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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왕도를 말하다 | 토지 공개념을 촉구한 ‘백성의 친구’ 서경덕 

 

박종평 역사비평가, 이순신 연구가
유한한 자원인 토지의 공공성에 입각해 왕릉 확대에 반기…백성은 삶이 고될수록 그를 구원자로, 신통력을 지닌 흥미로운 인물로 포장

▎서경덕은 학파를 형성하지 않았기에 따로 영정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개성 정몽주 집터에 세워진 숭양서원에 제향(祭享)됐다.



허균(許筠)은 서경덕(徐敬德, 1489~1546)과 황진이(黃眞伊)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선비와 기생의 관계이지만, 흔한 조선 시대의 속된 야담과는 차원이 다르다. 눈물과 콧물, 정한(情恨)이 넘쳐나는 러브 스토리도, 또 고상한 플라토닉 러브 스토리도 아니다. 일어난 일의 기록과 다름없다.

“진랑(眞娘, 황진이)은 개성의 맹인 딸이다. 성품이 남자처럼 자유로웠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도 잘했다. (…) 화담(花潭, 서경덕)의 사람됨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을 갖고 화담의 농막에 가서 한껏 즐긴 뒤에 떠나갔다. 매번 ‘지족선사(知足禪師)가 30년 동안 면벽(面壁) 수도했지만 나는 그의 지조도 꺾었다. 그러나 화담 선생만큼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어도 끝내 관계하지 않았다. 참으로 성인(聖人)이시다’라고 말했다. (…) 진랑은 일찍이 화담에게 ‘송도(松都)에는 세 가지 빼어난 것(三絶)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화담이 무엇이냐고 묻자, ‘박연폭포(朴淵瀑布)와 선생님과 소인(小人)입니다’라고 답했다.”

황진이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다. 그는 뛰어난 미모와 노래 실력, 시가(詩歌)에도 능했기에 조선 시대 최고의 기생이라고 평가된다. 성리학을 이상으로 삼고 자기수양을 했던 숱한 선비도 그녀 앞에서는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적나라하게 이중성을 드러내며 무너졌다. 그 자신의 말처럼 30년 동안 수도를 하면서 ‘살아 있는 부처’라는 평가를 받았던 지족선사까지도 굴복해 파계했다. 그런 그도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에게는 항복하고, 오히려 찬사를 보냈다.

절세가인의 유혹을 극복한 서경덕은 스스로 관직을 멀리하고, 학문 탐구에 평생을 보낸 선비다. 특히 자연 속에 살며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며, 자연에 삶을 맡긴 탈속(脫俗)한 철인(哲人)이다.

서경덕처럼 산림에 은거하며 양심을 지키고 몸을 닦으며, 권력에 굴종하지 않았던 선비를 ‘유일(遺逸)·은일(隱逸)·거사(居士)·고사(高士)·방외지사(方外之士)·일사(逸士)·징사(徵士)’ 등으로 부른다. 서경덕 스스로는 ‘일민(逸民, 숨어 사는 백성)’이라고 했고, 조식(曺植, 1501~1572)은 ‘처사(處士)’라고 했다. 산림처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성수침(成守琛, 1493~1564)·성운(成運, 1497~1579)·정렴(鄭磏, 1506~1549)·이지함(李之菡, 1517~1578)·최영경(崔永慶, 1 529~1590)·정개청(鄭介淸, 1529~1590)·성혼(成渾, 1535~1598) 등이 있다.

이들은 생계의 방편이나, 출세의 도구였던 과거급제를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공부한 학문도 다양했다. 성리학을 주로 탐구했지만, 이단으로 취급받았던 노장사상과 양명학까지도 연구했다. 또 현실을 벗어나 살았지만, 현재를 살았기에 실용적인 학문인 천문학·지리학·역법을 공부했다. 심지어는 오랜 평화에 젖은 나라에서는 불필요했고, 무인(武人)을 평가절하하던 시대였음에도 병법(兵法)까지도 공부했다.

