배와 술에 빠지면서 몸과 정신이 쇠약해진다.


▎사람과의 접촉이 드물었던 고흐 그림은 자연이 대부분이다. 맨 오른쪽 여성의 그림은 매일 동생 테오의 편지를 전해준 우편배달부 부인의 모습이다. 고흐가 대화를 나눴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장발장으로서의 고갱, 교회 수도사로서의 고흐

고갱은 해운 비즈니스에 몸담은 아버지를 따라 페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탁월한 감각으로 파리 금융계에 들어가 주식 전문가로 일한다. 돈이 넘치고 미래가 보장되는 듯했지만, 1873년 유럽에 불어닥친 금융공황을 맞아 실직한다. 25세 때다. 직업을 잃으면서 덴마크 출신 부인은 이후 자식과 함께 파리를 떠난다.

혼자 남은 고갱은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일요동우회에 가입하다가, 아예 평생직업으로 받아들인다. 고흐, 고갱 모두 그림을 전문으로 한 경력이 없다. 사회에서의 루저로, 별로 할 것도 없던 중 예술에 매진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돈도 커리어도 없는 상황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수단으로 예술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고흐가 고갱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시작된다. 고흐가 동생의 ‘전적인 도움’으로 파리에 머문 지 4년째 되던 해다. 고갱을 동생과 함께 만난다. 고흐가 관심을 가진 그림은 고갱이 남미 산 피에르 마르티니크(Saint-Pierre Martinique)에 머물 당시 유화다.

파나마 근처의 작은 섬으로, 1887년 여름 고갱이 친구와 함께 놀러갔다가 그린 그림이다. 남미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섬에 거주하던 인도인의 영향이 깃든 이국적 컬러와 분위기의 그림이다. 고흐는 동생 테오를 통해 파리에서 실험되는 새로운 화풍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늦게 화가의 세계로 들어온 만큼 변화에 적극 대응하면서 배우려는 욕구가 강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갱의 화풍은 당시 보기 드문 상징주의와 표현주의가 투영된 신비로운 작품이다. 고갱은 19세기 말 풍미하던 인상주의 그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당시 이미 인상주의 화가로 이름을 떨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늦은 나이에 화가에 입문한 고갱의 스승 중 한 명이다. 인상주의 그림은 19세기 말 파리 시민들을 열광케 하는, ‘돈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고갱은 인상주의 화풍을 경멸하면서 독자적인 그림에 열중한다. 산 피에르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20여 점의 그림은 바로 그 같은 독자노선의 증표다.

고흐와 만난 고갱은 곧바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고흐는 고갱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대해나간다. 고갱은 고흐의 정열을 대하면서 자신의 그림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물론, 동생 테오가 파리의 그림중개상이란 점은 고갱이 고흐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두 사람은 만나는 즉시 자신들의 자화상을 교환한다.

고흐의 경우 특히 고갱이 가진 반역성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 의욕에 매료된다. 고갱은 스스로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Le Miserables)>의 주인공 장발장(Jean Valjean)이라 생각했다. 구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내는, 장발장과 같은 자세로 자신의 그림을 개척해나간다. 고갱이 고흐에게 준 당시의 자화상은, 부제(副題)로 ‘레 미제라블’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이방인, 반역자 그리고 파괴를 통한 창조자가 고갱이 믿고 추구한 삶의 방향이다.

고흐는 고갱의 그 같은 자세와 생각을 존경하고 동경했다. 이유는 고흐 자신이 그런 성향과 전혀 멀리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자신을 교회의 수도사 정도로 생각했다. 이반이나 파괴를 통한 창조는 꿈도 꾸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흐는 26세 때 벨기에 탄광의 임시 목사로 파견된다. 광부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목회생활을 하지만, 기복이 심한 성격 탓으로 교회 목사 자리를 잃게 된다.

고흐는 독실한 개신교 집안을 배경으로 한다. 고흐를 목사로 만들려던 삼촌은 네덜란드 신학계의 거두(巨頭)이기도 하다. 신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임시 목사직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지만, 절대자 신을 추종하는 사제로서의 마음가짐이 고흐의 근본에 해당된다. 예술을 대하는 고흐의 입장은 신과 신학에 대한 자세와 비슷하다.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인상주의 화풍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상주의 화가로 유명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기존의 질서를 지키면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식이다. 장발장으로서의 고갱과, 교회 수도사로서의 고흐는 서로간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완충역할을 한다.

고흐와 고갱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 중 하나가 두 사람의 동성애 여부다. ‘고흐는 게이(Gay)가 아닌가?’라는 의문은 미술계는 물론 의학계, 인문학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부분 중 하나다. 두 사람이 보여준 남다른 친밀감은 그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다.


▎고흐, 고갱 두 사람의 동성애 관계 여부는 미술사가와 정신의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라고 주장하는 곳은 게이(Gay) 지지단체들이다.
아를 옐로 하우스에서 함께 보낸 약 두 달간의 시간과 면도날 자해를 둘러싼 배경이 동성애 소문의 진원지에 해당된다. 고흐는 아를에 정착하는 즉시 고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고흐 자신이 ‘남부의 스튜디오’로 부른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그림도 함께 그리자는 제안이다.

서로 마주 보며 배치된 고흐, 고갱 작품들

서로를 지도하고 배우는 예술가들의 공간 공동 활용은 19세기에 나타난 예술 트렌드 중 하나다. 정보를 교환하고 그림을 팔 곳을 함께 모색하는 식의 공동전선이 화가 사이에 유행한다. 파리 근교 몽마르트르 언덕은 그 같은 예술공동체의 상징이다. 스페인의 피카소,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네덜란드의 고흐가 몽마르트르를 거친 이유는 경제적 궁핍과도 관련돼 있다. 지금도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원래 이 언덕은 사창가와 싸구려 여관이 즐비했던 곳이다.

당시 고갱은 딱히 갈 곳도 없던 처지였다. 고흐의 제안을 받아들여 곧장 아를로 내려온다. 고갱은 고흐와 달리 친구도 많고, 부인과 자식도 가진 인물이다. 고흐는 동생 외에는 대화 상대가 없던 철저한 외톨이였다. 아를까지 찾아온 고갱을 고흐가 얼마나 소중하게 대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흐는 거의 매일 긴 숙제처럼 6쪽에 달하는 편지를 써왔다. 생전에 무려 200통의 편지가 테오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고갱이 머물면서 편지는 중단된다. 고갱과 함께 있던 동안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13통에 불과하다. 대략 6일에 한 통씩 보낸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애로 보는 사람들은 고흐의 고갱에 대한 무서운 애착을 남과 여의 관계로 해석한다. 고흐가 여성, 고갱이 남성이다. 고갱을 동성애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동생에게 보내던 편지도 뜸해졌다는 것이다. 귀를 스스로 자른 것은 자신과 헤어지려는 고갱에 대한 ‘연정(戀情)’의 증표라는 것이 동성애 논리의 근거로 제시된다.

고흐와 고갱이 동성애 관계였는지 여부를 떠나 미술관에 전시된 고흐의 작품들은 항상 고갱을 마주본 상태로 배치된다.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뮤지엄(Musée d'Orsay), 워싱턴의 국립예술미술관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미술관의 대부분은 두 사람의 그림을 정면 대칭 형식으로 배열한다.

고흐 전시관은 전 세계 미술관을 통틀어 21세기 최고 인기의 그림에 속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이 있다면 가장 먼저 들르겠지만, 한정된 작품 수로 인해 전시된 미술관이 손꼽을 정도다. 19세기 부르주아 출현과 함께 나타난 인상주의 전시관은 다빈치에 버금가는 인기 최고의 명화다. 고흐의 그림은 인상주의 전시관 안에서도 가장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826호실은 미술관 전체를 통틀어 관람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고흐 전시관이다. 바로 옆에 피카소·르누아르·드가의 전시관이 있지만 고흐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고갱의 그림은 826호실 내 고흐 그림의 반대쪽 벽에 걸려 있다.

고갱에 대한 관람객들의 관심도는, 고흐에 비해 10분의 1도 안 된다. 고흐의 그림을 배경으로 해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있지만, 고갱의 그림은 거의 무시된다. 826호실은 고흐의 자화상을 중간에 세워둔 구도로 이뤄져 있다. 전시관 중간에 받침대를 만들어 그림을 세워둔 것은 메트로폴리탄 전체를 통틀어 극히 드문 배치다.