영원한 진리를 담은 자연을 탐구

그들은 관직에 관심을 두지 않았거나 스스로 멀리했지만, 그들에겐 끊임없이 관직이 주어졌고, 때때로 개별적인 성향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다. 특히 관직과 완전히 결별하며 살았던 산림학자들 중에서도 서경덕과 조식의 사례는 또 다르다. 서경덕은 세상 일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족(自足)하면서 자연과 자신의 학문 세계만 추구했다. 반면, 조식은 관직을 멀리하고 은둔했지만, 세상살이에는 관직 자체보다는 비평이라는 수단을 통해 적극 참여했다. 그는 항상 귀를 열고 세상사를 들었고, 때때로 불의에 대해 울림이 있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들처럼 선비들이 산에 숨은 원인은 사화(士禍)다. 조헌(趙憲, 1544~1592)은 대표적인 사례를 이렇게 언급했다. “사화가 혹심했기 때문에 기미를 아는 선비들은 모두 출처(出處)에 대해 조심했다. 성수침은 기묘의 화란이 있을 것을 알고 성안 시장에 숨었고, 성운은 동기 간의 슬픔을 당하고서 보은에 숨었으며 이황(李滉, 1501~1570)은 동기가 화를 입은 것을 상심하여 예안으로 물러났고,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아우 백령이 어진 이를 해치는 것을 보고 놀라 외지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또한 서경덕이 화담에 은둔한 것과,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벼슬에 뜻을 끊은 것과, 조식(曹植)·이항(李恒, 1499~1576)이 바닷가에 숨어서 살았던 것 등은 모두 을사년의 사화가 격분시킨 것이다.”

서경덕도 마찬가지다. 그는 어려서부터 죽기 직전까지 조선시대 최악의 4대 사화를 모두 지켜봤다. 열 살 때인 1498년에는 김일손(金馹孫) 등의 신진 선비들이 훈구파에게 화를 당한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16세 때인 1504년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 31세 때인 1519년에는 기묘사화(己卯士禍), 58세로 그가 죽기 1년 전인 1545년에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그는 사화로 시작해 사화로 끝나는 질풍노도의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았다.

반복되는 엄청난 사화가 그를 은둔하게 만들었지만, 사화만이 그를 은둔 선비로 만든 것만은 아니다. 서경덕도 젊었을 때는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또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고자 하는 어머니의 명령으로 과거시험을 보기도 했다. 그 결과 43세에 생원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고, 그 직후 어머니의 승낙을 얻어 관직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이 세속의 출세가 아니었고, 그 자신의 성향이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는 자연을 탐구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았고, 자신의 한계와 분수 속에서 살려고 했다.


▎개성 박연폭포 너럭바위 위에 새겨진 황진이의 시. 황진이는 ‘박연폭포’를 예찬하는 한시를 남겼다.



화담의 인생을 바꾼 <대학>의 한 구절

율곡 이이(李珥)는 서경덕과 이황의 학문에 대해 “서경덕은 자득지학(自得之學), 이황은 의양지학(依樣之學)을 했다”고 평가했다. 서경덕은 사색으로 스스로 터득하는 방식의 공부를 한 사람이고, 이황은 옛 학자의 글을 연구하는 방식의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서경덕과 이황 시대의 학문은 대부분 송나라나 명나라에서 수입된 학문이었다. 성리학도, 양명학도, 기타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새로운 학문이 수입되면 제대로 가르쳐줄 스승이 없었다. 대부분의 학자는 독학 혹은 상호토론으로 각자의 학문을 세워나갔다. 이황도 젊은 시절 홀로 <주역>을 공부하다가 몸을 망쳤다고 했지만, 서경덕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서경덕의 경우는 이황과도 달리 책보다는 자연과 사물 자체에 관심을 뒀기에 더욱더 심했다.

두 사람의 공부 방법을 옛 학자들과 비교해보면, 이황은 공자(孔子)가 <주역>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 책을 반복해서 읽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방식이다. 서경덕은 관찰과 사색을 중시했다. 이 방법은 불교의 선(禪)수행과 비슷하지만, 그 목적이 다르기에 방법론도 달랐다.

불교에서는 득도(得道)·해탈(解脫)을 추구했기에 명상을 통해 생각을 지워가는 방법 혹은 사물 자체를 잊는 방법에 방점이 있지만, 서경덕은 자연의 법칙을 알려고 했기 때문에 사물 자체에 흠뻑 빠져 사물과 하나가 되는 방법에 방점이 있다. 목적과 접근 방법이 달랐기에 그는 변함없는 우주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조선 유학사에서 전례가 없는 독보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학문에 대해 이렇게 선언했다.

“(자신이 쓴 성리학에 관한 글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며) 이 글은 표현은 비록 졸렬할지 모르지만 여러 성현이 전하지 못한 내용을 내가 본 것이다. 후대에 전하고 중국과 오랑캐에게 널리 알려 우리나라에도 학자가 나왔음을 알게 하라.” 이황이 책을 통해 학습하고 중국 성리학을 심화·발전시켰다면, 서경덕은 고래의 전통적 학습방법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자연의 법칙을 찾아낸 사례다.

서경덕이 일화와 수학(數學)에 탁월했던 점을 보면, 한 세대 후 인물인 근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560)와 아주 비슷하다. 데카르트는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선 중기의 선비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남긴 서경덕의 일화에도 데카르트처럼 의심과 의문을 던지며 사색하는 어린 서경덕이 나온다.

집안이 아주 가난해 춘궁기 때면 나물을 캐는 일이 빈번했는데, 어린 서경덕의 광주리는 항상 비어있었다. 나물을 캐러 갔다 온 그의 빈 바구니는 바로 ‘의문’ 때문이었다. “나물을 캐고 있을 때, 어떤 새가 날아올랐습니다. 그제는 땅에서 한 치 높이로 날아올랐고, 어제는 두치 높이로 날아올랐습니다. 오늘은 세 치 높이로 날았습니다. 그 새가 어떻게 날아오르는지 지켜보고, 그 이치를 생각해 보느라 나물을 캐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본 의문을 그는 평생의 화두로 삼았다. 그가 노래한 ‘존재하는 만물(유물, 有物)’의 두 구절이 그것이다. “묻노니 그대는 처음에 어디에서 왔는가(爲問君初何所來).” “묻노니 그대는 어디로 돌아갈 건가(爲問君從何所歸).” 그 해답을 찾아 그는 어릴 때부터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의 이치에 관심을 뒀다. 독서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황진이는 학문적으로도 서경덕을 흠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TV 드라마 <황진이>의 한 장면.
그런 그가 책 대신 관찰과 사색의 길을 선택해 몰입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세 때 읽었던 <대학(大學)>의 한 문장 때문이다. “앎을 이루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규명함에 있다(格物致知).” 그는 그 즉시 “학문을 하는데 사물의 이치를 먼저 궁구하지 않으면 독서한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라며, 독서를 통한 학문 탐구 대신 사물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사색적 방법을 선택했다. 사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이고 밤낮 그 글자를 바라보며 그 원리를 깨닫게 될 때까지 생각했다. 그는 6년 동안 그런 식으로 공부한 뒤 어느 순간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사색에서 얻은 분수와 멈춤(止)의 지혜

사색은 다른 한 측면에서는 불교의 면벽 수행, 혹은 오늘날의 명상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과도 연결된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깃털처럼 여기는 마음도 생겨나게 한다. 서경덕의 글에서 자주 언급되는 ‘분수를 알고(知), 분수에 머무는 것(止)’은 바로 그런 사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무릇 천하 만물과 모든 일은 각기 그 ‘머무는 곳’이 있다. 당연히 각자 바른 위치에서 머물러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은혜에서 머물고, 임금과 신하는 의로움에서 머무는 것은 모두 본성에서 나온 것이고, 만물의 법칙이다(夫天下之萬物庶事, 莫不各有其止. 當知各於其所而止之, 如父子之止於恩, 君臣之止於義, 皆所性而物之則也).”

그에게 학문, 즉 배움은 바르게 멈출 때와 장소를 알기 위한 것이다. 그가 멈추려 한 곳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지점이다. 그래서 그는 간명하게 은혜에 머무는 관계와 의로움에 머무는 관계를 만물의 법칙이라고 한 것이다.

그는 하급 무관(武官) 집안 출신이었다. 할아버지는 종9품 무관인 부사용(副司勇), 그의 아버지는 종8품 무관인 수의부위(修義副尉)였다. 그러나 서경덕은 어머니 한씨가 공자(孔子)의 묘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태어났기 때문인지 칼과 활의 세계가 아닌 붓의 세계, 학문의 세계 속에 평생을 살았다.