고흐의 자화상은 1885년 작품으로, 밀짚 모자를 쓴 모습을 하고 있다. 왼쪽 귀가 손상되기 전의 모습이다. 고흐 특유의 화풍을 엿볼 수 있는, 굵은 선으로 길게 이어진 두껍게 칠해진 그림이다. 미술사가들은 고흐를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규정한다. 이유는 두껍게 칠해진 굵고 긴 선에 있다.

원래 인상주의라는 말은 점(点)으로 표현된, 보일 듯 말 듯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인상(印象) 해돋이>라는 그림에서 유래됐다. 모네의 점은 이후 다른 화가에 의해 선(線)으로 발전된다. 신인상주의의 창시자인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는 늘려진 선으로 독특한 화풍을 개척해나간다.

고흐는 늘려진 선을 한층 더 두껍고 길게, 나아가 곡선으로까지 확대한 화가다. 모자이크 그림처럼 느껴지던 쇠라의 화풍을 한층 대담하게 변화시킨 것이다. 고흐 전시관 어딘가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쇠라의 그림이 걸려 있다. 고흐의 그림에 영향을 준화가라는 의미다.


▎고흐 자화상 맞은편에 있는 고갱의 아들 에밀 두상. 어릴 때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고갱, 야자수·난초의 ‘냄새’를 표현

고흐는 전부 4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고흐의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그림 전체가 강렬하고 처절하게 변해간다. 고흐의 그림은 단 한번만 봐도 강하게 남는다. 그 어떤 그림에게서도 찾기 어려운 강한 중독성이 특징이다. 고갱이 만든 대리석 두상(頭像)은 고흐의 자화상 반대편, 약 2시 방향에 들어서 있다. 역시 돌출된 받침대 위에 특별히 전시돼 있다. 작품명은 <에밀 고갱(Emile Gauguin)>이다. 고갱의 아들이다. 29세 때 만든 초기 조각품이다.

고갱은 유화만이 아니라, 조각에도 손을 댄 전천후 예술가다. 대리석에 손을 댄 것은 집주인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다. 당시 파리에서 조각가로 이름을 날린 폴 브이요(Paul Bouillot)다.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조각을 배우고, 자식을 모델로 한 작품도 만든다. 집주인이 아닌, 고갱이 진짜 제작자인지에 대한 여부가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고갱이 남긴 다른 조각품들을 보면 모든 분야에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826호실은 자화상 두상 외에도 전부 20여 점의 그림이 걸려 있다. 고흐와 고갱의 작품들이 서로 마주보면서 배치돼 있다. 고갱의 그림은 대부분 폴리네시아

령(領)인 타히티(Tahiti)섬에서 그린 원주민 여성들에 관한 것이다. 상징주의 기법에 의해, 인물의 표정이나 자세에 신비함과 원시성을 표현한다. 고갱은 사물·풍경·사람을 직접 보면서 화폭에 담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진짜 그림이라 믿었다. 따라서 고갱은 풍경화를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에 서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대부분 방안에서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비해 고흐는 눈으로 직접 보고 발로 뛰는 그림이 진수(眞髓)라고 여겼다. 자연을 그리기 위해 직접 산과 들로 찾아가고,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 사람을 눈앞에 두고 오랫동안 관찰했다. 타히티를 배경으로 한 고갱의 그림은 열대지방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흙에서 묻어나는 독특한 냄새로 버무려져 있다.

그림에 문외한인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고흐의 그림이 절규나 신음과 같은 ‘소리’라 할 때, 고갱은 열대 특유의 야자수나 강렬한 빛깔의 난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냄새’라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이 밖에도 고갱의 경우, 여성 특히 타히티의 젊은 여성을 소재로 한다는 데서 고흐와 다를 듯하다.

고흐의 주된 소재는 자연이다. 정물화나 풍경을 주로 하지만, 간혹 사람을 소재로 한다고 해도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장로(長老), 아니면 아예 어린아이를 소재로 한다. 수염을 기른 우체국 배달원이나, 그의 부인과 자식에 관한 인물화가 대표적이다.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고흐의 그림은 극히 드물다. 고흐를 동성애자로 규정하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가진 갖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공통점을 빼놓을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자화상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흐는 고갱이 떠난 뒤 옐로 하우스에 머문다. 귀 주변 치료가 성공리에 끝나지만, 곧이어 환각과 착시로 고생한다. 정신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는다. 1889년 3월 집주인과 주민 30여 명이 나서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한다. 고흐는 이미 붉은 머리의 미친 네덜란드인이라는 오명과 함께, 정신이상자로 낙인 찍힌 상태였다.