중종 14년인 1519년, 31세의 서경덕은 학문이 높은 선비들을 조정에 불러들이는 추천·발탁제도인 현량과(賢良科)에 120명의 한 명으로 천거됐지만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1544년 서경덕은 대제학 김안국(金安國, 1478~ 1543)의 추천으로 조선 2대 임금인 정종릉을 관리하는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됐으나 이를 사양했다. 사직상소문인 ‘중종에게 올린 사직상소(擬上中宗大王辭職疏)’에서 사직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신은 본래 어리석은 선비이고, 산과 들판에서 자라나 곡식과 과일을 가꾸며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거기에 가난이 겹쳐 성근 음식이나 나물국까지도 끼니에 대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몸이 일찍이 쇠약해졌고 병까지 걸렸으니 신의 나이 쉰여섯이지만 일흔 살의 노인과 같습니다. 스스로 쓸 데가 없음을 알고 있으니(自知無及於用), 타고난 것처럼 숲과 샘물 사이에서 정양하면서 남은 삶을 보전함이 좋습니다. 그것이 제 분수에 맞는 일입니다.”

그가 스스로 쓸데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은 세상 경영에 적합하지 않은 자신의 능력과 성향이라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개성 유수 심언경(沈彥慶)에게 준 시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이 ‘일민(逸民)’으로 사는 이유는 ‘나라를 바로잡고 세상 풍속 따를 재주가 없기(無才醫國趨風土)’ 때문이라고 했다.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로 꼽히는 박연폭포.



백성의 더위를 식혀줄 ‘부채론’

그런 그도 젊은 시절 한때는 분명히 다른 선비들처럼 세상을 경영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심의지(沈義之, 1475~?)에게 준 시에는 “뛰어난 재주 배우려고 천금(千金)도 아낌없이 썼고, 지난날의 장한 뜻은 임금님 신하 되려 하였다네(屠龍不惜千金破, 壯志當年期帝佐)”라고 했다. 또 ‘감회를 읊음(述懷)’이란 시에서, “공부하던 옛날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뜻을 두기도 했다(讀書當日志經綸)”라고 노래했다.

욕망이 지배한 젊은 시절에는 부귀영화를 꿈꾸고 자신의 경세론을 펼쳐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자신은 능력도 성격도 맞지 않아 외면했지만, 그 길을 부정한 것만은 아니다. 서경덕도 젊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사위에게 준 시(次企齋韻. 贈其子壻)’에서는 봉황새가 병아리로 살아서는 안 되기에 때가 되었을 때는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 입신양명하라고 권했다. 그가 생각한 입신양명은 어느 한 사람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다.

김안국에게 보낸 시를 보면, “장부(丈夫)라면 마땅히 백성의 더위를 씻어 주어야 할 것이니 응당 시원한 바람을 온 나라 안에 퍼뜨려야 할 걸세(丈夫要濯群生熱, 當把泠飆播帝鄕)”라고 했다. 입신양명의 목적은 백성의 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줄 부채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관점을 지녔기에 관직에 있는 사람은 탁월한 문장력이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다스려 스스로 모범이 되어야 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발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경덕은 사람마다의 쓰임새에 따라 자신처럼 은둔해 사는 사람도 필요하고, 또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능력있는 젊은이는 자신처럼 숨어살기보다는 세상에 나아가 백성의 고달픈 삶을 돌보고, 일을 할 땐 공평무사(公平無私)해야 그것이 선비의 진정한 출세(出世)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과 광범위한 관심 영역으로 다양한 신분과 학문 영역에 관심을 둔 제자를 육성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오히려 단일한 학파를 형성하는 데 장애가 됐다. 그 영향으로 그가 남긴 기록도 흩어지고 사라져 극히 일부만 전한다. 게다가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기에 실록에도 언급된 것이 적다. 자연의 이치를 주로 탐구했기에 직접적인 현실과 관련된 정치·사회사상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

그의 상소문도 두 편만이 남았다. 그중 인종(仁宗)에게 올린 ‘우리나라의 대상(大喪) 제도가 옛 법도에 어긋남을 논함(擬上仁宗大王論國朝大喪喪制不古之失疏)’은 단편적이지만 그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다. “마땅히 성현(聖賢)의 일에 뜻을 두고, 제왕(帝王)의 학문을 배운 뒤라야 다스림의 대업(大業)을 흥기시킬 수 있고, 지치(至治, 더할 나위 없이 잘 다스리는 정치)도 기약할 수 있다(當志於聖賢之業, 帝王之學, 然後大業可興, 至治可期也).”

서경덕이 말한 ‘지치(至治)’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추구한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왕도정치(王道政治), 그 자체다. 조광조가 실현하고자 했던 왕도정치를 서경덕도 똑같이 꿈꿨던 증거다. 때문에 왕도정치의 전제조건인 부단한 자기수양과 학문 정진을 인종에게 권고할 수밖에 없었다.

서경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각을 넓혀 경청(敬聽)을 강조했다. “신(臣)이 요즘에 지켜보니 벼슬이 없는 재야의 선비들이 글을 써서 나랏일에 항의해도, 가난하고 천한 백성의 말과 같다며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며 버려지고 있습니다. 신이 알기로는 성인(聖人)은 꼴을 베고 나무하는 사람의 말도 채택한다고 들었습니다(臣謂蒭蕘之言, 聖人擇之).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옵서는 가난하고 천한 자의 것이라고 버리지 마십시오(勿以寒賤而棄之).”

왕도의 정치는 경청과 민생이 출발점

제대로 수양을 하고,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면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누구의 말이라도 듣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여론 정치 혹은 공론 정치에 가까운 사고방식이다.

그는 인종에게 주장한 것을 일상적 삶에서 실천했다. 그의 제자 대부분은 빈부와 귀천에 관계없었다. 누구라도 그의 제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받아들였고 가르쳤다. 천첩의 아들인 서기(徐起, 1523~1591), 서자의 자손인 박지화(朴枝華, 1513~1592), 고을 아전의 아들인 정개청(鄭介淸, 1529~1590), 몰락 양반 출신 이지함(李之菡, 1517~1578), 기생 황진이가 그들이다. 서경덕은 세상을 경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공간에서만큼은 자신이 꿈꾼 왕도정치의 학문을 베풀며 펼쳤다.

인종에게 올린 상소에는 현실적 왕도정치 방안을 실천하려고 고민했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왕실의 규모 확대에 따른 민폐 문제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백성들이 꼴을 베고 짐승을 기를 곳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융성함이 멀리 1천 년 후까지 이르게 된다면, 능(陵)들이 경기 교외까지 넘치게 되어 밭과 들은 모두 황무지가 되어 남은 땅이 없어져 결국 백성들은 살 곳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왕실의 무덤이 커지고 많아져 백성의 삶이 피폐해진다며 왕릉과 왕실의 토지 과다점유를 경계했다. 서경덕의 토지에 대한 관점은 왕이나 왕실 위상이라는 지배층 중심의 시각이 아니다. 민생(民生)의 관점, 유한한 자원인 토지의 공공성이라는 시각이다. 조선 유학을 연구한 이종호 박사는 서경덕의 이런 토지관에 주목해 “조선 역사에서 능지(陵地)를 두고 이처럼 이의를 제기한 것은 기록상 서경덕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고 서경덕을 높게 평가했다.

고려와 조선 모두, 나라가 망해 갈 때는 공통적으로 백성들에게 ‘송곳 꽂을 땅도 없는(無立錐之地)’ 상태가 일어났다. 농본주의시대에 토지는 백성의 생명이다. 때문에 서경덕은 백성의 생존이 나라의 존망과 연결된다는 생각에서 죽은 자를 위한 땅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땅의 관점으로 왕릉의 확대를 반대했다. 이는 오늘날의 양극화에 따른 토지 독과점의 병리현상과도 그 맥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서경덕은 정치인도, 탁월한 정치사상가도, 현실을 냉정하게 비판했던 사회사상가도 아니다. 서경덕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한 철학자다. 학자로서 존경받았고 유명했지만, 정통 성리학자로는 인정되지 않았던 이단아다. 그럼에도 그는 백성들에게는 신화와 전설의 주인공 혹은 소재로 여겨졌다. 숨어 살았지만, 백성들과 더 가깝게 있었기에 백성의 애달픈 삶의 이야기가 그의 삶에 덧붙여졌고, 눈덩이처럼 굴러가며 커졌다. 백성들은 그들의 삶이 고될수록 그를 때로는 구원자로, 때로는 신통력을 지닌 흥미로운 인물로 포장했다.

야사(野史) 속의 서경덕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는 야사와 달리 자연의 법칙을 연구한 사실상 조선 최초의 자연과학자에 가깝다. 또한 죽기 직전, “죽고 사는 이치를 안 지 오래다. 생각이 편안하다”고 했듯 본질적으로는 깨달은 철학자였다. 무엇보다 서경덕은 선비 그 자체보다도 자연을 소요(逍遙)하면서 자신의 삶을 즐긴 비범함을 감춘 평범한 백성의 친구였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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