1889년 5월, 고흐는 스스로 정신병원 ‘생 폴(Saint Paul)’을 찾아간다. 아를에서 북동쪽으로 30㎞ 떨어진, 생 레미드 프로방스(Saint Rémy de Provence)에 있는 정신병원이다. 방 두 개 짜리 병동에 있는 동안 1주일에 2~3개의 유화를 완성한다. 병원 내 풍경과 병원에서 만난 사람 등 고흐가 접한 모든 것을 그림 속에 담는다.


▎고갱의 그림 속에 나오는 타히티의 젊은 여성들 대부분이 고갱과 내연 관계에 있었던 현지인이다. 고흐와 달리 외롭지 않고, 너무 많은 연으로 인해 평생을 어렵게 산 인물이 고갱이다.
일생을 통해 고흐가 가장 많은 그림을 그린 곳이 바로 산 폴 정신병동이다. 1년이 지난 뒤 1890년 5월 고흐는 다시 장소를 옮긴다. 몸이 한층 더 나빠지면서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 sur Oise)로 옮긴다. 파리 요양원으로 옮긴지 2개월 뒤인 7월 29일, 총으로 가슴을 쏴 자살한다.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는?

고갱은 고흐가 세상을 떠난 이후 13년간 더 생존한다. 고흐가 숨진 이듬해인 1891년 4월 폴리네시아 섬으로 떠난다. 파리로 돌아온 뒤, 타히티에서의 기억을 담은 <노아 노아(Noa Noa)>란 제목의 책을 발간한다. 그림도 끼어 넣어, 이국적 분위기를 풍긴 책으로 평가됐지만, 돈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1895년 7월, 다시 파리를 떠나 타히티로 간다.

이후 다시는 프랑스 땅을 밟지 못한다. 당시 유럽열강의 남성들 모두가 그러했듯이, 이국 땅에 간 고갱은 현지 원주민 여성과 동거한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씩 바꿔가면서 관계를 갖는다. 타히티를 배경으로 한 그림 속 젊은 여성의 대부분은 고갱의 동거녀들이다. 이들 사이에서 자식도 태어난다.

고갱이 작은 섬에 머문 것은 여성만이 아닌, 경제적 이유에서이기도 하다. 그림이 생각만큼 안 팔렸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항상 궁핍했다. 현지 여성과의 문제로 불화를 빚다가 형사소송에 휘말려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1903년 5월 8일 고갱이 54세 되던 때 급성 매독균으로 세상을 뜬다.

고흐의 작품들이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고갱은 고흐의 그림이 비싸게 팔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바라기 시리즈는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다. 고흐가 고갱을 위해 옐로 하우스 고갱의 방에 걸어둔 그림이 해바라기다. 고갱이 찬사를 보내며 좋아했기에 혼자 남은 동안 해바라기 그림만 집중적으로 그린다. 굵은 선과 강렬한 노란색으로 표현된 해바라기는 고갱의 찬사와 평가를 통해 진화된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고흐 그림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해바라기 시리즈의 유화에서 시작된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은 올리브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인지 모른다. “칼을 든 자 칼로 망한다”고 말했듯이, ‘일단 화가로 나선다면 화가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의 귀를 잘랐을지 모르겠다.

세계적 미술관 내의 고흐 전시관에 들를 경우 두 가지 사실을 유심히 살펴보길 권한다. 언제 그려진 유화인지, 반대편 벽에 걸린 고갱의 그림이 어떤 것들인지에 관한 부분이다. 1890년 7월 세상을 뜨기 몇 년 아니 몇 주, 몇 일 전에 그려진 그림인지, 고갱 그림 속의 타히티 여성들이 왜 하나같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지에 관한 면밀한 관찰이다. 절대 고독 속에 살았지만 외로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던 네덜란드인과 절대 만족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다가 열대섬에서 객사한 프랑스인의 상반된 모습이 그림 속 어딘가에서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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